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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사를 거닐다

문화 2008.12.02 00:53 |

<이태 전에 전라남도 구례군에 들렀다가 매천 황현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매천사를 찾았습니다. 매천사를 다녀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선비정신이라는 주제로 썼던 글 조각들을 모아본 것인데 다시 봐도 어수선하네요. 이번 학기 듣는 교양한문 강의에서 황현 선생의 절명시와 맹자의 사생취의(舍生取義)를 배웠는데 서로 잇닿는 면이 있어서 예전 글을 고쳐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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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다. 천국과 지옥이 있을 것 같지 않고, 극락세계와 내세도 도무지 믿기 힘들다. “한 개인의 죽음은 그 개인에게 우주의 소멸이다”는 명제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다. 한번뿐인 삶을 도저히 대충 살 재간이 없다. 그래서인지 치열히 살다간 선현들이 더 애틋하다.


전라남도 구례군에 있는 매천사(梅泉祠)는 최근에 지어진 건물로 그리 대단한 문화재적 가치는 없는 곳이다. 변변찮은 유형문화유산이지만 사당을 감도는 그 처연한 서정은 많은 영감을 가져다준다. 문화유산은 국보나 보물 같은 지정문화재가 많은 것으로만 우열을 가름할 수 없다. 그 자리에 걸맞은 역사성과 시대정신을 담아낼 수 있다면 제 나름의 흥미로운 역사의 숨결이 될 수 있다. 거창한 복원과 중건에만 현혹되지 말고 이런 식으로 영혼을 어루만지는 작은 문화유산들도 소중히 여기는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겠다. 문화는 우아한 기품과 현란한 기교 이전에 낮고 약하고 가여운 것을 외면하지 않는 정신이다.


창의문(彰義門)을 들어서며 천지불인(天地不仁)을 생각했다. 하늘은 편애(仁)하지 않는다. 그래서 늘 무심하다. 천지는 인간세상의 훼예포폄과 흥망성쇠에는 별 관심이 없다. 누구는 더 어여삐 여기고, 누구는 더 역겹게 여기지 않는다. 내가 좀 더 잘 될 수 있게 빌고, 못된 놈이 망하기를 빌지만 천지가 이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고 야속하게 여길 필요도 없다. 이기고 지는 것은 인간의 책임일 뿐이며, 하늘은 면책특권을 내려주지 않는다. 하늘은 무심하지만 사람은 결코 무심하지 않다는 점을 믿는 수밖에 없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그 이전에 지성이면 감인(感人)이다. 지극한 정성이 사람의 마음을 바꾼다.


한말삼재(韓末三才)라 불렸던 매천 황현 선생의 탁월한 글재주보다 우리가 먼저 기억하는 건 1910년 국치를 비통해하며 남긴 절명시(絶命詩) 4수와 유서다. 유자제서(遺子弟書)에서 선비정신의 정수를 만난다. “내게는 꼭 죽어야 할 의리(義理)가 없다. 다만 이 나라가 오백 년 동안 선비를 길렀는데,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 죽는 이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으랴”라는 말에 가슴이 시리다. 세상에 버릴 사람은 하나도 없지만 시세의 흐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늦게까지 제 자리를 지키는 한결같은 사람에게 더 애착이 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문득 이 포의지사가 남겼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나오는 소인배가 떠오른다. 을사오적 이근택은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날 퇴궐하여 집안 사람들에게 이제 죽음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며 득의양양하게 말한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몸종이 “나라가 위태로운데 죽지 아니하고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말하는 너는 참으로 개돼지로다. 내 비록 천인이라 하더라도 어찌 개돼지의 종이 되겠는가”라고 일갈하며 집을 뛰쳐나갔다고 한다. 부끄러움의 유무가 사람을 이렇게 차이 나게 만든다. 역시 인간이 저지르는 잘못 중에 가장 끔찍한 것은 부끄러움을 잃는 것이다. 먼저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이기는 세상을 얼마나 고대해야 할까. 세상을 바꾸기 전에 스스로 바뀌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선비들의 드높았던 목청에 비하면 조선이 망할 때 그네들의 행동거지는 시시했다. 그러나 매천사에서 만큼은 조선의 절의를 추념해도 좋다. 『논어』에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라는 구절이 스쳐지나간다. 살다보면 선택의 순간이 온다. 고만고만한 선택지라면 제 입맛에 따라 골라잡으면 그만이지만, 삶과 죽음처럼 거대한 간극이 있는 경우에는 취사선택 앞에 하염없이 고독해진다. 매천의 죽음이 조선의 망국을 막지는 못했지만 그 같은 선비 몇 명 없었다면 조선의 최후가 얼마나 초라했을까를 상상하면 깜깜하다. 지켜야 할 원칙을 무겁게 여기고 역사를 외경하는 진짜 보수주의자들이 우리 둘레에 좀 더 늘어나길 바란다.


