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은행 분석(1)
경제 2009. 5. 4. 05:15 |2008년 봄학기에 들었던 이필상 교수님의 금융론 강의에서 에세이 과제로 작성했던 산업은행 분석에다 최근 바뀐 사정들을 보강해봤습니다. 산업은행 민영화 자체에 대한 찬반 논쟁보다는 민영화로 향하는 길목에서 벌어지는 쟁점 위주로 고찰했습니다. 민영화 자체에 대한 반대도 적잖다는 점을 잘 알고 있지만 이미 주요 법률안이 통과된 마당에 보다 바람직한 민영화를 더듬기 위한 삽질로 여겨주시기 바랍니다. 너더분한 잡설을 싫어하시는 분들이라면 1번, 5번, 9번 목차만 살펴보시면 됩니다. 과제물 작성 당시 자문에 흔쾌히 응해주신 원유태 선배님께 각별한 감사를 표합니다.
1. 산업은행 민영화를 위한 입법
지난 4월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한국산업은행 민영화를 위한 한국산업은행법 일부개정법률안을 처리했다. 이로써 산업은행에서 한국정책금융공사를 분리하는 한국정책금융공사법이 지난 2월 임시국회에서 통과된 것과 더불어 산업은행 민영화를 위한 입법적 조치가 일단락됐다. 산은이 먼저 민영화되어야 그 자금으로 정책금융공사를 설립할 수 있는데 선후가 뒤바뀐 입법인 셈이지만 모양새는 갖추었다. 하지만 정부 여당이 공기업 개혁의 대표로 삼았던 산은 민영화가 이제 궤도에 올랐는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4월 30일 밤 자중지란에 빠진 한나라당으로 말미암아 금산분리 완화 관련 법안인 은행법과 금융지주회사법 중에 은행법 개정안만 가결되었다.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이 부결됨에 따라 정부 여당의 계획은 상당부분 차질을 빚게 됐다. 정부 여당의 논리에 따르면 금산분리 완화를 통해 산은 지주회사의 지분 인수에 보다 많은 투자자가 참여하게 되면 몸값이 높아질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산업은행지주회사 산업자본의 금융지주회사 지분소유 한도가 현행 4%로 제한될 경우 투자 매력이 감소해 매수자를 찾기 힘들어진다. 산은 민영화를 위한 입법은 여기저기 지뢰밭이다.
물론 은행법 개정안이 이미 통과된 마당에 금융지주회사법만 그대로 두는 법체계가 오래 유지될 것 같지는 않다. 여당이 다시금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을 통과시킬 공산이 크다. 이런 가정 하에 이미 통과된 법률에 따른 산은 민영화의 얼개를 고찰해보자. 산은이 금융지주회사로 전환하게 되면 산업은행 및 대우증권ㆍ산은캐피탈ㆍ산은자산운용 등을 계열사로 거느리게 된다. 정부가 산은지주의 지분 100%를 보유하지만 5년 내에 지분 매각을 시작한다. 정책금융 부문은 정책금융공사로 넘기는데 이를 위해 산은지주의 지분 49%를 정책금융공사에 출자한다. 나머지 지분 51%를 민간에 매각하고 나면 산업은행은 완전한 민간 회사로 탈바꿈한다.
산업은행의 빠른 매각에만 집착할 경우 제대로 된 가치를 평가 받기 어렵다는 염려에 귀 기울여야 한다. 산업은행의 가치를 적절하게 평가하기보다는 정해진 시간에 쫓겨 각종 절차가 허술하게 이행되어서는 곤란하다. 다행히 입법 과정에서 정책금융공사에 출자하는 산은지주 지분 49%의 최초 매각시점을 5년 이내로 잡았다. 처리시한을 다소 유동적으로 명문화함으로써 이런 걱정을 다소 덜었다. 그렇다고 가격을 높게 받기 위해 매각시한을 계속 늦춰 우리은행의 전철을 밟는 것도 피해야 한다. 정부는 대강의 틀을 정하고 구체적인 사항은 새로 임명될 최고경영자에게 포괄적으로 위임하는 것이 정책의 신뢰성과 효율성을 도모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2. 산업은행의 변천사
산업은행은 1954년 4월 세워진 국책은행으로서 산업의 개발과 국민경제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중요산업자금을 공급하고 관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산업은행법에 의하여 설립된 법인이다. 산은법은 이를 위해 정부가 전액 출자하고 정부가 지급을 보증하는 것은 물론 결손까지도 정부가 보전하도록 했다. 실제로 1998년 산은이 5조원에 가까운 적자를 내자 정부가 2조원 이상의 증자를 단행했다. 이러한 목표 아래 경제발전 단계에 따라 시대적인 요청에 부응해 그 역할을 수행해 왔다. 산은은 개발도상국 단계의 국가에 필수적인 금융기관으로서 출발해 종합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금융 전문은행으로 성장, 발전했다.
