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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27 으뜸이 되기 위한 야권 연대 2

스티븐 런치만이 쓴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2004, 갈라파고스)에는 비잔티움이 서방의 지원을 얻기 위해 교회통합 문제에 매달리는 대목이 나온다. 동서 기독교계는 각종 교리 해석과 실천 문제를 놓고 갈렸다. 속인(俗人) 사제의 혼인에 대해 논쟁했고, 성찬용 빵이 발효된 것이어야 하느냐 아니냐를 놓고도 다퉜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교권의 문제였다. 로마 주교(교황)의 위상을 놓고 양측은 물러설 수 없었다. 동방 정교회는 모든 주교는 기본적으로 동등하다고 믿었고, 로마 주교는 수석의 지위를 가질 뿐 최고의 수장으로 여기지 않았다. 반면에 교황의 절대적 권위를 주창하는 서방 교회는 이를 양보하지 않았다. 비잔티움의 요안네스 8세는 서방 국가들의 지원을 얻기 위해 동서 교회통합을 억지로 추진했다. 비잔티움의 많은 지식인들이 반발했고 시민들은 분열했다.


오스만 투르크에게 함락되던 1453년까지 콘스탄티노플이 그토록 갈망하던 서방의 도움은 거의 없었다고 역사는 증언한다.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 화해가 아닌 꿍꿍이로 맺어진 통합이 얼마나 실속 없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 전날 밤 소피아 성당은 북적였다. 라틴인과 통합론자들이 더럽힌 곳에서 예배를 볼 수 없다는 독실한 그리스인들도 이날만은 소피아 성당에서 기도했다. 교회통합을 반대했던 사제들도 교회통합파와 함께 예배를 보았다. 글쓴이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동서 교회통합이 이루어졌다고 사뭇 비장하게 전한다. 그러나 이건 미화된 묘사일 뿐 하룻밤의 일치로 이네들의 갈등을 다 메우지 못했음은 분명하다. 다만 외침의 공포로 말미암아 내부에서 티격태격할 동력을 잃었을 뿐이다. 제국의 최후를 함께 하는 유대감 정도로 이해하면 그만이다.


뜬금없이 옛날이야기를 꺼내든 까닭은 오늘날의 현실이 갑갑해서다. 입으로는 거대 여당을 견제하겠다는 이들이 서로 앙금을 남기는 모습이 안타깝다. 10·28 재보선에서 야권은 결국 후보 단일화에 실패했다. 이들에게는 소피아 성당에서의 맞잡음 정도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현 시국에서 여권의 위세를 오스만 제국의 압박에 빗대는 건 다소 무리가 있지만 말이다. 야권은 단일화 협상이 끝내 무산된 경기 안산 상록을의 교훈을 새겨야 한다. 일단 후보를 출마시킨 다음에 합치는 것은 너무 어려운 길임을 새삼 확인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는 지금보다 더 많은 행위자가 뛰어들 공산이 크다. 지역구 한 곳에서도 이렇게 진통을 겪는데 협상 주체가 더 늘어날 전국 단위의 선거에서 과연 얼마나 통합을 성사시킬 수 있을지 걱정이다.


수도권에서 민주당이 의외의 쾌승을 거뒀다. 민주당과 진보정당 사이에서 고민했던 유권자들이 사표를 방지하겠다는 선택을 내린 덕이 크다. 안산 상록을에서 후보 개인의 경쟁력에다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 진보신당의 지원이 합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임종인 후보가 15.57%의 득표에 그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수치는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진보정당이 사표 심리의 풍파를 견뎌내고 얻어낼 수 있는 표의 정점에 가까워 보인다. 지역구에서 임종인 후보만한 인지도를 갖춘 데다 야3당이 일치단결할 수 있는 상황이 모두 맞아떨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경남 양산에서 민주당 송인배 후보가 한나라당 박희태 후보에게 4% 포인트 차이로 석패하며 선전한 것도 민주노동당 박승흡 후보를 1순위로 지지하던 유권자들이 힘을 실어준 덕분이다.


그렇다면 민주당이 지금의 작은 승리를 넘치게 기뻐할 필요는 없다. 정부 여당의 실정으로 말미암아 한나라당 일당 독주 분위기에서 한나라당 대 비한나라당이 비등한 수준이 된 것은 그나마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이는 결국 예의 사표 논쟁이 다시 불거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민주당 정세균 대표는 최근 저서에서 “과거의 민주연합, 지역연합을 뛰어넘는” 연합으로서 “민생을 중심으로 한 연합”을 제안했다. 민생연합을 통해 양당구도를 복원하겠다는 계획은 현 시점에서 가장 유효적절한 비전 가운데 하나다. 이를 위해서는 때때로 민주당이 기득권을 내어놓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사표 심리가 결국 민주당의 이익으로 이어진다는 안일한 태도를 버려야 한다. 제1야당이 선거연합을 통해 당력을 선택적으로 집중할 수 있다면 한결 전략적으로 선거에 임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현재의 정치 구도는 1990년에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한 것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을 계승한 한나라당이 비교적 풍요로운 곳간을 자랑하는 것은 영남의 고정표가 있기 때문이다. 3당 합당 당시 대구 경북이 여당 정서가 강했다면 김영삼 전 대통령이 활약하던 부산 경남은 야당 정서가 상당했다. 통일민주당이 평화민주당과 민주정의당의 중간쯤이라고 본다면, 야당 진영에서 김영삼 중심의 영남 민주계가 이탈하면서 형성된 구도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18대 국회의원 지역구 의석수를 살펴보면 영남이 68석으로 호남, 충청, 강원, 제주 지역을 모두 합친 66석보다 많다. 여기다가 정부 여당이 세종시를 흔들면서 수도권 지역주의를 부추기는 것도 한나라당 입장에서는 크게 손해 볼 것 없는 장사다.


이와 같은 독점적 이윤의 발생은 한국 정치의 발전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 사분오열된 야권이 거대 여당을 이길 생각은 포기하고 그에 ‘버금’가려는, 즉 2등이나 하는 경쟁에 함몰된다면 끔찍하다. 이제 힘을 모으면 ‘으뜸’이 될 수 있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백낙청 선생은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에서 한국사회의 개혁을 위해 민족통일을 중시하는 자주파인 NL, 노동자 농민의 권익을 중시하는 평등파인 PD, 개량주의 시민운동 및 온건개혁세력인 BD(부르주아 민주주의)의 3자 결합을 제안했다. 특히 BD는 하나의 단일한 세력으로 보기 힘들만큼 다채로워 정리하기가 까다롭다. 그럼에도 이들이 모두 힘을 합치지 않으면 한나라당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이 얼마나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지 우리는 생생히 지켜보는 중이다.


자기 의사를 온전히 실현하지 못하는 건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나 완전히 실현하지 못하는 건 더욱 애통한 일이다. 야권 연대 논의 과정에서 가장 많이 내어 놓아야 하면서도 가장 얻을 것이 많을 민주당이 좀 더 분발하길 바란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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