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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7.16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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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자금성 배경 사진을 이용한 익구닷컴 홍보 배너입니다.
(만들어 주신 분: 정승현 님)



서른두 살. 가진 것도 없고, 이룬 것도 없다. 나를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내가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도 없다. 우울한 자유일까, 자유로운 우울일까. 나,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무엇이든?
- 정이현, 『달콤한 나의 도시』, 문학과지성사, 2006


이 구절을 읽고는 크게 안도했습니다. ‘나는 고작 스물 여섯밖에 되지 않았으니 이 얼마나 감사하고 황송한 일인가!’ 하고 말입니다. 저의 대책 없는 낙관주의는 이런 식으로 곧잘 악용됩니다.^^; 저는 아직도 제가 가야만 하는 길이 있다고 확신을 품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성거리다 좀 더 발걸음이 옮겨지는 곳이 있다면 그것을 제 길로 삼겠다는 생각이 마냥 나쁜 것은 아니겠지요.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다고 호기롭게 말하고 다녔지만 사실 발설하는 순간 순간마다 가능성의 문은 하나씩 닫히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요즘은 주눅이 듭니다.


늘 모자라다고 투정부렸지만 실상 제 깜냥에 견주어 많은 것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준 것보다 받은 것이 많았고, 일러준 것보다 본받은 것이 많았습니다. 그런 까닭인지는 몰라도 호구지책일랑 얼렁뚱땅 마련하고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취미생활을 영위해보자는 식으로 오만하고 나태하게 생활해 왔습니다. 천직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소명감은 가져야할 진로 탐색을 호구지책이라고 비아냥거린 것부터 잘못이겠죠. 이런 자세로 살벌한 밥벌이 경쟁에 뛰어든 것부터가 글러먹은 사고방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무슨 고고한 분위기를 풍기며 세속적 기준을 보아란 듯이 비웃는 것도 아니지만요. 결국 따라가기 위해 뒤늦게나마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이룬 것이 없다고 느껴지고, 가진 것도 없다고 느껴질 때 지난날을 살뜰하게 보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밀려옵니다. 죽어라 공부 안 하던 토익시험을 부랴부랴 준비하며 문득 예전에 펑펑 놀 때 미리 해뒀으면 편하지 않았겠냐는 구박을 해봅니다. 인턴 한 번 못해보고 졸업을 하려니 뒤통수가 서늘하네요. 남들 다 다녀온다는 교환학생이나 어학연수에도 한 톨의 관심을 두지 않고 이 땅을 살아왔다니 제 자신이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열심히 사는 제 둘레의 후배들을 보며 후생가외라고 넉넉하게 생각하기에는 제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부끄럽습니다.


게으른 천성을 단박에 바꿀 수 없다고 친다면, 적어도 자유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말랑말랑함이나마 제게 있었다면 이렇게 민망하지 않았겠지요. 좋은 책을 읽거나 훌륭한 강의를 듣다 보면 제 자신은 그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난쟁이라는 절망감이 엄습하기 일쑤입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제 머리로 사색하기보다는 어느 어깨가 더 탐스러운지 물색하느라 눈알을 바지런히 굴렸던 것 같습니다. 그저 거인의 쩍 벌어진 어깨 위에 올라서 호가호위하는 재미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해 봅니다.


혜자가 장자에게 말씀했다. "자네의 말은 쓸모가 없네."
장자가 말씀했다. "쓸모없음을 알아야 비로소 쓸모 있음을 말할 수 있는 법이네. 대저 땅은 넓고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지만 사람에게 쓸모 있는 땅은 발이 닿고 있는 부분뿐이라네. 그렇다고 발이 닿는 부분만 남겨놓고 그 둘레를 황천에 이르기까지 파서 없앤다면 그래도 (발이 닿고 있는 땅이) 쓸모 있는 것일 수 있겠는가?"
혜자가 말씀했다. "쓸모없다고 하겠지"
장자가 말씀했다. "그러므로 쓸모없는 것도 쓸모 있는 것이 분명하다네."


惠子謂莊子曰 子言无用.
莊子曰 知无用而始可與言用矣. 夫地非不廣且大也 人之所用容足耳. 然則廁足而墊之 致黃泉 人尙有用乎?
惠子曰 无用.
莊子曰 然則無用之爲用也 亦明矣.
- 『莊子』 外物篇


갑갑한 마음에 한 줄기 위안이 되는 말씀입니다. 장자는 지극히 무용해 보이는 것조차 유용함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역설합니다. 제가 이상이랍시고 내뱉었던 배부른 소리들이나 늘어놓을 때나 청춘은 동나게 마련이라며 흥청거리며 노닥대던 기억들 모두가 저를 채워왔던 쓸모없던 일들이었습니다. 제가 발을 좀 더 내딛을 수 있도록 넓혀둔 터전이라고 믿습니다. 문득 제가 딛고 있는 자리들, 배웠던 것들, 읽었던 책들, 투덜거렸던 생각들, 가슴 뛰던 느낌들이 하염없이 쓸모없어 보이는 순간에도 앓는 소리하지 않겠습니다. 그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이 저란 녀석을 여기까지 끌고 와줬네요. 저 같이 하찮은 인간을 지탱하는데도 이렇게 많은 것들이 들어가다니 두렵기도 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지인 여러분, 그리고 기막힌 인연으로 이 공간을 들러주신 손님 여러분! 7월 15일은 익구닷컴 개장 5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 누추한 공간이 늘 쓸모없다고 볼멘 소리를 하면서도 제 소중한 일부분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자축하기보다는 지난 5년 간 제가 벌였던 쓸데없는 일들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겠습니다. 지인 여러분들께 저는 쓸모없는 녀석이었지만 그래도 가끔은 쓸모가 있지 않을까, 혹은 쓸모없음 자체로나마 뭔가 보탬이 되지 않을까 넉살좋게 생각해 봅니다. 아무쪼록 좀 더 쓸모 있는 사람이 되도록 애쓰겠습니다.


잠시 이 자리를 비울게요. 어차피 부실한 업데이트를 하나마나 이기는 합니다만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아서요. 엄청 비장해 보이지만 선선한 가을 무렵에는 돌아오겠죠 뭐.^^; 내내 치열하시고 재미나시길 축원합니다. 고맙습니다.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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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구닷컴 최신 배너입니다. 예전만큼 홍보를 안 해서 잘 안 쓰고 있지만요.^^;
(만들어 주신 분: 영록형님)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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