1950년대에는 전쟁으로 파괴된 산업시설 복구자금 지원의 역할을 맡았고, 1960~1970년대 고도 성장기에는 중화학공업 등 수출전략산업 육성을 위한 장기설비금융을 지원했으며, 1980년대에는 설비금융 및 산업합리화에 주력했다. 1990년대에는 국제ㆍ투자금융의 기반을 닦아 국내기업의 해외진출을 도왔다. 1998년부터 2000년까지는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기업구조조정, 신용경색 해소 및 시장 안정화 기능을 수행했다. 이 때 당시 산은은 시장 최후의 보루자(Last Resort)로서 대우 계열사 등 상당수 대기업들의 구조조정을 실질적으로 주도해 시장에 의한 구조조정시스템을 조기 정착시키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2000년대 이후에는 경제 재도약을 위한 미래 성장동력을 육성하여 국가 경쟁력을 확충하고 사회간접자본 확충 등 사회균형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이처럼 산업은행은 시대적 상황에 맞게 산업 개발과 국민경제 발전에 이바지하는 금융지원 분야 및 방식으로 변화했다. 산은법 제1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중요산업”의 개념이 계속해서 변화했기 때문이다. 50년대 중요산업이 전력, 시멘트, 석탄 등 기간산업이었다면, 60~70년대 중요산업은 섬유, 철강, 중화학산업이었다. 80년대는 자동차, 전자였으며, 90년대 들어 IT, 반도체가 중요해졌다. 2000년대 이후 방송, 통신, 생명공학 등으로 초점이 이동했다. 금융의 개방화, 자율화 추세에 발맞춰 산은법상 지원범위가 크게 확대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시대의 변화와 관계없이 혁신형 중소ㆍ벤처 기업, 초기 기술사업화 등 금융소외영역 지원을 확대해 국가경제 및 산업발전을 촉진시켜왔다.
산업은행은 취약한 국내 금융산업의 낙후된 분야에서 첨단금융상품을 선도적으로 개발하고 도입하여 새로운 금융시장을 조성함으로써 우리나라 금융산업 발전의 한 축을 담당해 왔다. 1995년 국내 최초로 프로젝트파이낸싱(PF) 금융을 취급했고, 기업금융 관련 환ㆍ금리 리스크 헤지 등을 위한 파생상품 업무 강화로 국내 파생상품시장을 개척했다. 또 기업금융 및 구조조정 역량을 토대로 M&A 업무를 적극 추진하고 있으며, 2003년부터 컨설팅 업무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밖에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사모펀드(PEF)분야에서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국제금융시장 진출과 관련해서 국내기업의 외자조달을 주선하고, 선박ㆍ항공기 금융, 해외 PF 등 고부가가치 투자은행 업무로 업무영역을 확장하는 중이다.
