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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책하기의 어려움

2010. 4. 22. 02:50 |

(서울시립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2기 카페에 올린 글을 일부 수정했습니다)

1.
지난 20일에 방영된 문화방송의 PD수첩에서 보도된 검사의 스폰서 파문을 접했다. 이번 법조비리 파문의 진실이 어디까지 밝혀질지 모르겠으나 틈틈이 관심을 건네봐야겠다. 근래에 법치주의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우렁차다. 통상적으로 ‘법의 지배(rule of law)’와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를 구별한다고 배웠다.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지 않는다면 법의 지배보다는 법에 의한 지배가 될 공산이 크다. 법의 지배는 평평해야 한다. 특정인이나 특정집단에게 기울어진 ‘편향된 법치’는 형용모순이다. 나는 또 부질없이 기대를 해본다.


어느 검사님이나 빼어난 재주를 지니신 분이실 텐데 태산이 무색하게 책을 읽은 결과가 고작 이런 것이라면 삶이 좀 허망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봤다. 이번 일을 목도하며 미래의 법조인은 인권감수성을 포함하는 전문성을 갖추되 특권의식은 버려야 함을 절감했다. 다원화된 민주사회에서는 법조인에게 응당 보장되는 ‘권력’이란 없다. 소명적 책임감이 필요한 자리를 잠시 맡아준 이에게 부여된 제한된 ‘권한’이 있을 따름이다. 더욱이 검사는 공익의 대표자(검찰청법 제4조)가 아닌가.


보통 사람도 전문지식을 공유하거나 전문분야에 참여할 기회가 늘어났기 때문에 법조 직역에 대한 견제와 비판이 강화된 추세다. 전문집단을 경원시하는 현상은 일장일단이 있지만 어느 직종에 종사하든 자신의 권위는 스스로에 대한 가치 부여를 통해 세워야 함을 알 수 있다. “다수자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다수의 권리를 지켜주는 것이 법원의 역할”이라는 워렌 미 연방대법원장의 말씀을 상기한다. 비단 법원에만 국한되지 않고 법을 배우는 이들이 품어야 할 화두가 아닐까 싶다.


2.
『점필재집』의 한 대목이다. 어느날 김종직 선생이 아버지 김숙자 선생께 병조판서 안숭선이 남의 뇌물을 받아 의금부에 체포되었다고 아뢴다. 아버지는 “안공이 뇌물을 받은 일은 비루하지만 죄의 정상(情狀)이 아직 명백하지도 않고, 그는 군자이고 재상인데 너 같은 젊은이가 무슨 연유로 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며 탓하는가?”라며 타이른다. 내가 나보다 훌륭한 어른들을 비판하고 싶을 때면 꺼내 보는 이야기인데, 단순히 봉건 윤리로 투덜대기에는 곱씹을 점이 있는 듯하다.


나처럼 천학비재한 녀석도 자기보다 빼어난 사람을 왈가왈부할 수 있는 권한을 준 것이 민주주의의 혜택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권리는 절제해서 행사할수록 더 빛난다. 물론 비판하는 대상보다 반드시 뛰어나야만 비판의 자격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더욱이 공적 영역에 있는 인물을 비판하는 것은 주권자로서의 엄연한 권리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자기를 굽히고서 남을 곧게 하는 경우는 드문 듯싶다.


정도전 선생은 『경제문감』에서 암행어사는 남을 꾸짖는 사람이므로 “오직 스스로를 책망하기 어렵게 여기지 않아야 남을 책망하여 능히 그 임무를 다할 수 있다(惟其不難於責己 則施於責人 能稱其任矣)”라고 역설했다. 법률가 역시 남을 책망하는 일을 맡기도 해야 할 테니 이 말씀을 가슴에 새겨본다. 스스로를 먼저 책망하는 자세가 있어야만 그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자책(自責)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는 남 탓보다 자기 탓이 바지런한 사람을 좀 더 신뢰하기 마련이다.


3.
“남에게는 봄바람처럼 관대하고, 자신에게는 가을서리처럼 엄격하다(待人春風 持己秋霜)”라는 『채근담』 구절을 많은 이들이 좌우명으로 삼는 것을 보았다. 자기에 대한 기준과 남에 대한 기준이 같아서 자기와 타인에게 동등한 잣대를 들이대기란 어렵다. 하물며 자신에게 더 촘촘한 쳇구멍을 제시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인 것 같다. 적어도 다른 사람의 운명을 좌지우지 할 자리에 계신 분들이라면 자신의 쳇구멍이 너무 성긴 것은 아닌지 살필 일이다.


뒤숭숭한 소식이 날아오니 홀로 있을 때도 몸가짐을 삼간다는 ‘신독(愼獨)’이라는 문구에 눈길이 간다. 누가 보지 않더라도 내밀한 행동이 한결같기도 난망한 일인데, 오히려 혼자 있을 때 더 잘하려는 마음가짐에서 기품이 느껴진다. 신독하면 오규원 선생의 「죽고 난 뒤의 팬티」라는 시가 떠오른다. 교통사고를 몇 번 겪고 나니 시속 80킬로만 가까워져도 앞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를 확인하게 되었다는 내용의 시다.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에 신경 쓰는 사람은 도무지 대충 살 수가 없다. 팬티로 눈동자를 굴리는 마음은 혼자 있을 때 경계하는 마음과 통한다. 나도 세월의 무게라는 핑계를 대며 때가 묻을 대로 묻어 남는 건 팬티 한 장의 깨끗함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첫 마음을 지키기 위해 애써야겠다. 우리 사회에 착한 법조인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런데 선량함은 법조인의 덕목이라기보다는 모든 직업인의 윤리에 지나지 않을 테니 그런 바람을 자주 접하는 건 민망한 일이다.


내가 중간고사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은 더욱 스스러운 일이다. 쿨럭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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