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음의 쓸모 있음

공지 2008. 7. 16. 0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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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자금성 배경 사진을 이용한 익구닷컴 홍보 배너입니다.
(만들어 주신 분: 정승현 님)



서른두 살. 가진 것도 없고, 이룬 것도 없다. 나를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내가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도 없다. 우울한 자유일까, 자유로운 우울일까. 나,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무엇이든?
- 정이현, 『달콤한 나의 도시』, 문학과지성사, 2006


이 구절을 읽고는 크게 안도했습니다. ‘나는 고작 스물 여섯밖에 되지 않았으니 이 얼마나 감사하고 황송한 일인가!’ 하고 말입니다. 저의 대책 없는 낙관주의는 이런 식으로 곧잘 악용됩니다.^^; 저는 아직도 제가 가야만 하는 길이 있다고 확신을 품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성거리다 좀 더 발걸음이 옮겨지는 곳이 있다면 그것을 제 길로 삼겠다는 생각이 마냥 나쁜 것은 아니겠지요.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다고 호기롭게 말하고 다녔지만 사실 발설하는 순간 순간마다 가능성의 문은 하나씩 닫히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요즘은 주눅이 듭니다.


늘 모자라다고 투정부렸지만 실상 제 깜냥에 견주어 많은 것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준 것보다 받은 것이 많았고, 일러준 것보다 본받은 것이 많았습니다. 그런 까닭인지는 몰라도 호구지책일랑 얼렁뚱땅 마련하고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취미생활을 영위해보자는 식으로 오만하고 나태하게 생활해 왔습니다. 천직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소명감은 가져야할 진로 탐색을 호구지책이라고 비아냥거린 것부터 잘못이겠죠. 이런 자세로 살벌한 밥벌이 경쟁에 뛰어든 것부터가 글러먹은 사고방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무슨 고고한 분위기를 풍기며 세속적 기준을 보아란 듯이 비웃는 것도 아니지만요. 결국 따라가기 위해 뒤늦게나마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이룬 것이 없다고 느껴지고, 가진 것도 없다고 느껴질 때 지난날을 살뜰하게 보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밀려옵니다. 죽어라 공부 안 하던 토익시험을 부랴부랴 준비하며 문득 예전에 펑펑 놀 때 미리 해뒀으면 편하지 않았겠냐는 구박을 해봅니다. 인턴 한 번 못해보고 졸업을 하려니 뒤통수가 서늘하네요. 남들 다 다녀온다는 교환학생이나 어학연수에도 한 톨의 관심을 두지 않고 이 땅을 살아왔다니 제 자신이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열심히 사는 제 둘레의 후배들을 보며 후생가외라고 넉넉하게 생각하기에는 제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부끄럽습니다.


게으른 천성을 단박에 바꿀 수 없다고 친다면, 적어도 자유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말랑말랑함이나마 제게 있었다면 이렇게 민망하지 않았겠지요. 좋은 책을 읽거나 훌륭한 강의를 듣다 보면 제 자신은 그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난쟁이라는 절망감이 엄습하기 일쑤입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제 머리로 사색하기보다는 어느 어깨가 더 탐스러운지 물색하느라 눈알을 바지런히 굴렸던 것 같습니다. 그저 거인의 쩍 벌어진 어깨 위에 올라서 호가호위하는 재미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해 봅니다.


혜자가 장자에게 말씀했다. "자네의 말은 쓸모가 없네."
장자가 말씀했다. "쓸모없음을 알아야 비로소 쓸모 있음을 말할 수 있는 법이네. 대저 땅은 넓고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지만 사람에게 쓸모 있는 땅은 발이 닿고 있는 부분뿐이라네. 그렇다고 발이 닿는 부분만 남겨놓고 그 둘레를 황천에 이르기까지 파서 없앤다면 그래도 (발이 닿고 있는 땅이) 쓸모 있는 것일 수 있겠는가?"
혜자가 말씀했다. "쓸모없다고 하겠지"
장자가 말씀했다. "그러므로 쓸모없는 것도 쓸모 있는 것이 분명하다네."


惠子謂莊子曰 子言无用.
莊子曰 知无用而始可與言用矣. 夫地非不廣且大也 人之所用容足耳. 然則廁足而墊之 致黃泉 人尙有用乎?
惠子曰 无用.
莊子曰 然則無用之爲用也 亦明矣.
- 『莊子』 外物篇


갑갑한 마음에 한 줄기 위안이 되는 말씀입니다. 장자는 지극히 무용해 보이는 것조차 유용함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역설합니다. 제가 이상이랍시고 내뱉었던 배부른 소리들이나 늘어놓을 때나 청춘은 동나게 마련이라며 흥청거리며 노닥대던 기억들 모두가 저를 채워왔던 쓸모없던 일들이었습니다. 제가 발을 좀 더 내딛을 수 있도록 넓혀둔 터전이라고 믿습니다. 문득 제가 딛고 있는 자리들, 배웠던 것들, 읽었던 책들, 투덜거렸던 생각들, 가슴 뛰던 느낌들이 하염없이 쓸모없어 보이는 순간에도 앓는 소리하지 않겠습니다. 그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이 저란 녀석을 여기까지 끌고 와줬네요. 저 같이 하찮은 인간을 지탱하는데도 이렇게 많은 것들이 들어가다니 두렵기도 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지인 여러분, 그리고 기막힌 인연으로 이 공간을 들러주신 손님 여러분! 7월 15일은 익구닷컴 개장 5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 누추한 공간이 늘 쓸모없다고 볼멘 소리를 하면서도 제 소중한 일부분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자축하기보다는 지난 5년 간 제가 벌였던 쓸데없는 일들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겠습니다. 지인 여러분들께 저는 쓸모없는 녀석이었지만 그래도 가끔은 쓸모가 있지 않을까, 혹은 쓸모없음 자체로나마 뭔가 보탬이 되지 않을까 넉살좋게 생각해 봅니다. 아무쪼록 좀 더 쓸모 있는 사람이 되도록 애쓰겠습니다.