3. 산업은행의 정체성 위기
외환위기 이후 금융의 대형화ㆍ겸업화 등으로 인해 4대 시중은행의 자산규모가 확대되면서 자산 규모나 기초 인프라 등에서 산업은행의 지위가 바뀌었다. 1999년 말까지 자산 규모 국내 1위였던 산업은행은 시중은행들이 생존을 위해 합병과 인수를 통해 몸집을 불리면서 2007년 9월 말 기준 국내 5위로 하락했다. 점포 수 및 임직원 수 등 기본적인 인프라도 상대적으로 열세에 놓였다. 또 민간금융기관의 적극적인 업무 확대로 금융시장에서의 산업은행의 주도적 지위는 약화되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정체성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다.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는 산은을 앞장세워 기업금융을 확대하고, 외화자금을 조달하였으며 기업구조조정을 추진해 시장실패를 보완했다.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의 체질이 개선되자 산업은행은 민간금융기관과 충돌하게 된다. 기업들의 시설자금 수요가 급감하면서 산은은 시중은행들도 공급이 가능한 운영자금 대출을 확대했다. 전통적인 정책금융 수요가 점진적으로 감소함자 산은은 금융지주회사로 방향을 정하고 대우증권과 옛 서울투자신탁운용을 자회사로 편입하고 민간영역인 프라이빗 뱅킹(Private Banking), 방카슈랑스 등 수익성 사업을 확대했다. 정부의 출자와 지급보증ㆍ손실보전까지 받는 국책은행이 수익성 위주의 사업에 나서자 민간 금융회사들은 시장왜곡 현상이라며 반발했다. 감사원도 설립취지가 퇴색한 산은에 대해 정부 정책과 관련된 투자 및 융자에 특화된 금융기관으로 기능을 조정하도록 권고하기도 했다.
사실 업무중첩 문제는 산은이 민간영역을 의도적으로 침해했다기보다 SOC 건설을 위한 프로젝트파이낸싱(PF)ㆍ성장동력 벤처투자 등 산은이 선도적으로 개척한 분야에 민간금융기관의 진출이 확대되면서 발생한 경우가 많다. 공공적 역할로 인한 낮은 수익성을 만회하기 위한 자체 수익기반 확보 노력은 그 자체로 험담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산은의 정책금융 업무가 최근 전체 업무의 5% 이하로 줄었음은 주목할 대목이다. 산은 역할을 대신할 민간부문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방증이다. 2008년 말 국내 M&A 주선 시장에서 산은의 시장점유율은 70.8%였다. 국책은행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민간은행의 영역을 잠식한다는 주장이 점점 힘을 얻는 이유다.
산업은행이 2004년부터 조 단위의 이익을 낸 것도 대규모 유가증권 평가 및 처분이익 등의 발생에 기인한 것으로 과다한 수익성이라 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산은의 높은 임금 수준은 사회적 질시를 받기 충분하다. 총자산인건비율이 시중은행에 비해 낮고, 고급인력을 유치해 1인당 당기순이익과 1인당 부가가치가 시중은행에 비해 높다는 항변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2008년 산업은행 직원들의 평균 연봉은 9,270만원으로 공공기관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이다. 산은의 과도한 인건비와 성과급은 여러 차례 지적되었지만 단지 이 때문에 민영화를 추진하는 것은 아니다. 산업은행이 방만한 경영을 했기 때문에 변화를 요구한다기보다는 금융환경 변화에 걸맞은 역할을 부여한다는 의미에서 혁신을 탐색해야 한다.
4. 민영화 방안에 대한 논쟁
1990년대 이후 국제 금융질서가 바뀌면서 정부 소유 은행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정책금융이 축소되자 국책은행이 상업금융 분야로 업무영역을 넓혀가면서 국책은행의 설립목적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또 국책은행이 은행 간 경쟁을 위축시키면서 예대마진을 확대하고 여신을 대기업에만 집중시키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우리도 개발금융의 필요성이 감소하고 있으며 새로운 진로를 모색해야 한다는 의견이 공감대를 얻어 산업은행의 개편을 준비하게 되었다.
2006년 6월 산업은행경제연구소 기업금융연구센터가 펴낸 ‘주요국 정부계 은행의 발전사례 분석’에 따르면 정부계 은행의 변화유형의 선택은 각국의 경제발전 단계, 정책방향, 개별은행의 역량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며, 정부계 은행은 업무범위 제약, 점포 및 자회사 설치 제한 등 경영 및 영업 측면에서 많은 제약을 받아왔으므로 단계적, 체제적인 체제변화가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금융공기업 개편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으나 특수은행 체제를 유지하되 상업부문과 공공부문의 역할을 재정립하는 방안과 민영화와 기능전환을 통해 일반은행으로 변모하는 방안으로 나눠볼 수 있다.
