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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8.30 2010년 여름 답사기
  2. 2007.11.26 다시 짓는 공민왕사당

2010년 여름 답사기

문화 2010.08.30 04:58 |

이번 여름은 서울 바깥나들이를 별로 하지 못했습니다. 답사라고 할 만한 것도 없지만 그래도 제 마음을 사로잡았던 문화유산에 대한 짧은 감상을 늘어놓겠습니다.


1. 보은 법주사의 쌍사자 석등(7월 11일)


법주사 하면 목탑인 팔상전(捌相殿)을 가장 눈여겨보기 마련입니다. 지난 답사에서는 팔상전 뒤편에 있는 국보 제5호 쌍사자 석등이 가장 인상에 남았습니다. 우리네 돌조각이 대부분 그렇지만 사자는 온화함을 넘어 귀엽고 앙증맞았습니다. 여담이지만 원성왕릉으로 추정하는 경주의 괘릉(掛陵) 앞의 돌사자들은 무서운 눈으로 째려보기보다는 씩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진정한 권위나 오래가는 아름다움은 결코 공포나 폭력으로 조성할 수 없는 것일까요.


한국인에게는 오래 전부터 양순함과 익살맞음이라는 정서가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제멋대로 생각해 봤습니다. 오늘날 예의 넉넉함과 푸근함을 자꾸 잃어버리는 것 같아 안타까웠고요. 요즘 방영 중인 <제빵왕 김탁구>라는 드라마에서 “착한 사람이 이기는 세상”을 희구하는 닭살이 돋는 대사가 나오는데 천년이 넘도록 석등을 들고 있는 사자들이 바라던 바였는지도 모르겠다고 또 멋대로 상상했습니다.


사자가 한 마리는 입을 다물고 있고, 한 마리는 입을 벌리고 있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안내를 해주신 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은 교(敎)를, 입을 다물고 있는 모습은 선(禪)을 표상한다고 합니다. 찾아보니 시작과 끝의 순환을 의미한다는 등의 다른 해석도 있던데 꿈보다 해몽이겠으나 꽤 그럴 듯하게 들려서 한참을 그 앞에 서있었습니다. 초기 불교에서는 불보살 이외의 자가 성불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뒤에 이르러 일반 중생도 후천적인 수행을 통해 불성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퍼졌습니다. 그러던 것이 종국에는 일체중생은 불성을 지니고 있으며 미망에 가려져 있을 뿐 그것을 떨쳐버리면 성불한다고 말하게 되죠. 이 석등이 세워졌을 시기에는 어떤 생각이 퍼져 있었는지 자못 궁금합니다.


선종(禪宗)에서 말하는 돈오(頓悟)는 인간은 본래 깨달은 존재라는 본각(本覺) 사상에 기반을 둡니다. 따라서 수행할 때 깨달음을 기대하는 태도를 대오(待悟)라 칭하며 경계합니다. 깨달음을 얻고자 헤아리고 따지는 것은 사량분별(思量分別)이라 하여 덧없게 여기죠. 선종의 법맥을 잇는 후계자는 육조 혜능(慧能)이었지만, 저는 신수(神秀)의 게송인 “틈틈이 부지런히 닦고 털어서 먼지가 끼지 않도록 하라(時時勤拂拭 勿使惹塵埃)”라는 성찰도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지만 교와 선을 통한 점진적인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점오(漸悟)야말로 저에게 어울리는 자세가 아닐까 합니다. 고생스럽게 공부해야만 깨달음을 얻는 ‘곤이지지(困而知之)’라는 유가의 용어를 억지로 빌려서래도요.