잠시 이 자리를 비울게요. 어차피 부실한 업데이트를 하나마나 이기는 합니다만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아서요. 엄청 비장해 보이지만 선선한 가을 무렵에는 돌아오겠죠 뭐.^^; 내내 치열하시고 재미나시길 축원합니다. 고맙습니다. - [無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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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구닷컴 최신 배너입니다. 예전만큼 홍보를 안 해서 잘 안 쓰고 있지만요.^^;
(만들어 주신 분: 영록형님)

Posted by 익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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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07. 3. 29. 12:00 |

익구닷컴은 본래 고독함을 작정한 공간입니다. 문자 텍스트로만 꾸려나가는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공간이죠. 제 둘레에 개인 홈페이지를 꾸리던 분들이 거의 다 그만 두셨지만 그간 어찌어찌 버텨 왔습니다. 2003년 7월에 익구닷컴을 개설한지 어느덧 네 해가 다 되어 가네요.


미뤄둔 공부가 너무 쌓이다 못해 이제는 포기하고 넘어갈 것들마저 쌓이고 있습니다. 익구닷컴 운영에 들이는 시간이 더 줄어들 거 같아서 차라리 문을 닫는 게 어떨까라는 고심도 해봅니다. 머잖아 익구닷컴 문을 잠시나마 닫게 되는 날이 오기 전에 손님들의 옥음(玉音)을 담아두지 않으면 아쉬울 거 같습니다.


지인들께서 오며가며 들렀다는 말씀은 종종 해주시는데 당최 어떤 분들이 제 누추한 홈페이지를 들러주시는지 모르겠어요. 눈팅할 것도 별로 없는 이 공간에 방명록이나 댓글을 다는 행위가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지 너무나 잘 알지만 그래도 꼭 한 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이 글에다가 댓글을 좀 달아주세요.
“안녕”, “나 왔다 간다”고 짧게 쓰셔도 좋아요.
“넌 이걸 좀 고쳐야 돼” 같은 말씀도 좋고요.
꼭 한 번 만나고 싶습니다.
당신의 소중한 흔적을...^-^

Posted by 익구
:
내 생각을 우직하게 밀고 나갈 수 있을까에 대한 회의가 엄습하는 요즘 故 조지훈 선생의 지조론이 읽고 싶어졌다. 도입부의 “지조를 지키기 위한 괴로움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헤아리는 사람들은 한 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먼저 그 지조의 강도(强度)를 살피려 한다”는 구절부터 끄트머리의 “그러나 역시 지조는 어느 때나 선비의, 교양인의, 지도자의 생명이다”에 이르기까지 죄다 절절이 다가온다.

자유당 말기 극도로 부패한 정치현실 속에서 친일파들이 과거에 대한 뉘우침 없이 정치일선에서 득세하고 사회 지도층들이 변절을 일삼는 세태를 통렬히 꾸짖는 명논설은 오늘날에도 전혀 빛이 바래지 않는다. 그래서 서글프다. ‘변절자를 위하여’라는 부제(副題)처럼 변절이 횡행하는 시대에 변절을 마음 먹고 있는 이들에게 이 글을 권하고 싶다. 아울러 개인적인 바람을 밝히자면 나도 먼훗날 이런 식의 경세적인 중수필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인터넷 상에 오타가 적잖은 전문이 오고가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에 《조지훈 전집5: 지조론》(나남, 1996)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최대한 원문에 가깝게 교열, 감수했다. 어려운 단어 풀이도 하고, 인물 소개도 부기하였으니 온라인 상에서 볼 수 있는 최고의 지조론 텍스트가 될 수 있으리라 자부한다. 다만 나의 이런 노력이 저작자의 사망 후 50년까지 저작권이 존속되는 현행 저작권법에는 다소 위배되는 바가 있다. 선생께서 너그러이 양해해주시리라 믿는다.^-^



지조론(志操論)
―변절자(變節者)를 위하여-



지조(志操)란 것은 순일(純一, 온전한 하나의)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지켜 나감)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지조가 교양인의 위의(威儀, 위엄이 있는 엄숙한 차림새)를 위하여 얼마나 값지고 그것이 국민의 교화에 미치는 힘이 얼마나 크며, 따라서 지조를 지키기 위한 괴로움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헤아리는 사람들은 한 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먼저 그 지조의 강도(强度)를 살피려 한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자는 따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명리(名利, 명예와 이익)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자와 추종자를 일조(一朝, 하루아침에, 갑자기)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와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지조를 지킨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아는 까닭에 우리는 지조 있는 지도자를 존경하고 그 곤고(困苦, 어렵고 고생스러움)를 이해할 뿐 아니라 안심하고 그를 믿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생각하는 자(者)이기 때문에 배신하는 변절자를 개탄(慨嘆)하고 연민(憐憫)하며, 그와 같은 변절의 위기의 직전에 있는 인사들에게 경성(警醒, 정신을 차려 그릇된 행동을 하지 않도록 타일러 깨닫게 함)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지조는 선비의 것이요, 교양인의 것이다. 장사꾼에게 지조를 바라거나 창녀에게 지조를 바란다는 것은 옛날에는 없었던 일이지만,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장사꾼과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식견(識見)은 기술자와 장사꾼에게도 있을 수 있지 않는가 말이다. 물론 지사(志士)와 정치가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독립운동을 할 때의 혁명가와 정치인은 모두 다 지사(志士)였고 또 지사라야 했지만, 정당운동의 단계에 들어간 오늘의 정치가에게 선비의 삼엄한 지조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일인 줄은 안다. 그러나 오늘의 정치-정당운동을 통한 정치도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한 정책을 통해서의 정상(政商, 정치가와 상인의 결합, 정치가와 결탁하거나 정권을 이용해서 사사로이 이익을 꾀하는 사람)인 이상, 백성을 버리고 백성이 지지하는 공동전선을 무너뜨리고 개인의 구복(口腹, 입과 배, 탐욕)과 명리를 위한 부동(浮動, 떠다님)은 무지조(無志操)로 규탄되어 마땅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현실과 이 난국을 수습할 지도자의 자격으로 대망하는 정치가는 권모술수(權謀術數)에 능한 직업정치인보다 지사적 품격의 정치 지도자를 더 대망하는 것이 국민 전체의 충정(衷情)인 것이 속일 수 없는 사실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염결공정(廉潔公正, 성품이 청렴결백하며 공평하고 정대함) 청백강의(淸白剛毅, 성품이 깨끗하고 강직하며 씩씩함)한 지사정치(志士政治)만이 이 국운을 만회할 수 있다고 믿는 이상 모든 정치 지도자에 대하여 지조의 깊이를 요청하고 변절의 악풍을 타매(唾罵, 더럽게 생각하고 경멸하며 욕함)하는 것은 백성의 눈물겨운 호소이기도 하다.