현재 산은의 상업금융은 민간으로 이관하고 정책금융의 공적 기능을 강화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싱가포르 개발은행과 대만 교통은행과 같은 민영화 성공 사례도 있지만, 실패 사례 역시 존재한다. 필리핀국립은행은 무리하게 민영화를 추진했다가 다시 국유화가 되었고 일본 정책투자은행(DBJ)은 비효율적인 경영과 방만한 지출로 문제가 되자 DBJ를 주식회사로 만들고 2015년까지 완전 민영화하겠다는 법을 만들었다. DBJ는 2005년 민영화를 선언하고 2007년 관련 법안을 만들었지만 지분 매각은 아직 단 한 건도 이뤄지지 않았다고 한다. 산은 민영화 역시 적잖은 시간이 걸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애초에 금융위원회는 산업은행 단독 민영화 방안을 추구했으나 산업은행과 우리금융지주, 기업은행을 합친 다음에 민영화하자는 ‘메가뱅크’안의 불씨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전광우 금융위원장은 산은 민영화 추진 과정에서 순차적으로 추가적인 인수합병(M&A)을 통해 대형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아 메가뱅크가 추진될 여지를 남겼다. 기획재정부는 자산규모 500조원, 세계 30위권의 대규모 은행이 탄생되게 금융의 대형화를 꾀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 메가뱅크안을 내놓은바 있다. 현재 대다수 은행들이 기존 M&A의 홍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생적으로 대형 투자은행이 등장하기 어려운 구조다. 초대형 은행의 등장시켜 민간의 합병을 유도하자는 재정부의 고충을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그 매물을 감당할 만한 인수 주체가 과연 있겠냐는 회의적인 시각이 적잖다. 매각이 어려운 것은 물론 별개로 매각하는 방식에 비해 가격이 떨어질 우려도 크다. 자발적인 대형화가 아닌데다 국민은행의 자산규모보다 2배 이상 큰 메가뱅크 경영이 비효율적일 경우 국민경제에 미칠 위험은 심대하다. 다만 산업은행을 따로 매각하더라도 투자은행 업무 중심의 구조조정이 동반되기 때문에 나머지 사업부문을 다른 은행과 합치는 메가뱅크안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지 않는 모양이다. 향후 우리금융지주와 기업은행이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은행 간 M&A를 통해 메가뱅크가 출현할 수도 있다. 자본시장통합법 시행 이후 연기금이나 사모투자펀드(PEF)가 유사 금융주력자로 분류돼 은행을 직접 인수할 수 있기 때문에 마땅한 매수세력이 존재하지 않으리라 단정하기도 성급하다.
정부는 산업은행 민영화 과정에서 우리은행, 기업은행 중 한 곳을 자회사로 두는 것도 검토했다. 산업은행 입장에서는 자산규모가 커지고 기능면에서도 기업금융 뿐 아니라 소매금융에서도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어 시장에서 높은 값을 받으려는 의도다. 더욱이 지난해 산은이 벤치마킹한 투자은행들의 잇따른 몰락으로 말미암아 민영화 연착륙을 위한 타 은행과의 합병이 계속 주장되는 실정이다. 이 경우에도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서기보다는 전략적 투자자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매각가치를 높여야 한다. 산업은행 개편은 우리 경제 및 금융여건에 대한 세밀한 검토와 더불어 비슷한 기능을 담당하는 공공기관 전반의 재정립과 함께 추진해야 한다.
5. 정책금융공사가 갈 길
정부는 산업은행 민영화를 통해 금융공기업 민영화와 중소기업 지원이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기대한다. 산은지주 지분 51%는 일단 정부가 보유하고, 49%는 정책금융공사로 현물 출자하기로 했다. 산업은행의 정책금융 기능을 수행할 한국정책금융공사(KPBC)는 원래 한국개발펀드(KDF)라는 이름이 붙었다. 금융위의 설명에 따르면 정책금융기관으로서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기 위한 조치라고 한다. 단순히 이름만 바뀌었다기보다는 성격에도 변화가 생겼음을 감지할 수 있다. 한국개발펀드는 시장원리를 강조하면서 정책금융의 수익성과 안전성을 부각시킬 태세였다면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정책금융의 본래 기능에 방점을 찍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정책금융공사 역시 직접 금융지원을 하는 기존 방식에서 민간금융회사를 통한 간접지원 방식으로의 전환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는 독일의 부흥은행(KfW)을 모델로 삼는다. 소유는 정부가 운영은 민간이 함으로써 직접 정책금융방식에서 간접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을 일컫는다. Kfw는 독일 정부가 상환을 보증하는 채권을 발행해 저금리로 자금을 조달해 중소기업 지원 등 공공 목적으로 사용하는 형태로 운영된다. KfW의 대출은 금융기관을 경유하는 간접대출이어서 중소기업은 먼저 거래 금융기관에 대출신청을 해야 한다. 대출신청을 받은 금융기관은 KfW에 해당 금액만큼 대출자금을 신청하고 KfW에 대해 지급하는 금리에 마진을 추가하여 중소기업에 대출한다.