제 잡생각이 꼬리를 물어서 입을 다문 이판(理判)과 입을 벌린 사판(事判)을 연상해봤습니다. 한 개인이나 어느 사회가 지속하려면 무게중심의 차이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이판과 사판 사이의 균형이 긴요한 과제라고 여겨져서요.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이라는 고 김대중 대통령님의 말씀과도 잇닿는 측면이 있는 듯합니다. 지금은 사판의 시대처럼 느껴지기는 하지만 제대로 된 사판을 연마하면서도 이판에 대한 관심을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뭐 이판사판으로 지내는 제가 할 소리인가 싶지만요.^^; 
 

입 벌리고 있는 사자와 입 다물고 있는 사자(7월 11일 촬영)

잠깐 언급했던 경주 괘릉의 돌사자(2월 13일 촬영)

2. 철원의 승일교(8월 25일)

철원은 38선보다는 북쪽에 있고, 휴전선보다는 남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부터 광복 초기까지는 북한의 땅이었지만 한국전쟁 이후에는 남한의 땅이 된 것이죠. 여담이지만 ‘남한’ 대신 ‘대한민국’이나 ‘한국’이라는 표현이 나을까 싶다가도 ‘북한’을 언급할 때는 ‘남한’이라고 말하는 것이 분단을 인식하고 통일을 지향하는데 좀 더 보탬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대한민국’이라고 표기하려면 북한의 국호를 온전히 불러주는 것이 전제되어야 할 것 같아서요. 남북이 서로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아서 정식 국호를 안 부르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라는 비판도 수긍할 만합니다. 어찌 보면 북한이나 남조선은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는 나라이니까요.


본래는 철원으로 래프팅을 갈 계획이었는데 비가 많이 내려서 래프팅은 취소되고 숙소 근처를 산책했습니다. 그 덕분에 철원의 지형학적 위치를 설명해주는 문화유산을 만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한탄강 위에 호젓하기 터 잡은 승일교가 그것입니다. 승일교는 이승만의 승(承)과 김일성의 일(日)을 합쳤다는 설과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고 박승일(朴昇日) 대령을 기리고자 했다는 설이 전해집니다. 승일교 초입에 붙은 석판에는 후자의 설명을 기록하면서 ‘북괴’라는 표현을 쓰는데 참 오랜만에 접하는 단어였습니다.


다리의 제작을 두고도 설이 갈려서 안내판에 두 가지 설명을 적어놓고 있습니다. 비교적 널리 알려진 건 북한이 다리의 절반 정도를 만들고, 한국전쟁 이후에 남한이 완성해서 남북이 반반씩 만든 다리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고 보니 다리가 좌우대칭이 좀 안 맞는다는 느낌을 어렴풋이 받았는데 실제로 양쪽의 무지개(홍예) 모양이 좀 다르다고 합니다. 작은 공법의 차이보다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남북 사이에 커져가는 마음의 거리겠지요. 래프팅 명소로 더 유명해진 곳에서 승일교는 통일을 기원하며 서있습니다.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너와 내가 닦고 낸 긴 길
형제들 손잡고 줄지어 서고
철조망도 못 막아
지뢰밭도 또 못 막아

휴전선 그 반은 네가 허물고
나머지 반은 내가 허물고
이 다리 반쪽을 네가 놓고
나머지 반쪽을 내가 만들었듯
- 신경림, ‘승일교 타령’ 中


승일교는 등록문화재 제26호입니다. 등록문화재 제도는 1876년 개항 이후 한국전쟁에 이르는 동안 만들어진 근대문화유산을 효율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2001년 7월 도입했습니다. 그동안은 일제 잔재라는 오명과 개발 광풍 속에서 멸실되기 일쑤였다면, 등록문화재 제도는 오늘이 쌓여 역사가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곱씹게 해줍니다. 등록문화재 제도가 정착된다면 일상의 흔적들에 대한 기록과 보존도 한층 강화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특히 등록문화재에는 성당이나 교회도 적잖이 지정되어서 불교 문화유산에 편중된 우리네 문화유산의 지평을 좀 더 넓혀주는 긍정적 효과도 있습니다.


3. 비무장지대의 태봉국 도성(8월 25일)

‘궁예도성’은 좋은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궁예도성은 궁예를 폄하했던 고려, 조선시대의 지리서나 일제 강점기의 지도에 나오는 말이라고 합니다. 최근 철원군은 “역사적으로 국가가 건국됐거나 천도(遷都)를 했던 경우 도성에 국왕 개인의 이름이 붙여진 사례는 없다”라는 지적을 받아들여 궁예도성을 태봉국도성으로 개칭했습니다. 승일공원에 세워진 관광안내지도에도 태봉국 도성이라고 표기되어 있더군요. 승자에게 치우친 기록을 조금 교정하겠다는 애틋한 마음씨가 고마웠습니다.


