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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9.18 교류의 대상으로서의 각성

어느덧 잊혀져 가고 있지만 내게는 여전히 생생하다. 현직 의경이 전의경 제도 폐지를 위한 농성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하고 기분이 묘했다. 입만 살아 움직이는 내가 습관처럼 말하던 전의경 제도 폐지 주장과는 차원이 다른 무거움이 느껴졌다. 입으로 사는 사람과 몸으로 사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모든 것을 몸으로 살아낼 수는 없으니 입이 필요한 때가 있다며 자기방어를 발동하기는 하지만...^^;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이길준님을 두고 군복무 부적응자가 소영웅주의에 빠져 미사여구를 늘어놓았다고 폄하하는 비난 댓글을 보며 마음이 허전했다. 내 또래인 이 청년이 자신의 행동이 낳을 후폭풍을 짐작하지 못했을리 없다. 법 어기는 걸 우습게 아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 상층부에 더러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 같은 소시민은 국법의 지엄함을 잘 알고 있다. 범법자가 되는 멍에를 감수하면서까지 이길준님이 지적하려고 했던 문제에 대해 고민을 나누는 것이 좀 더 슬기로운 모습이다. 제 삶의 주인이 되기가 이렇게 어려운 나라라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사실 내가 무엇을 특별히 주장했다기보다는 오는 2012년 전의경 제도를 폐지하고 단계적으로 경찰공무원으로 대체하기로 한 지난 참여정부 시절의 결정을 지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명박 정부가 그 때의 결정을 번복하려고 하고 있어 안타까워하는 수준이었다. 박종달 병무청장은 9월 17일 국회 국방위에 출석해 “2011년까지 전·의경을 (매년) 1만2천명 수준에서 유지(배정)하는 방향으로 결론이 났다”라며 전·의경 제도 폐지 방침을 백지화했다. 이명박 정부가 끝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을 보면 쇠고기 정국에서 그랬듯이 앞으로도 전의경을 정권 안보의 방패막으로 삼을 모양이다.


이러한 우려가 착착 현실로 바뀌고 있는 시점에서 이길준님이 정성껏 쓰신 양심 선언문의 전문을 꺼내 읽는다. 비장미로 흐르기보다는 낙관적인 자세가 묻어나는 글을 보니 이런 것이 마음을 담은 글의 힘이구나 싶다. “내 결정이 우리 사회를 훨씬 풍부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는 이길준님의 말씀은 오래도록 큰 울림이 될 것 같다. 문득 “각성은 그 자체로서 이미 빛나는 달성”이라는 최순영 전 의원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각성이 그리 대단하고 어려운 개념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길준님이 보여준 행동도 각성의 범주에 넣을 수 있으리라.


내가 이런 식의 각성만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이길준님은 국가의 폭력을 성찰하는 각성을 했지만 군복무를 통해 자신이 몸담은 공동체의 가치를 도두보고 자신의 삶을 검속하는 방편으로 삼는 각성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나는 그 각성들 사이의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길준님의 각성은 사회적으로 용인되기가 힘들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매도하지는 말자 정도의 해명을 보태고 싶을 따름이다. 대한민국이 국방일보에 늘 등장하는 훈훈한 미담 사례만으로 넘쳐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공적인 발언을 통해 알리는 분들도 있다면 이 땅이 좀 더 윤택해진다고 믿는다.


특정한 각성만을 강요하고 칭찬하는 건 한 사회의 구성과 유지를 위해 불가피한 측면이 있겠지만 그 불가피성을 이유로 남발될 때 나는 얼마나 반대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앞으로 우리 사회가 더 발전한다면 이런 식의 다채로운 각성이 만개할 텐데 나는 얼마나 귀담아 들을 수 있을까?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 제2장에서 이미 설득력 있게 논증했듯이 단 한 사람의 의견이라도 제약한다면 의롭지 못할 뿐더러 이롭지 못하기까지 하다. 교정의 대상이 아닌 교류의 대상으로서의 각성이 우리 사회를 풍요롭게 만든다고 확신한다. 나도 그 풍요로움에 모래 한 알만큼이라도 보태길 희망한다.