이처럼 정책금융공사가 민간금융기관에 중소기업 자금을 배분하고 민간금융기관이 기업들에 대출해 주는 ‘전대방식(On-lending)’이 활용될 예정이다. 정부가 정책금융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은 설정하지만 기업 선정 등 구체적인 사업집행은 민간금융기관이 위탁하는 방식이다. 전대방식은 시장친화적이라는 이점이 있으나 대출과 투자에 따른 책임을 민간금융기관이 지기 때문에 영세기업이나 소상공인은 성장 가능성 보유 여부와 관계없이 심사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을 소지가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유럽과 우리의 금융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자금 수요자와 은행이 오랜 기간 관계를 유지하는 주거래은행제도가 활성화된 유럽과는 달리 우리는 단기거리에 편중된 상황이다. 기업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은행으로서는 전도유망한 기업을 가름할 역량이 부족해 담보나 보증에 의존하는 실정이다.
정책금융 기능이 시장에만 맡겨질 경우 일부 우량 중소기업에만 대출이 몰릴 공산이 크다. 실제로 정책금융기관을 민영화한 일본은 Kfw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정부의 직접 지원이 아쉬운 금융위기 시대에 전대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중소기업이 자금 경색을 겪을 것이라는 회의적인 반응도 보인다. 몇몇 기업에 지원이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중개한 금융기관의 마진폭을 신용 등급별로 차등화하고 낮은 신용등급에는 최대 50%의 보증이 이뤄질 방침이라고는 하지만 정책금융의 부실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민간금융위원회에서 금융기관들이 중소기업을 제대로 판별하기 위해 중소기업에 대한 신용정보를 제공하는 인프라스트럭처 구축이 먼저 필요하다고 제안한 내용을 새겨볼만 하다. 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공적자금 투여나 재정투자 확대 같은 흐름과 전대방식이 어울리기 힘든 측면이 있는 만큼 미세조정에 더 신경 써야 할 것이다.
아울러 현재 중소기업 관련 기관은 중소기업청, 신용보증기금, 기술보증기금, 예금보험공사 등 10곳이 넘고 지원자금 규모도 60조원을 넘는다. 여기에 정책금융공사까지 등장할 경우 중소기업 금융지원에 대한 업무분담과 역할정리가 절실하다. 정책금융공사의 역할을 정책금융 업무를 조정하는 교통정리 기관 정도로 국한하자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중소기업 지원 외에 수출입금융과 개도국 지원 등의 역할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에 대한 검토도 요구되는데 정책금융공사를 만드는 대신 해당 기능을 수출입은행에 통폐합하자는 주장도 나온 바 있다. 반면에 정책금융공사에 중소기업 지원 역할과 기업 구조조정, 부실기업 회생 작업 따위의 금융시장 안전판 역할을 광범위하게 포괄하자는 견해도 나온 만큼 정책금융공사에 대한 명확한 방향 설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일각에서는 산은 민영화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암초가 될 것을 걱정한다. 한미 FTA 협상에서 양측은 국책금융기관의 정책금융 지원은 지속할 수 있도록 합의했다. 정책금융 지원 기관을 산업은행ㆍ기업은행ㆍ주택금융공사ㆍ농협ㆍ수협 등으로 명문화했는데 당시 존재하지 않았던 정책금융공사는 당연히 언급되지 않고 있다. 정부는 통상마찰 등을 피하기 위해 정책금융공사를 전대방식으로 운영할 계획이지만 미국 측이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금융위는 정책금융공사가 산은 매각 대금으로 설립되는 데다 민간금융기관과 경쟁하지 않는 공적 역할을 담당하므로 별 문제 없다는 입장이지만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야 한다. 만약 정책금융공사를 미국 측이 인정할 수 없다고 맞서면 정책금융 기능이 큰 위기를 맞을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한 대응전략을 마련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