하나의 사물을 표현하는 데 단 하나의 정확한 표현이 있다는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은 무시무시한 말씀입니다. 꼭 이런 이론이 아니더라도 태봉국 도성이 좀 더 올바른 표현인 것은 또렷합니다. 이름은 되찾았지만 태봉국 도성은 여전히 가볼 수 없는 곳입니다. 비무장지대(DMZ)에 남아있어 아직 제대로 된 조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남북이 태봉국 도성을 함께 조사하는 모습을 희망해봅니다. 개성 일대의 고려왕릉들도 보존이 제대로 되지 못해 황폐해져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자본주의의 안목(?)으로라도 투자할 수는 없는 것인지 안타깝습니다. 아참~ 승일교 근처에 자리잡은 ‘궁예도성’은 음식점 이름이나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함께 간 분들과 영화 ‘인셉션’에 나오는 아리아드네 이야기에서 미노타우로스까지 화제가 이어졌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미노타우로스는 소머리를 하고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로 묘사됩니다. 문득 궁예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삼국사기』에서 미노타우로스 정도로 못된 인물로 그려집니다. 궁예의 포악한 성격을 나타내는 구절이 적잖고 비참한 최후 역시 박절하게 쓰여 있습니다. 그러나 민간에 전승되는 이야기는 궁예가 극악무도한 인물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궁예와 관련한 지명이 오늘날 많이 전해지는 까닭도 한국사에서 보기 드문 캐릭터였던 궁예에 대한 연민이 전해지는 탓이겠지요.


신화학자 정재서 선생님은 신화 읽기의 편식 현상이 상상력의 빈곤과 편견을 낳는다며 풍부하고 균형 잡힌 상상력을 위해 그리스 로마 신화와 동양신화는 물론 다른 신화도 읽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서양의 미노타우로스가 있다면 동양에는 소머리를 한 염제(炎帝) 신농(神農)이 있습니다. 신농은 농업의 신이자 불의 신이며 복희(伏羲), 황제(黃帝)와 더불어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삼황으로 꼽힙니다. 신농은 황제와의 전쟁에서 패해 중국 주변에서 인기가 높다고 합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등장하기도 하고, 월남의 개국신화에서 시조신으로 나타난다고 하네요. 신농은 동이족 계열의 신화로 보는데 신농의 후계자가 바로 잘 알려진 치우(蚩尤)입니다. 신농은 인간에게 농사짓는 법이나 독초와 약초를 구별하는 법 등을 가르쳐 준 어진 신입니다. 궁예는 미륵불을 자처했다고 하니 신농 같은 자애로움을 지향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패배자에게 돌아온 것은 미노타우로스라는 멍에였네요.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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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3일 있었던 공민왕사당 답사에 함께 해준 청원이에게 깊은 고마움을 표합니다.^0^

<다시 짓는 공민왕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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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흥창역을 나오자마자 보이는 안내 표지판이 고맙다. 공민(恭愍)이라는 시호는 명나라에서 준 것이다. 우왕은 공민왕이 부활시킨 고려 시법에 의거하여 인문의무용지명렬경효대왕(仁文義武勇知明烈敬孝大王)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공(恭)은 공경하게 사대하라는 뜻이다. 민(愍)은 나라에서 재난이나 반란을 만나고, 백성을 비통하게 하고 해친다 정도의 뜻이다. 잇따른 반란과 홍건적, 왜구 등에 시달렸던 공민왕 치세의 파란만장함에 어울리기는 하나 그의 적잖은 업적으로 볼 때 깎아 내렸다는 느낌이 짙다.



“이건 뭐냐!” 친구의 탄식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창전동 공민왕사당은 전면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평소에도 문이 닫혀 있어 들여다 볼 수 없는 곳인 만큼 노여움(?)을 풀라고 다독였다. 친구가 고른 저녁 메뉴가 실망스러웠기에 망정이지 지청구가 더 날아올 뻔했다. 사실 크게 알려지지 않은 문화유산을 찾다 보면 개방하지 않는 곳도 많고 퇴락해서 안쓰러운 경우도 흔하다. 함께 온 벗에게 미안한 마음에 마포구청에 몇 가지를 물었다. 마포구청 문화체육과에서는 사당 보수공사에 관한 안내가 부족해 문화재 관람에 불편을 끼쳐 죄송하다고 말씀해주셨다. 노후된 사당을 보수하는 공사는 10월 초에 착공하여 12월 초에 완료될 예정이라고 한다. 보수를 마쳐도 종전과 마찬가지로 화재예방 및 사당내부 소품 보호를 위해 개방하지 않을 계획이란다.