지조와 정조는 다같이 절개에 속한다. 지조는 정신적인 것이고, 정조는 육체적인 것이라고들 하지만, 알고 보면 지조의 변절도 육체생활의 이욕(利慾)에 매수된 것이요, 정조의 부정도 정신의 쾌락에 대한 방종에서 비롯된다. 오늘의 정치인의 무절제를 장사꾼의 이욕과 계교와 음부적(淫婦的, 음탕한 여인과 같은) 환락(歡樂)의 탐혹(眈惑)이 합쳐서 놀아난 것이라면 과연 극언이 될 것인가.


하기는, 지조와 정조를 논한다는 것부터가 오늘에 와선 이미 시대착오의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사람이 있을는지 모른다. 하긴 그렇다. 왜 그러냐 하면, 지조와 정조를 지킨다는 것은 부자연한 일이요, 시세를 거역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과부나 홀아비가 개가(改嫁)하고 재취(再娶)하는 것은 생리적으로나 가정생활로나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고, 또 그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개가와 재취를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승인하면서도 어떤 과부(寡婦)나 환부(鰥夫, 홀아비)가 사랑하는 옛짝을 위하여 또는 그 자녀를 위하여 개가나 속현(續絃, 거문고와 비파의 끊어진 줄을 다시 잇는다는 뜻으로, 아내를 여읜 뒤 새 아내를 얻음을 비유해서 이르는 말)의 길을 버리고 일생을 마치는 그 절제에 대하여 찬탄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보통 사람이 능히 어려운 일을 했대서만이 아니라 자연으로서의 인간의 본능고(本能苦)를 이성과 의지로써 초극(超克)한 그 정신의 높이를 보기 때문이다. 정조의 고귀성이 여기에 있다.


지조도 마찬가지이다. 자기의 사상과 신념과 양심과 주체는 일찌감치 집어던지고 시세(時勢)에 따라 아무 권력이나 바꾸어 붙어서 구복의 걱정이나 덜고 명리의 세도에 참여하여 꺼덕대는 것이 자연한 일이지, 못나게 쪼를 부린다고 굶주리고 얻어맞고 짓밟히는 것처럼 부자연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면 얼핏 들어 우선 말은 되는 것 같다.


여름에 아이스케이크 장사를 하다가 가을바람만 불면 단팥죽 장사로 간판을 남 먼저 바꾸는 것을 누가 욕하겠는가. 장사꾼, 기술자, 사무원의 생활 방도는 이 길이 오히려 정도(正道)이기도 하다. 오늘의 변절자(變節者)도 자기를 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자처한다면 별 문제다. 그러나 더러운 변절의 정당화를 위한 엄청난 공언(公言)을 늘어놓는 것은 분반(噴飯, 웃음이 참을 수 없음)할 일이다. 백성들이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먼 줄 알아서는 안 된다. 백주대로에 돌아앉아 볼기짝을 까고 대변을 보는 격이라면 점잖지 못한 표현이라 할 것인가.


지조를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고 항거(抗拒)하여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곤욕(困辱)을 무릅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정신의 자존 자시(自尊自恃, 스스로를 존중하고 믿음)를 위해서는 자학(自虐)과도 같은 생활을 견디는 힘이 없이는 지조는 지켜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조의 매운 향기를 지닌 분들은 심한 고집과 기벽(奇癖, 기이한 취마나 버릇)까지도 지녔던 것이다. 신단재(申丹劑) 선생은 망명생활 중 추운 겨울에 세수를 하는데 꼿꼿이 앉아서 두 손으로 물을 움켜다 얼굴을 씻기 때문에 찬물이 모두 소매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한다. 어떤 제자(弟子)가 그 까닭을 물으매, 내 동서남북 어느 곳에도 머리 숙일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일화(逸話)가 있다. 무서운 지조를 지킨 분의 한 분인 한용운(韓龍雲) 선생의 지조가 낳은 기벽의 일화도 마찬가지다.


오늘 우리가 지도자와 정치인에게 바라는 지조는 이토록 삼엄한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신 뒤에는 당신들을 주시하는 국민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자신의 위의와 정치적 생명을 위하여 좀더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라는 충고 정도다. “한 때의 적막을 받을지언정 만고의 처량한 이름이 되지 말라”는 《채근담(菜根譚)》의 한 구절을 보내고 싶은 심정이란 것이다. 끝까지 참고 견딜 힘도 없으면서 뜻있는 야당(野黨)의 투사를 가장함으로써 권력의 미끼를 기다리다가 후딱 넘어가는 교지(狡智, 교활한 슬기, 약은 꾀)를 버리라는 말이다. 욕인(辱人)으로 출세의 바탕을 삼고 항거로써 최대의 아첨을 일삼는 본색을 탄로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충언의 근원을 캐면 그 바닥에는 변절하지 말라, 지조의 힘을 기르라는 뜻이 깃들어 있다.


변절(變節)이란 무엇인가? 절개를 바꾸는 것, 곧 자기가 심신으로 이미 신념하고 표방했던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철이 들어서 세워 놓은 주체의 자세를 뒤집는 것은 모두 다 넓은 의미의 변절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욕하는 변절은 개과천선(改過遷善)의 변절이 아니고, 좋고 바른 데서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변절을 변절이라 한다.

