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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6.30 서민의 품에 안긴 바나나 5

며칠 전 바나나킥을 소주 안주로 삼으면 기가 막히다는 내 주장에 반신반의하던 친구들이 한번 먹어보더니 맞장구를 쳐줬다. 그 날 바나나킥 다섯 봉지를 맛나게 먹으며 바나나에 대한 나의 애호를 새삼 확인했다. 문득 통상정책 강의시간에 교수님이 과거에 바나나 한 개가 얼마나 귀했는지를 추억하시던 것이 떠올랐다. 막상 먹어보면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과일이 하도 귀하다보니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통해 자유무역의 혜택을 설명하시려는 의도였을 게다.


바나나의 황홀한 맛에는 거품이 적잖았다는 체험담에서 그 옛날 도루묵의 거품이 생각난다. 임진왜란 때 한양을 버리고 피난을 갔던 선조 일행은 먹을 것이 변변치 못했다. 아쉬운 대로 진상된 ‘묵’이라는 생선을 먹은 선조는 너무 맛있다며 생선의 은빛 뱃살을 보고 ‘은어(銀魚)’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전쟁이 끝나고 선조는 달게 먹었던 은어 생각이 났다. 그러나 산해진미와 함께 놓인 은어의 맛은 예전 같지가 않았다. 왕은 도로 ‘묵’이라고 부르도록 하였고 여기서 도루묵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손을 떨며 한 개를 조심스레 까먹던 바나나를 요즘은 한 다발씩 사서 대강 까먹다가 한 두 개 정도는 너무 갈변했다며 음식물 쓰레기 처리하기 일쑤다. 바나나의 베이지빛 과육을 음미하며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을 떠올려봄직하다. 세상인심도 반추한다면 금상첨화다.


바나나는 한때 무척 귀한 과일이었지만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수출입되는 과일이다. 거래가 많다 보니 분쟁도 많아 2001년에 미국과 유럽연합(EU) 간의 바나나 무역분쟁이 일단락 되기도 했다. 1980년대 우리나라에서는 바나나를 수입 규제하는 대신 비닐하우스를 전기 난방해서 바나나를 재배하게 했다. 이 국내산 바나나는 맛도 신통치 않았거니와 값도 비쌌다. 게다가 농업용 전기는 원가 이하로 공급되기 때문에 그 차액을 국민이 분담해야 했으니 이런 낭비가 없다. 1991년 수입 개방으로 델몬트, 돌, 스미후르 같은 기업들이 국내시장에 진출하면서 바나나는 그 귀족적 자태를 잃고 서민의 품에 안겼다.


예전에는 호사품이었던 바나나가 저렴한 가격에 부담 없이 사먹을 수 있게 된 것은 환영할 일이다. 바나나를 처음 수입할 때 사과 소비가 줄어 사과농가가 타격을 입는다며 반대했던 게 무색할 정도다. 그런데 얼마 전 한-칠레 FTA를 체결할 때는 포도농가가 타격을 입지는 않을까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다행히 큰 무리가 없이 지나갈 모양이지만 앞으로 농업 부문의 개방은 이런 식의 갈등이 재연될 소지가 많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주곡, 과일, 육류가 비싸다는 게 사실이라면 풍요로운 먹을거리를 값싸게 즐길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건 그리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여전히 쇠고기는 비싸지만 그래도 값 싼 수입 쇠고기가 있다는 건 육식을 즐기는 이들에게 그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애국심에 호소하는 것도 좋지만 파시스트가 아니고서야 애국심도 동이 나게 마련이다.


다만 사회적 후생을 증가시키더라도 단기적으로 소수에게 피해가 집중된다면 이를 시정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어쩌면 농산물 개방을 둘러싼 갈등은 역진적인 소득재분배 문제를 적절하게 통제하지 못하는 정부와 국회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싶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트러스트(Trust)]에서 사회구성원들의 신뢰가 사회적 비용을 감소시켜 경제적 번영을 뒷받침하고 국가경쟁력을 높인다고 말한다. 신뢰가 한 나라의 복지와 경쟁력을 결정짓는 사회적 자본이라는 주장은 경청할 만 하다. 후쿠야마의 지적대로 대한민국이 저신뢰(low-trust) 사회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상호불신에 따른 사회적 비용이 좀처럼 줄지 않는 것은 나라살림을 주름지게 할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근간까지도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한-미 FTA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의 하나라면 때려치우라는 단선적 주장 대신 어떻게 하면 좀 더 얻어낼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치열한 토론이 벌어지길 바란다. 우리가 어느 선에서 배수진을 칠 것인지, 우리가 꼭 얻어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놓고 섬세한 논쟁을 벌이다 보면 막연한 불안과 불신도 줄어들 것이다. 노란 껍질이 그럴싸하지만 썩기 쉬운 바나나처럼 시장 개방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는 명쾌할지언정 곪기 쉽다. 한덕수 경제부총리가 “개방해서 실패한 경우도 있었지만 쇄국해서 성공한 나라는 없다”고 한 말은 설득력 있다. 바나나처럼 썩기보다는 바나나가 서민들의 벗이 되었듯이 개방의 혜택이 서민들에게 고루 돌아갈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 [小鮮]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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