창전동 공민왕사당은 조선 초기에 양곡창고인 광흥창에서 일하던 창고 관리인의 꿈에 공민왕이 나타난 것을 계기로 지어졌다고 한다. 조선 초기에 공민왕을 모시는 건 반역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그래서 삼불제석(三佛帝釋)을 모시고 신당 또는 당집으로 부르다가 정몽주 등 고려의 충신들이 복권되던 1790년경 비로소 공민왕사당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일제 강점기 때 화마를 입었다고도 하고, 한국전쟁 때 파괴되었다고도 한다. 소실된 사당을 주민 스스로 건축했다고 전해지고 있어 민간 전통건축기술 수준을 헤아리게 하는 자료로 평가되어 등록문화재 제231호로 지정되었다. 공민왕의 위대성은 그 당시에도 인정받은 모양이다.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공민왕에 대한 제사는 이어졌다. 이러한 숭모 분위기가 이어져 창전동뿐만 아니라 종묘 안의 공민왕신당이나 경북 봉화군 청량산 공민왕당 등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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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사당은 와우산 아래 광흥창터에 인접해 있다. 공민왕사당의 터는 옹색해서 도무지 사진 찍을 각도가 나오지 않는다. 사당 옆의 담들은 고즈넉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


『서울 民俗大觀』 1권과 『마포 : 어제와 오늘, 내일』이라는 책에 공민왕사당의 내부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사진 자료들이 다수 있다. 공민왕사당에는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신상 외에도 최영장군과 마부, 삼불제석과 동자상 등이 걸려있다. 공민왕 신상은 제법 화격(畵格)이 있는데 황색 곤룡포가 미려하고 호피무늬 의자가 위엄을 더한다.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려 말기의 사적들이 상당 부분 날조되었음은 널리 알려졌다. 붓이 굽었던 건 오백 년 고목을 찍어 넘기기가 만만치 않았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망국의 필연성을 입증하기 위한 희생제의였던 셈이다. 공민왕이 시기심이 많고 잔인했다는 『고려사』 편찬자들의 험담과는 달리 넉넉한 신상의 모습이 반갑다. 공민왕은 고려의 대표적 화가로 손꼽히며 글씨도 잘 썼다는데 예술가적 풍모가 얼마나 녹아나느냐가 공민왕 어진의 알맹이가 아닐까 싶다. 과연 서울에서는 보기 드문 고려시대 인물과 관련된 문화유산이라 할 만하다. 우리는 옛것이라고 하면 으레 조선시대만 떠올린다. 우리네 유구한 전통에 감춰진 여러 겹의 속살을 헤집기 위해서 고려도 알고, 근현대도 탐구하는 의식적 노력을 기울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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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는 없었던 일각문(一角門)을 새로 만드는 듯싶다. 90년대 초 사진을 보니 투박한 철문을 달아놓았는데 그 후 태극문양을 집어넣었다. 점점 사당의 모양새를 갖추어 간다.


등록문화재 제도는 1876년 개항 이후 한국전쟁에 이르는 동안 만들어진 근대문화유산을 효율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2001년 7월 도입됐다. 그동안은 일제 잔재라는 오명과 개발 광풍 속에서 멸실되기 일쑤였다면, 이제는 오늘이 쌓여 역사가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곱씹게 해준다. 등록문화재 제도가 정착된다면 일상의 흔적들에 대한 기록과 보존도 한층 강화될 전망이다. 등록문화재 제도는 지정문화재 제도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정책이다. 중앙정부나 지자체 지정문화재가 각종 규제를 수반하고 있어 재산권 침해가 불가피한데 견주어 등록문화재는 보존이나 활용에도 융통성이 많은 편이다. 소유자 중심형 문화유산 보호제도로서 국가는 각종 혜택을 통해 소유자의 활용 의사를 북돋워주는 방식인 셈이다. 흥미로운 등록문화재들이 많지만 공민왕사당도 매우 이채롭다. 근대에 지어졌지만 그 안에 담겨진 내용물은 600년도 넘는 옛날이다. 공민왕의 험난한 좌절을 따가워하기 좋은 곳이다.