일제 때 경찰에 관계하다 독립운동으로 바꾼 이가 있거니와 그런 분을 변절이라고 욕하진 않았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일파(親日派)로 전향한 이는 변절자로 욕하였다. 권력에 붙어 벼슬하다가 야당이 된 이도 있다. 지조에 있어 완전히 깨끗하다고는 못하겠지만 이들에게도 변절자의 비난은 돌아가지 않는다.


나머지 하나 협의(狹義)의 변절자, 비난 불신의 대상이 되는 변절자는 야당전선(野黨戰線)에서 이탈하여 권력에 몸을 파는 변절자다. 우리는 이런 사람의 이름을 역력히 기억할 수 있다.


자기 신념으로 일관한 사람은 변절자가 아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치욕에 김상헌(金尙憲)이 찢은 항서(降書)를 도로 주워 모은 주화파(主和派) 최명길은 당시 민족정기(民族正氣)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으나 심양(瀋陽)의 감옥에 김상헌과 같이 갇히어 오해를 풀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진 얘기이다. 최명길은 변절의 사(士)가 아니요 남다른 신념이 한층 강했던 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누가 박중양(朴重陽), 문명기(文明琦) 등 허다한 친일파를 변절자라고 욕했는가. 그 사람들은 변절의 비난을 받기 이하의 더러운 친일파로 타기(唾棄, 침을 뱉듯이 버리고 돌아보지 않음)되기는 하였지만 변절자는 아니다.


민족 전체의 일을 위하여 몸소 치욕을 무릅쓴 업적이 있을 때는 변절자로 욕하지 않는다. 앞에 든 최명길도 그런 범주에 들거니와, 일제 말기 말살되는 국어의 명맥을 붙들고 살렸을 뿐 아니라 국내에서 민족 해방의 날을 위한 유일한 준비가 되었던 《맞춤법 통일안》, 《표준말모음》, 《큰 사전》을 편찬한 ‘조선어학회’가 ‘국민총력연맹 조선어학회지부(國民總力聯盟 朝鮮語學會支部)’의 간판을 붙인 것을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런 하는 일도 없었다면 그 간판은 족히 변절의 비난을 받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좌옹(佐翁), 고우(古友), 육당(六堂), 춘원(春園) 등 잊을 수 없는 업적을 지닌 이들의 일제 말의 대일 협력(對日協力)의 이름은 그 변신을 통한 아무런 성과도 없기 때문에 애석하나마 변절의 누명을 씻을 수 없었다. 그분들의 이름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에 대한 실망이 컸던 것을 우리의 기억이 잘 알고 있다. 그 때문에 이분들은 ‘반민특위(反民特委)’에 불리었고, 거기서 그들의 허물을 벗겨 주지 않았던가. 아무것도 못하고 누명만 쓸 바에는 무위(無爲)한 채로 민족정기의 사표(師表)가 됨만 같지 못한 것이다.


변절자에게는 저마다 그럴 듯한 구실이 있다. 첫째, 좀 크다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백이(伯夷), 숙제(叔齊)는 나도 될 수 있다, 나만 깨끗이 굶어 죽으면 민족은 어쩌느냐가 그것이다. 범의 굴에 들어가야 범을 잡는다는 투의 이론이요, 그 다음이 바깥에선 아무 일도 안 되니 들어가 싸운다는 것이요, 가장 하치(품질이 낮은 것)가, 에라 권력에 붙어 이권이나 얻고 가족이나 고생시키지 말아야겠다는 것이다. 굶어 죽기가 쉽다거나 들어가 싸운 다거나 바람이 났거나 간에 그 구실을 뒷받침할 만한 일을 획책(劃策)도 한 번 못해 봤다면 그건 변절의 낙인밖에 얻을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일찍이 어떤 선비도 변절하여 권력에 영합해서 들어갔다가 더러운 물을 뒤집어쓰지 않고 깨끗이 물러나온 예를 역사상에서 보지 못했다. 연산주(燕山主)의 황음(荒淫)에 어떤 고관의 부인이 궁중에 불리어 갈 때 온몸을 명주로 동여매고 들어가면서, 만일 욕을 보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고 해 놓고, 밀실에 들어가서는 그 황홀한 장치와 향기에 취하여 제 손으로 그 명주를 풀고 눕더라는 야담이 있다. 어떤 강간(强姦)도 나중에는 화간(和姦)이 된다는 이치와 같지 않는가.


만근(輓近, 근래에, 최근에) 30년래에 우리나라는 변절자가 많은 나라였다. 일제 말의 친일 전향, 해방 후 남로당의 탈당, 또 최근의 민주당의 탈당, 이것은 20이 넘은, 사상적으로 철이 난 사람들의 주책없는 변절임에 있어서는 완전히 동궤(同軌, 같은 궤도, 같은 선상에 있음)다. 감당도 못할 일을 제 자신도 율(律)하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민족이니 사회니 하고 나섰다라는 말인가. 지성인의 변절은 그것이 개과천선이든, 무엇이든 인간적으로는 일단 모욕을 자취(自取, 제 스스로 만들어서 됨)하는 것임을 알 것이다.


우리가 지조를 생각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 말은 다음의 한 구절이다. “기녀(妓女)라도 늘그막에 남편을 좇으면 한평생 분냄새가 거리낌이 없을 것이요, 정부(貞婦)라도 머리털 센 다음에 정조(貞操)를 잃고 보면 반생(半生)의 깨끗한 고절(苦節, 어떤 고난을 당해도 변하지 아니하고 끝내 지켜 나가는 굳은 절개)이 아랑곳없으리라. 속담에 말하기를, 사람을 보려면 다만 그 후반(後半)을 보라” 하였으니 참으로 명언이다.