1947년 개성 선죽교를 방문한 백범 김구 선생은 “선죽교에 흘린 정몽주의 피, 슬퍼하는 사람들 있으나 나 결코 슬퍼할 수 없음은, 나라의 위기를 맞은 충신이 죽지 않고 살아야 할 이유가 없음이라(善竹橋頭血 人悲我不悲 忠臣當國危 不死更何爲)”라는 글을 남겼다. 하지만 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는 걸 손바닥 뒤집듯이 하는 사람은 없다. 절개도 좋지만 잘 먹고 잘 살고 싶다는 욕심은 얼마나 근원적인가. 그렇기에 매천이 “내가 약을 마시려다 입에서 약사발을 세 번이나 떼었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은 진솔해서 슬프다. 적당히 구차하게 살려고 하지 않았던 선생의 매운 얼에 옷깃을 여민다. 차마 영악하지 못했던 사람, 끝끝내 미련했던 사람들이 사랑과 존경을 받고, 본받고 싶은 지도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단종의 장릉(莊陵)에는 충의공 엄홍도의 정려각이 있다. 영월호장이라는 미관말직의 엄홍도는 단종이 시해 당하자 시신을 수습해 장사 지냈다. 주위에서는 후환을 두려워하며 만류했으나 이를 뿌리치며 “의롭고 착한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해도 나는 달게 받겠다(爲善被禍吾所甘心)”라고 의연히 말했다. 정조 15년 장릉에 배식단(配食壇)을 만들어 단종조의 충신들을 제향하는 것으로 잘못된 역사 바로잡기가 마무리되었다. 계유정난이 발생한 지 338년, 단종이 비명횡사한지 334년만이다. 그릇된 역사를 다잡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똑똑히 보여주는 사례다. 역사는 결국 올곧게 산 자의 편인지 모르나 이렇게 만날 뒷북만 쳐서는 안 될 것이다.


이웃나라 중국에도 충의지사가 많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방효유(方孝儒) 선생이다.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는 조카인 건문제의 황위를 찬탈한 중국판 수양대군이다. 영락제는 건문제 측근들을 무참히 제거했지만 방효유는 자신의 스승이기도 하거니와 명성 높은 대학자이기에 회유하기 위해 즉위 조서를 짓도록 명했다. 한사코 쓰지 않겠다는 방효유에게 영락제는 강제로라도 조서를 쓰게 할 작정으로 지필묵을 가져오게 한다. 방효유는 마침내 붓을 들어 무언가를 써 내려갔다. 종이에는 연적찬위(燕賊簒位, 연나라 도적이 황위를 찬탈하다)라는 네 글자만 쓰여 있었다. 영락제는 노발대발하며 방효유의 십족(十族)을 멸해 죽임을 당한 사람이 800여명이라고 한다.


조선 선비들은 방효유를 절개의 으뜸으로 삼았다고 한다. 옛 선비들의 고루한 습속까지 죄다 본받지는 않아도 견결한 정신의 상당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상징조작에 불과하다는 핀잔을 받을만한 여지도 적잖지만 그래도 여전히 헌걸차다. 자신의 뜻을 목숨처럼 여기는 기백이야말로 선비정신의 고갱이가 아닐까 싶다. 만약 운명의 장난처럼 내가 방효유의 처지에 놓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효유가 제 아무리 선비정신의 고갱이를 보여주고, 지식인의 절조를 드높였다고 한들 억울한 죽음 앞에서는 죄책감이 들었을 것이다. 이런 고약한 사고실험으로 내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는 건 괴롭다. 천만다행으로 개명된 천지에 살고 있는지라 적어도 이런 무도한 경우는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며 가슴을 쓸어 내린다.^^; 그러나 입술 꽉 깨물고 ‘연적찬위’라고 써 내려가고, 민폐를 끼치지 않으면서 지인들을 북돋워주는 사람이 되기란 여전히 어렵다.


매천이 자결한 대월헌(待月軒)에 걸터앉아 역설적이게도 희망을 품는다. 현실 세계의 승리도 중요하지만 장구한 역사는 지킬 만한 가치를 지킨 사람을 마냥 외면하지 않음을 믿는다. 물들고 타협하다가도 이것만은 양보 못하겠다 싶을 때 고개를 저으며 돌아설 수 있는 내가 되도록 하자. 힘들 때는 “스스로 반성해서 정직하다면 천만인이 가로막더라도 나는 갈 것이다(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라는 『맹자』 구절을 주문처럼 외우면서 말이다. 사필귀정이란 말이 나를 얼마나 더 배신할지 모르겠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느냐이다. 부끄러울 치(恥)자 셋이면 천박함을 피한다.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다(難作人間識字人)”던 매천의 절규를 깊이 간직하며 “부끄럽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지조는 선비의 전유물이 아니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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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익구 2006.06.14 14:52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물론 구한말, 일제강점기에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지조를 지켰던 선비들도 적잖았다. 각종 은사금과 작위를 받으며 부귀영화를 누렸던 이들에 가려진 그네들의 행적이 좀 더 조명 받았으면 한다. 조선 말 선비들에 대해 너무 쓴소리를 한 거 같아 마음이 약해져서 하는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