공민왕은 민간신앙에서 받드는 몇 안 되는 임금이다. 무당을 소재로 한 소설 『계화』에는 “무당은 행복한 사람들을 볼 수가 없다”라는 구절이 있다. 공민왕을 기리는 민중이 있다는 건 그 불운함에 대한 동정인지도 모른다. 무속은 비운의 죽음일수록 오히려 각별하다. 공민왕의 억울함이 우리네 서글픔과 잘 포개진다는 믿음이 생기는 것이리라. 한국인에게 곧잘 한(恨)의 정서가 있다고들 한다. 이는 결국 한스러움이 살아가는 사람의 생활을 너무 헝클어뜨려서는 안 된다는 문화다. 한은 풀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체현한 것이 마을굿이며 공민왕의 한을 푸는 것이 공민왕사당제다. 인습을 버리고 전통문화를 선택적으로 계승하자는 주장은 동감할 만하다. 하지만 그런 명분으로 서민의 소박한 기원을 무시할 용기는 내게 없다. 고통에 대한 연민과 무병장수에 대한 갈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오늘날 지역화합의 마당으로 살리는 방안을 고심해봤으면 좋겠다.


옛 기록을 살피다 보면 공민왕의 개혁이 어찌나 지난했던지 가슴이 짠하다. 부원배를 몰아내는 건 고난의 연속이었다. 신돈의 개혁에 얼마나 많은 저항이 있었는지를 엿본다. 북방을 개척했던 장수 인당의 목을 베어 원나라의 분노를 달랠 때는 참담했다. 관제를 격상시켰다가 다시 격하시키고, 원나라의 연호를 정지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명나라 연호를 사용하는 역경에 마음이 아렸다. 명나라 사신이 기녀의 실수를 트집잡아 항의하자 시중 염제신이 유배되는 대목에서는 괴로웠다. 공민왕이 노국공주가 돌아가자 애이불상(哀而不傷)에 실패해 총기를 잃은 게 단지 성정의 모자람 때문은 아니었다. 숙명은 그의 의지를 압도했다. 그러나 정치적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일은 결과로서 책임져야 한다는 점이다. 듣기 좋은 개혁 구호를 늘어놓는 지금의 지도자들이 경계 삼을 일이다. 부정적 지식(negative knowledge)이라는 말이 있다. 실패나 실수, 잘못으로부터 얻는 지식을 일컫는다. 우리는 성공보다는 실패로부터 많이 배운다. 고초 속에서 잉태되는 개혁을 입으로만 외치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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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사당은 맞배지붕에 2칸으로 된 건물이다. 사당 옆으로는 들여놓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운동기구가 있다. 맞은 편에 아파트 공사가 한창인데 주민들의 편안한 휴식처로 활용될 것 같다.

영구히 보존하는데 주안점을 두는 지정문화재와는 달리 등록문화재는 외관을 크게 변화시키지 않는 범위에서는 고치거나 증축이 가능하다. 사당을 새로 짓는 모습을 보며 저래도 되나 싶었던 내 궁금증도 멀끔히 풀렸다. 아마 보수공사를 결정한 중요 원인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리라. 등록문화재 지정을 전후로 훼손된 근대문화유산들이 적잖다고 들었다. 다행히 공민왕사당은 마포구민의 지속적인 관심 덕에 새 단장을 준비하고 있다. 매년 열리는 공민왕사당제에 힘입어 이 작은 사당이 지역주민들과 어그러지지 않고 친숙한 존재로 각인된 덕분이다. 근대문화유산의 가치는 찾기 나름이고 가꾸기 나름이다. 서운해하던 친구에게 등록문화재의 취지를 설명하고 금단청까지 잘 마르면 다시 찾아오자고 권해야겠다. 가서 고하리라. 대왕 당신을 도무지 미워할 수 없었다고.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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