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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용과 효용

경제 2004. 1. 2. 01:09 |
친구의 누리집을 들렀다가 지난 학기 강의에서 배웠던 내용을 다시금 돌아볼 수 있었다. 통상정책 강의 시간에 나왔던 이야기인데, 경영, 경제분야와 인문, 사회분야간 사고의 차이점에 대한 것이다. 바로 한계를 고려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차이를 말한다. 즉, 경영, 경제가 제약조건을 따지고 분석하는 반면, 인문, 사회분야는 당위성을 역설하면서 현실을 바라보고 바꾸려는 노력을 한다는 기본적인 발상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무리한 일반화의 혐의를 완전히 걷을 수는 없겠지만 일면 타당한 구분일 것 같다. 얼치기 경영학도로 살면서 귀가 못이 박히게 듣고 마음에 쑤셔 넣었던 것이 바로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의 문제, 비용과 효용의 분석문제이기 때문이다. 가령 기초적인 회계원리를 꺼내보면 재무제표 정보의 제공에 대한 제약요인으로 특정 정보로부터 기대되는 효익은 그 정보를 제공하기 위하여 소요되는 비용을 초과해야한다는 ‘효익과 비용간의 균형’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물론 효익과 비용의 평가는 잣대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고, 효익향유자와 비용부담자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문제 등이 비일비재하다보니 효익과 비용의 비교분석은 경영학의 주요 탐구 과제이다.


지식인들이 흔히 어떤 사회적 현안을 논하면서 심심치 않게 하는 말이 “비용이 얼마나 들던 간에...” 등의 표현이다. 내 주제에 경영학 물은 먹었다고 이런 말을 들으면 이제는 적잖이 불편하다. 비용이 얼마나 들던 간에 무조건 해야하는 일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용을 들인 만큼 효용이 창출되지 않는 것에 투자를 한다는 것은 합리적 효용함수를 가진(비록 이래저래 제한되기는 하지만...) 인간을 기만하는 처사다. 물론 사람 사는 세상에서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최소한의 가치들은 상당한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 그러나 이 비용 지출도 어디까지나 장기적 효용을 꾀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누구도 타인에게 손해보는 장사를 지속하게 할 권리가 없다. 물론 그 장사가 상도덕에 지키고 있다는 전제조건이 충족되었을 경우에 말이다.


자유, 평등, 정의, 평화, 물질적 복지, 사회적 안전, 쾌적한 환경... 이러한 가치들은 따로 떨어뜨려 놓아도, 이런저런 조합을 해놓고 보아도 좋은 것들이다. 그러나 이런 가치들이 실현되어 우리네 살림살이가 나아지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그 비용조달에 대한 고민을 없이 비용을 들여 이룩할 효용에 대한 찬사만 늘어놓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무책임한 행동이다. 이상적 가치들은 저마다 군침이 돌지만 그걸 다 한상차림할 수 없는 우리의 형편을 직시해야 한다. 아마 한상차림할 수 있는 나라는 당분간, 어쩌면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원칙과 당위를 역설하는 나 같은 사람들은 이미 생존경쟁 체제에서 자기위치를 굳힌 사람들이다. 즉, 대학교수나 언론인들이 아름다운 원칙을 역설하는 것으로 인해 자신이 손해 볼 일은 전혀 없다는 뜻이다. 오히려 존경까지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말에 감동해 그 말을 그대로 실천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큰 손해를 입을 수 있다.

나의 고민은 지식인의 책임에 관한 것이다. “내 주장이 현실에서 이루어지건 이루어지지 않건 그건 중요치 않다. 나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원칙만을 역설할 뿐이다”는 게 많은 지식인들이 갖고 있는 자세일텐데, 과연 이러한 자세에 문제는 없는가 하는 것이다.
- 강준만, 한국일보 2002년 9월 17일, [더러워져야 성공한다] 中


진중권은 강준만의 칼럼을 평하며 당위론자들에 대한 낡은 비난에 남에게까지 “큰 손해”를 입힌다는 새로이 죄목이 하나 더 첨가된 것이라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원칙과 당위"의 피해자들은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공정성’을 기치로 내걸고 등장했던 강준만이, 그 글쓰기의 끝에서 결국 ‘우리 모두 공정하게 더러워져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을 보는 것은 매우 괴로운 일이다. 반은 더럽고, 반은 깨끗한 사회에서, 모두 함께 더러워지는 것이 공정성이라고 한다면, 과연 그 공정성이 도대체 이 사회에 무슨 도움이 될까?
- 진중권, 오마이뉴스 2002년 9월 18일, [더러워져야 한다?] 中


두 논객이 입장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 논쟁의 핵심은 ‘실현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실현가능성’에 대한 고민은 현실주의자의 독차지가 아니라 오히려 이상주의자들이 더 신경을 써서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 아닐까 싶다. 실현가능성의 재는 척도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비용의 측정과 조달의 문제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비용의 문제를 외면하는 이상주의자 내지 개혁, 진보 진영은 현실주의자들에게 현실세계의 헤게모니를 넘겨주는 것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다. 또한 일부 제 잇속에 눈이 먼 수구 세력들은 기본적인 상도덕(혹은 정의)를 깡그리 무시함으로써 일부 극단적 이상주의자들이 목청을 높이게 만든다. 강준만의 표현대로 두 극단주의자들은 ‘적대적 공존관계’를 맺고 있는 셈이다. (이는 인물과 사상 25권 278쪽의 내용을 참조했다) 이러한 적대적 공존관계는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지출하게 만든다.


솔직히 난 아직도 비용 따위의 형이하학적이고 구질구질한 문제들을 내팽개치고 맛깔스런 효용만을 노래하는 레토릭의 근사한 매혹을 완전히 떨치지 못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아마도 나는 얼치기 경영학도로만 머물 것 같다. 그러나 당위성에만 집착한다고 구박받고 돈도 못버는 학문이라며 외면 받는 인문, 사회분야를 과도하게 몰아붙일 만큼 우리 사회는 아름답고 살맛 나지 못하다. 세상 모든 학문은 결국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방법론이 옳다고 믿고 사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남의 방법론은 글러 먹었다며 핏발 세우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불가에서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고 하듯이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결국 같다. 살림살이 나아지기 위해 경영학에서 출발할 수도, 철학에서 시작할 수도, 물리학을 딛고 있을 수 있다. 그 차이가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한다. 나도 다른 길을 존중하려고 노력하는 만큼, 비용을 따지고 제약조건을 궁리하는 내 길의 소중함을 옹호해야겠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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