민감한 사안이기는 하지만 우리 사회가 “이런 각성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며 넉넉하게 접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실정법에 어긋나는 각성을 마주칠 때 엄정한 처벌을 수행하는 정성을 조금 여투어서 처벌의 근거가 튼실한지를 따져보는 것도 중요한 시민의식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 사회적으로 공인된 각성을 옹호하는 분들이 좀 더 넉넉한 태도를 보여주시길 바란다. 우리네 민주주의가 고양될수록 이러한 넉넉함은 권장사항에서 의무사항에 가까워질 것이다. 가령 경찰 행정의 공백을 막기 위해 전의경 제도의 존치가 불가피하다고 여기는 분이 다수파고 전의경 제도가 헌법에 위배된다고 생각하는 분이 소수파라면 다수파가 좀 더 절제와 경청의 미덕을 보여야 한다. 이러한 다수파의 노력은 언젠가 소수파로 전락했을 때도 자신의 의사를 존중받는 든든한 보험으로 작동할 것이다.


내가 그리는 ‘각성’은 전통을 긍정하고 상식을 존중하되 관행에 얽매이지 않고 권위에 주눅들지 않는 용기다. 사람 마음이 매끄럽게 나눠지지는 않겠지만 용기에는 여러 무늬가 있고 그것들이 어우러질 때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窮則變 變則通 通則久)”라는 『주역』 구절이 그 모델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열린 자세로 듣는 양적 변화를 쌓는 것이 첫 번째 용기, 양적 변화가 축적되어 질적 변화로 나아가 새로운 생각을 품는 것이 두 번째 용기, 그 질적 변화로 말미암아 자신이 딛고 있는 곳을 티끌만큼 바꾸는 게 세 번째 용기로 삼아볼 수 있겠다(후배 정태에게서 많은 영감을 얻었음을 밝힌다). 세 번째 용기는 이내 첫 번째 용기와 잇닿는다. 특히 애써 귀 기울이지 않으면 잘 안 들리는 소수파나 약자의 목소리를 좀 더 챙겨 듣는 것도 첫 번째 용기를 키우는 훌륭한 방편임을 유의해야 한다.


여하간 이런 식으로 각성이 세 가지 용기를 통해 구현된다고 하더라도 사람마다 편차가 있게 마련이다. 정조대왕은 총명함이 발현하는 ‘속도’보다 총명함을 유지하는 ‘지속도’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끝끝내 지키는 사람이 위기지학(爲己之學, 자아실현을 위한 학문)을 하게 된다”라는 말씀이다(『일득록』 「문학」2). 각성도 마찬가지로 속도보다는 지속도에 좌우된다. 정조대왕이 “일시적으로 빼어난 재능은 한순간 사람들을 놀라게 할 뿐”이라고 지적했듯이 각성 또한 섬광처럼 스쳐 가는 순간으로 그친다면 둘레의 감동을 자아내지 못한다. 순간의 호기로움으로 그럴싸한 말을 늘어놓고, 짧게나마 그 실행을 위해 동분서주하기는 쉽다. 하지만 평생에 걸쳐 자신이 지녔던 아름다움을 가꾸는 건 지극한 수고로움이 따른다. 각성은 눈부시지만 그 빛남은 혜성이 아니라 항성이어야 마땅하다.


얻어먹는 밥에 연연하는 식객의 삶보다는 땀 흘려 개척하는 주인의 삶을 선택한 이길준님을 응원한다. - [無棄]


<추신>
이번에 알게 된 내용인데 독일, 스웨덴, 덴마크, 네덜란드, 벨기에, 남아공, 슬로베니아 등의 나라에서는 군인노조라는 것도 존재한다고 한다. 물론 모병제 국가에서 직업군인들이 결성한 조직이겠지만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상상력을 넓혀볼 좋은 소재였고 참신한 경험이었다. 하기야 지난 7월 말 서울시 교육감을 우리 손으로 직접 뽑을 수 있게 된 것도 여러 상상력이 결합되어 나타난 산물일 게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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