차돌에 바람이 들면 백 리를 날아간다(늦게 배운 잘못은 더 큰 잘못을 저지른다)는 우리 속담이 있거니와, 늦바람이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아직 지조를 깨뜨린 적이 없는 이는 만년(晩年)을 더욱 힘쓸 것이니, 사람이란 늙으면 더러워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아직 철이 안든 탓으로 바람이 났던 이들은 스스로의 후반을 위하여 번연(飜然, 깨달음이 갑작스러움)히 깨우치라. 한일합방(韓日合邦) 때 자결한 지사시인(志士詩人) 황매천(黃梅泉)은 정탈(定奪, 옳고 그름을 가리어 결정함)이 매운 분으로 ‘매천필하무완인’(梅泉筆下無完人, 매천의 붓 아래에서는 온전한 사람이 없다-매천의 날카로운 비평과 지조를 일컬음)이란 평을 듣거니와 그 《매천야록(梅泉野錄)》을 보면 민충정공(閔忠正公), 이용익(李容翊) 두 분의 초년(初年) 행적을 헐뜯은 곳이 있다. 오늘에 누가 민충정공, 이용익 선생을 욕하는 이 있겠는가. 우리는 그 분들의 초년을 모른다. 역사에 남은 것은 그분의 후반이요, 따라서 그분들의 생명은 마지막에 길이 남게 된 것이다.


도도(滔滔)히 밀려오는 망국(亡國)의 탁류(濁流)-이 금력과 권력, 사악 앞에 목숨으로써 방파제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지조의 함성을 높이 외치라. 그 지성 앞에는 사나운 물결도 물러서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천하의 대세가 바른 것을 향하여 다가오는 때에 변절이란 무슨 어처구니없는 말인가. 이완용(李完用)은 나라를 팔아먹었어도 자기를 위한 36년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은 가졌었다. 무너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권력에 뒤늦게 팔리는 행색(行色)은 딱하기 짝없다. 배고프고 욕된 것을 조금 더 참으라. 그보다 더한 욕이 변절 뒤에 기다리고 있다.


“소인기(少忍飢, 잠깐 굶주림을 참으라)하라.” 이 말에는 뼈아픈 고사(故事)가 있다. 광해군의 난정(亂政) 때 깨끗한 선비들은 나가서 벼슬하지 않았다. 어떤 선비들이 모여 바둑과 정담(情談)으로 소일(消日)하는데, 그 집 주인은 적빈(赤貧)이 여세(如洗)라(몹시 가난하기가 마치 물로 씻은 듯하여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음) 그 부인이 남편의 친구들을 위하여 점심에 수제비국이라도 끓여 드리려 하니 땔나무가 없었다. 궤짝을 뜯어 도마 위에 놓고 식칼로 쪼개다가 잘못되어 젖을 찍고 말았다.


바둑 두던 선비들은 갑자기 안에서 나는 비명을 들었다. 주인이 들어갔다가 나와서 사실 얘기를 하고 추연(愀然, 낙심하는 모양)히 하는 말이, 가난이 죄라고 탄식하였다. 그 탄식을 듣고 선비 하나가 일어서며, 가난이 원순 줄 이제 처음 알았느냐고 야유하고 간 뒤로 그 선비는 다시 그 집에 오지 않았다. 몇 해 뒤 그 주인은 첫 뜻을 바꾸어 나아가 벼슬하다가 반정(反正, 광해왕 15년(1623)에 이귀, 김류 등 서인(西人) 일파가 광해왕 및 집권파인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능양군인 인조를 즉위시킨 인조쿠데타를 가리킨다) 때 몰리어 죽게 되었다.


수레에 실려서 형장(刑場)으로 가는데 길가 숲 속에서 어떤 사람이 나와 수레를 잠시 멈추게 한 다음, 가지고 온 닭 한 마리와 술병을 내놓고 같이 나누며 영결(永訣)하였다. 그때 그 친구의 말이, 자네가 새삼스레 가난을 탄식할 때 나는 자네가 마음이 변한 줄 이미 알고 발을 끊었다고 했다. 고기밥 맛에 끌리어 절개를 팔고 이 꼴이 되었으니, 죽으면 고기 맛이 못 잊어서 어쩌겠느냐는 야유가 숨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찾은 것은 우정이었다. 죄인은 수레에 다시 타고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탄식하였다. “소인기, 소인기(少忍飢 少忍飢)하라”고…….


변절자에게도 양심이 있다. 야당에서 권력으로 팔린 뒤 거드럭거리다 이내 실세(失勢)한 사람도 있고, 지금 요추(要樞, 중요한 요직)에 앉은 사람도 있으며, 갓 들어가서 애교를 떠는 축도 있다. 그들은 대개 성명서를 낸 바 있다. 표면으로 성명은 버젓하나 뜻있는 사람을 대하는 그 얼굴에는 수치의 감정이 역연하다(歷然―, 누가 보아도 분명하다). 그것이 바로 양심이란 것이다. 구복과 명리를 위한 변절은 말없이 사라지는 것이 좋다. 자기 변명은 도리어 자기를 깎는 것이기 때문이다. 처녀가 아기를 낳아도 핑계는 있다는 법이다. 그러나, 나는 왜 아기를 배게 됐느냐 하는 그 이야기 자체가 창피하지 않은가.


양가(良家)의 부녀가 놀아나고 학자 문인까지 지조를 헌신짝같이 아는 사람이 생기게 되었으니 변절하는 정치가들도 우리쯤이야 괜찮다고 자위할지 모른다. 그러나 역시 지조는 어느 때나 선비의, 교양인의, 지도자의 생명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지조를 잃고 변절한다는 것은 스스로 그 자임(自任, 스스로 자기의 임무로 여김, 자기의 능력 따위에 대하여 훌륭하다고 자부함)하는 바를 포기하는 것이다.

- 1960년 2월 15일 《새벽》 3월호


<인물 소개>

*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1936): 항일 독립운동가, 사학자.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그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에 항일 논설을 쓰기 시작했으며, 이듬해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활약하며 내외의 민족 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발표하여 민족의식 앙양에 힘썼다. 1919년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가, 의정원(議政院) 의원, 전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1925년경부터 무정부주의를 신봉하기 시작, 1927년 신간회(新幹會) 발기인, 무정부주의 동방동맹(東方同盟)에 가입해서 활동하다 일경에 잡혀 복역하던 중 옥사하였다. 적과 타협 없이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동안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 이와 같은 견해가 곧 그의 역사연구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고조선(古朝鮮)과 묘청(妙淸)의 난(亂) 등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고 ‘역사라는 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민족사관을 수립, 한국 근대사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저서에 조선상고사,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등이 있다.

