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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으로서의 음주

잡록 2008. 6. 7. 18:52 |

우리 학교 행사 가운데 고대타임(고대생들이 으레 늦게 모이는 습속을 애정을 섞어 표현한 말)이 적용되지 않는 거의 유일한 행사가 입학식이다. 2002년 입학식 때 나는 대강 이 때쯤이면 되겠다 싶어 어슬렁거리며 입학식장이던 노천극장을 올라갔다. 30분도 늦지 않았는데 벌써 교가를 부르고 있었다.^^; 1978년 당시 김상협 총장님은 ‘여기에서 춤추어라’는 입학식사를 하셨다. “여기 자유 정의 진리의 전당이 있다, 여기에서 춤추어라. 여기 민족주체 민간주체의 석탑의 광장이 있다, 여기에서 춤추어라. 여기 지성과 야성, 한국과 세계의 캠퍼스가 있다, 여기에서 춤추어라.”와 같은 구절이 나온다. 이는 헤겔의 『법철학』 서설의 표현을 패러디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여기가 로도스섬이다. 여기에서 춤추어라, 여기 장미꽃이 피어 있다. 여기에서 춤추어라.”라고 썼다.


그런데 이건 또 이솝 우화를 인용한 것이다. 어떤 거짓말쟁이가 자신이 로도스섬에 있을 때 굉장히 멀리 뛸 수 있었다고 자랑한다. 그러자 한 사람이 나서며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이 진실이라면 굳이 많은 증인이 필요 없지. 여기가 로도스야. 여기서 뛰어보게(Hic Rhodos, Hic Saltus)!” 헤겔은 이 우화를 미덥지 못한 이상을 늘어놓기보다 삶의 현장에서 실현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하라는 것으로 풀었다. 진리라면 현실의 검증을 마다하지 말고, 로도스섬으로 피하기보다는 지금 딛고 있는 곳에서 가능성을 보이라는 설명이다. 차병직 변호사님은 헤겔의 언설을 환상의 나라, 허구의 나라, 불가능의 나라에 닿기 위해 헛되이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지 말라는 메시지라고 보셨다. 축제의 계절인 오월에 음미해볼 만한 이야기 같아 많이 인용했다.


지난 5월 16일에 열렸던 대동제 주점은 즐거웠다. 재미난 시간은 빨리 가서 아쉽다. 주점이 있는 날 밤은 더 후다닥 지나간다. 처음처럼이 없는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빈자리를 소중한 사람들이 채워주셔서 얼마나 흥겨웠는지 모른다. 재현형님, 상준형님, 인호형님, 윤승형님, 광호형님, 정훈형님, 혜진누님 등의 선배님들 바쁜 시간 내어 왕림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바지런히 부침개와 만두를 굽고 감자를 튀기고, 오도독뼈를 익히고 달걀을 깨고, 과일 통조림을 조합하던 후배님들 모두 고생 많았어요. 주점 마치고 뒷정리하는 것처럼 괴로운 일도 없는데 묵묵히 남아 정리했을 여러 후배님들 사랑해요. 해장국은 들고 귀가했나 모르겠네요.


오월에 이어진 각종 술자리에서 숙취 없이 선방한 날도 있고, 주말 내내 뒹굴 거리며 요양했던 날도 있다. 술을 잘 못 마시면서도 술자리를 좋아하는 저는 아찔했던 경험도 적잖았지만 “술은 언제나 무죄다”라는 구호 아래 다음 술자리를 기획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현진건 선생님은 「술 권하는 사회」에서 식민지 조선의 암울한 상황을 술로 달래는 광경을 묘사했다. 하지만 술을 어떤 명분이나 핑계로 치장해 마시는 행동은 마뜩찮다. 우애로움이 술잔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술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술을 그냥 술로써 좋아해야 한다고 우겨본다.


술자리에는 부분 강화 효과(Partial Reinforcement Effect)가 있는 것이 아닐까 궁리했다. 부분 강화 효과란 보상이 언제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어떤 행동이 오래 지속되는 현상을 말한다. 주로 게임이나 도박의 사례를 많이 든다. 즉 추억으로 삼을 만한 성공적인 술자리가 언제 도래할지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에 끊지 못하는 증상이랄까?^^; 맹자는 사람들이 죽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어질지 못한 것을 좋아하는 행태를 비판하며 마치 “취하기는 싫어하면서도 무리하게 술을 마시는 것(惡醉而强酒)”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비유가 따갑다.


애주가들이 물아일체를 패러디 해 주아일체(酒我一體)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나는 ‘주간(酒間)’이라는 말을 종종 쓴다. 좀 과장을 보태면 내 삶은 술자리와 술자리 사이에 끼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내 모자란 체력과 부족한 정신력이 용납하는 순간까지는 숙취를 애인처럼 여기며 지내볼 계획이다. 음주의 한계비용과 한계수입이 같아지는 균형점은 당최 어디에 있을까? 다음 술자리에서 더 나은 모습으로 나타나기 위해 또 알차게 살아봐야겠다. 잠시 술잔을 내려놓은 시간 동안 모두들 안녕히!^-^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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