*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1944): 항일 독립운동가, 승려, 시인.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그 후에도 불교의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다가 서울 성북동에서 중풍으로 죽었다. 시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고 불교적인 ‘님’을 자연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衆生濟度)를 노래했다.

* 청음 김상헌(金尙憲, 1570~1652): 조선 중기의 문신.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하여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을 주장했으며,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 문서를 찢고 통곡했다. 1641년 청나라 심양(瀋陽)에 끌려가 이후 4년여 동안 억류해 있었다. 당시에도 강직한 성격과 기개로써 청인들의 굴복 요구에 불복하여 끝까지 저항하였다.

* 지천 최명길(崔鳴吉, 1586~1647): 조선 중기의 문신. 병자호란에서 강화를 주관했으나 1643년 청나라에 끌려가 수감되었다가 1645년 소현세자 일행과 함께 풀려났다. 병자호란 때는 “싸우자니 힘이 부치고 감히 화의하자고 못하다가 하루 아침에 성이 무너지고 위아래가 어육(魚肉)이 되면 종사를 어디에 보존하겠느냐”는 입장에서 강화를 주장하였지만, 자신이 쓴 항서를 찢는 척화파 김상헌의 행동에도 의미가 있다고 인정함으로써 독단에 빠지지 않았다. 병자호란 후에도 스스로 청나라를 왕래하면서 대청 외교에서 패전국으로서 겪는 온갖 어려움을 당당한 자세로 해결했다.

*박중양(朴重陽, 1874~1955?): 일제강점기 때 유명한 친일파 관료. 이토 히로부미의 눈에 들어 통감부 시절 이래 일제 치하 내내 전국 각지의 주요 관직을 두루 지냈다.

* 문명기(文明琦, 1878~?): 일제강점기 때 유명한 친일파 경제인. 일제의 비호 아래 지역 굴지의 사업가로 성장, 제지업과 수산업으로 자본을 축적한 뒤 금광에 투자하여 대부호가 되었다.

* 좌옹 윤치호(尹致昊, 1865~1945): 한말에서 일제강점기의 정치가. 일찍부터 개화운동에 투신해 1881년에는 신사유람단을 따라 일본에 다녀온 뒤 미국에 건너가 신학문을 배웠다. 1895년 독립협회, 1906년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교육 사업에 힘썼으며, 1910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을 조직했다. 일제 말에 변절, 일본제국의회의 칙선 귀족원의원을 지냈다. 1945년 광복 후 친일파로 규탄받자 자결했다.

* 고우 최린(崔麟, 1878~1958): 일제강점기의 친일파, 독립운동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1933년 말 대동방주의(大東方主義)를 내세우며 친일파로 변절, 1934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中樞院參議)가 되었고, 1937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사장에 취임하였으며, 1939년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단장을 지내는 등 8·15광복 때까지 친일활동으로 일관했다. 1950년 6·25전쟁 중 납북되었다.

* 육당 최남선(崔南善, 1890~1957): 한국의 사학자, 문인. 신문화 수입기에서 언문일치(言文一致)의 신문학운동과 국학(國學) 관계의 개척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민족대표 48인 중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2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으나 다음해 가출옥했다. 1938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만몽일보 고문으로 있다가 1939년 일본 관동군이 세운 건국대학 교수가 되었고, 귀국 후 1943년 재일조선인 유학생의 학병지원을 권고하는 강연을 하기 위하여 도쿄로 건너갔다. 광복 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기소되어 1949년 수감되었으나 병보석되었다.

* 춘원 이광수(李光洙, 1892~1950): 한국의 소설가. 1917년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무정(無情)》을을 써서 한국 근대소설사의 새 장을 열었으며, 1919년 도쿄 유학생의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뒤 상하이로 망명,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신문사 사장을 역임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반년 만에 석방되고부터 본격적인 친일행위로 기울어 1939년에는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되었다. 8·15광복 후 반민특위법으로 구속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 매천 황현(黃玹, 1855~1910): 조선 후기의 학자, 우국지사. 시문에 능하여 1885년(고종 22) 생원진사시에 장원하였으나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 향리에 은거하였다. 1910년(융희 4) 일제에 의해 국권피탈이 되자 국치를 통분하며 절명시(絶命詩) 4편을 남기고 음독 순국하였다. 《매천야록(梅泉野錄)》은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총서(史料叢書) 제1권으로 발간되어 한국 최근세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된다.

* 충정공 민영환(閔泳煥, 1861~1905): 한말의 문신, 순국지사. 잦은 해외여행으로 새 문물에 일찍 눈을 떠, 개화사상을 실천하고자 유럽제도를 모방하여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민권신장(民權伸張)을 꾀할 것을 상주하였다. 친일적인 대신들과 대립, 일본의 내정간섭을 성토하다가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의 한직(閑職)으로 밀려났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병세와 함께 이를 반대했으나, 이미 대세가 기운 것을 보고 집에 돌아가 조용히 자결했다. 의정대신(議政大臣)에 추증, 고종의 묘소에 배향되었다.

* 이용익(李容翊, 1854~1907): 한말의 문신, 정치가. 친러파의 수령으로 일본이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1904년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가 체결된 후 배일(排日)친러파로 일본에 납치되었다가 이듬해 귀국, 경북관찰사에 등용되었는데, 그 동안 보성사(普成社) 인쇄소를 차리고 보성학원(普成學院: 지금의 고려대학교)을 설립하였다. 나중에는 블라디보스토크 등지로 망명하여 구국운동을 계속하다 병사하였다.

Posted by 익구
:
그간 저작권 문제에 의연하게 대처하던 익구닷컴이었으나 고심 끝에 현행 저작권법을 준수하기로 결론 내렸습니다. 한국온라인신문협회가 제정한 디지털뉴스 이용규칙(http://www.kona.or.kr/konacopyright.htm )을 읽고 마음을 굳혔습니다. 출처와 글쓴이를 밝혔더라도 이는 “저작인격권” 문제를 해결한 것일 뿐이며, “지적재산권”은 침해 소지가 있다는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여전히 좋은 글은 나눌수록 더 가치가 커진다고 믿지만 익구닷컴의 장기적 미래를 위해 아쉬운 결정을 내렸습니다. 앞으로는 제가 감명 깊었던 글, 널리 나눠서 함께 공유하고픈 글들을 올리는 데 많은 제약이 있을 것 같습니다. 링크라는 방식이 있긴 하지만 전문 게재와는 느낌이 다르고 링크하기가 여의치 않은 글들도 많으니까요.


제 허접한 잡글의 민망함을 논객들의 맛깔스런 글들로 메우기도 했는데 이제 홀로서기를 해야 할 시점인가 봅니다.^^; 현재 저작권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칼럼의 일부를 발췌해 제 코멘트를 넣는 식의 게시판을 신설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대가들의 이야기를 듣는 흥겨움에만 빠져있지 말고 스스로 궁리하고 탐구하도록 노력하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보겠습니다.


이제 이 시간부로 펀글 전용 게시판인 부국안민, 백화제방, 백가쟁명 게시판에 대한 더 이상의 업데이트를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앞으로 한달 정도의 기간 동안은 게시판을 그대로 둘 터이니 골라 읽는 재미를 느껴주세요. 저는 그 기간 사이에 백업도 좀 하고 향후 대책(?)을 강구해볼랍니다. 여하간 늦어도 9월 말에는 펀글 게시판들을 폐쇄하겠습니다. 그 전에 퍼가시고 싶은 글들을 퍼가세요. 흑흑


끝으로 향후 저작권법 개정이 저작권 보호라는 선의만 너무 앞선 나머지 온라인상의 커뮤니케이션을 지나치게 옥죄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럼 오늘도 좋은 글, 재미난 글 많이 읽으세요. 고맙습니다.^^ - [憂弱]
Posted by 익구
:
익구닷컴 게시판을 약간 개편했습니다. 간략히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립니다 - 익구닷컴 공지사항이나 익구 신상에 중대한 변화가 있거나 할 때 알리는 곳입니다.


우약탐구 - 저에 대한 이모저모를 늘어놓는 곳입니다. 憂弱이라는 제 호는 “약함을 걱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언제나 저의 어리석음과 모자람을 인식하자는 뜻이면서도 약한 것, 어려운 것, 힘겨워 하는 것에 대한 관심을 놓지 말자는 뜻이기도 합니다. 갖다 붙인 유려한 의미만큼이나 제 호에 부끄럽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자유단심 - 제 잡글 중에서 딴에는 표현이 유창하고 내공이 많이 실린 주옥같은 글들을 올릴 예정입니다. 찾아보며 공부를 하거나 깊은 고민을 많이 한 글로서 나름대로 작품성 짙은 글들이 모일 듯 하네요. 푸하하 자유인, 자유주의에 대한 깊은 애정을 단심(丹心)이라고 표현해봤습니다.


명각만필 - More liberal 게시판보다는 조금 가벼운 잡생각들과 고민의 무늬들이 남겨질 곳입니다. 조촐한 사유의 흔적과 사색의 즐거움이 있도록 하겠습니다. 명각(明覺)은 불교 수계식에서 받은 제 법명입니다. 한번 써먹어 보고 싶어서요.^^ 만필(漫筆)이란 보고 듣고 느낀 바를 마음 내키는 대로 적은 글이라는 뜻입니다. 김만중의 서포만필, 시인 황인숙님의 인숙만필 정도의 용례가 있네요.


익공잡록 - 일기장 같은 곳으로 신변잡기와 시사 논평이 주를 이룰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야기나 사회에 투덜거리고픈 이야기를 가볍게 써내려 갈까 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일들을 기록한다는 뜻의 잡록(雜錄)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참고로 익공(翼公)은 제 또 다른 애칭입니다.


부국안민 - 명색이 경영학도인 만큼 경제 관련 칼럼을 엄선해봤습니다. 제 꿈이 부국안민에 보탬이 되는 사람입니다.^^


백가쟁명 - 함께 나누고 싶은 여러 논객들의 칼럼을 모으는 곳입니다.


백화제방 - 이것저것 모으기 좋아하는 익구가 이래저래 모으는 시나 좋은 글 조각입니다.


게시판 개편과 더불어 조만간 익구닷컴 글들을 좀 정리할 생각입니다. 익구닷컴을 꾸린지 두 해가 넘어서면서 글도 제법 쌓여서 수백개의 글들이 있다 보니 공해도 좀 있는 거 같고요. 새출발하자는 의미로 정리벽이 발동하여 제 컴퓨터 문서파일 정리를 겸해서 싹 정리를 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시답지 않은 잡글을 올릴 때도 많은 자기검열을 합니다(검열이라는 표현보다는 함부로 글을 쓰지 말자는 경계라는 표현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혹시 나중에 꼬투리 잡히지나 않을까, 먼 훗날 필화의 소재로 쓰이지 않을까라는 기우에 호들갑을 떨지요.^^; 이런 생쇼 속에서 탄생한 제 잡글들은 정말 자식 같이 애착이 갑니다. 나중에 돌아보면 제 민망했던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나기도 하고, 지금은 잊고 사는 뜨거운 마음에 부끄러워지기도 하고, 이런 기특한 생각들을 했었구나라며 대견스러워하기도 합니다.


이건 여담이지만 무한 애프터서비스 정신으로 제 잡글에 오타나 맞춤법, 띄어쓰기 오류도 발견되는 족족 수정하고 있답니다. 오프라인에서 다 보여 주지 못한 저란 녀석의 생각과 사는 모습들을 이 온라인 공간에서 진솔하게 담아내기 위해 무던 애를 쓰고 있으니 어여삐 여겨 주세요.


끝으로 블로그가 익숙지 않으신 분들께서 종종 글 쓸 수 있는 곳을 찾으시는데... 그토록 애타게들(?) 찾으시는 방명록은 익구닷컴 로고가 있는 맨 위쪽에서 GuestBook을 찾으시면 됩니다. 블로그 특성상 손님용 게시판 메뉴가 따로 존재하지 않음을 양지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글 쓰는 곳 없다는 핑계 말고 글도 남겨주고 가세요.^^ 그럼 오늘도 치열하고 재미나시길! - [憂弱]
Posted by 익구
:

05. 7/1 야간행군 中

모든 떠남은 돌아옴(歸)이게 마련입니다. 4주간의 훈련소 생활 동안 과연 저는 제 자신으로 정직하게 돌아오고, 타인에 대한 겸손한 이해를 체득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네요.


군대란 곳에 있어보니 적잖이 짜증도 나고, 투덜거릴 일도 많았지만 그럴 때면 "참고 참고 또 참고"를 외쳤습니다. 바닥에 忍 혹은 忍耐(인내)를 쓰기도 했고, 푸쉬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읊조렸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나누기(훈련소 기록을 조만간 잡글로 작성할 예정)로 하고 일단 지친 몸을 좀 쉬겠습니다. 아 정말 속세로 돌아오니 좋네요. 푸하하 - [憂弱]
Posted by 익구
:

저작권 문제에 대해

공지 2005. 1. 30. 08:26 |
저작권법 개정으로 온라인 세상이 한바탕 난리법석입니다. 이번 개정의 핵심은 음악 관련 해서 실연자와 음반제작자에게도 전송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입니다. 이보다는 저작권 침해 단속 강화 방침이 많은 누리꾼(네티즌)들의 반발을 사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음악 관련 내용만 있는 줄 알고 먼 산 바라보듯 했는데 그것이 아니더군요. 문화관광부의 친절한 설명에 따르면 “온라인상에서 저작물을 함부로 업로드하거나 다운로드하는 행위, 자신의 블로그나 카페에 올려놓는 행위, 허락을 받지 않고 남의 글을 함부로 자신의 블로그 등에 옮겨 놓는 행위(펌 행위) 등도 저작권 침해행위”이고 “5년이하의 징역이나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지는 과중한 범죄”가 됩니다.


블로그로 전환한 새 익구닷컴에 있는 게시판 중 논객열전/ 경제카페/ 녹차한잔은 펀글 전용 게시판입니다. 그간 칼럼과 시 등을 모아왔고 앞으로도 모을 예정입니다. 그냥 문서 파일로 저 혼자 보관만 해도 될 것을 굳이 이렇게 해둔 것은 좋은 글은 나눌수록 더 가치가 커진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펀글 게시판의 글 중에 맘에 드시는 것이 있으시면 마음껏 퍼다 나르시기를 바랐고요. 저작권법 개정안 시행 이전에도 이미 개인 홈페이지에 저작물 무단 인용(?)은 불법의 소지가 있을 수 있겠거니 생각은 했지만 이제 쌍심지에 불을 켜고 처벌을 하겠다니 당혹스럽습니다.


저작권법을 어긴 행위는 침해를 당한 권리자의 고소 고발이 필수적인 친고죄에 해당하니 당장은 익구닷컴을 운영한 죄로 벌금형에 징역살이를 할 걱정은 안 해도 되겠습니다. 게다가 상당수 논객들께서 자기 글 좋다고 가져간 학생에게 처벌을 요구하지 않을 것 같고요.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겠지만 업데이트는 계속 할 것입니다.


저작권법 개정이 음악 쪽에 치중되어 있다보니까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글 같은 경우에는 원래부터 위법인 셈입니다. 물론 무분별한 펌 문화가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인터넷 현실을 고려한 법 적용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행법상으로는 사적 이용을 위한 복제가 허용되는 범위가 매우 좁아 대량의 범법자만 양산할 것이 뻔합니다. 사실 국내 대학 교재들 상당수가 외국 교재를 이래저래 베낀 것이라는 것은 상식인데 이건 그냥 쉬쉬하고 넘어가고(뭐 참고문헌들 주르르 달아서 면책이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학생들이 칼럼 하나, 시 한 편 나눠보겠다는 것은 안 된다니 좀 억울합니다.


어느 한 개인이 궁리해서 내놓은 저작물은 대부분 혼자만의 노력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알게 모르게 많은 이들의 글과 말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고 있더라도 말입니다. 설령 100% 자기 생각과 경험으로만 이루어진 글이 있다고 합시다. 사실 그런 글이 저작권을 주장한다면 가볍게 안 읽으면 그만입니다. 남의 것을 읽고 보고 듣지도 않고 이루어진 창작이라면 어차피 별 볼일 없는 내용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상업적 목적으로 이용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방문객도 한정적인 개인 홈페이지에서 이 분의 글이 좋아서 나눠보겠다는 것이 처벌까지 받아야 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듭니다(이 부분은 명확한 유권해석이 궁금하네요). 설령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대다수 누리꾼들을 범법자로 만드는 것은 황당한 일입니다. 또 가난하고 무식한 서민들만 곤욕을 치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전 국민의 지식수준이 높아져서 저마다 칼럼도 쓸 수 있고, 시도 지을 수 있지 않는 한 온라인 상에서의 지적 교류가 막혀 버릴 테니 말입니다.


앞으로 온라인 상에서 글로 교류하는 것이 자신의 창작물로만 가능하다면 매우 수준이 낮거나 아니면 교묘한 표절이 횡행할 것이 뻔합니다. 물론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으면 문제가 해결되겠지만 우리도 사느라 바쁜데 언제 일일이 허락 받고 앉아 있으며, 설령 허락을 받으려고 해도 그게 하루 이틀만에 허락을 해줄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결국 돈 없고 빽 없는 이들은 온라인 상에서 칼럼을 놓고 토론도 못하고, 시도 함께 감상하지 못하게 생겼습니다.


이래저래 울분을 토해놨지만 저작권에 대해 정확히 아는 바가 없어서 많이 틀린 부분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아니 제가 오해하고 있고 기우에 시달리고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식의 과도한 저작권자 보호가 문제점이 많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인용 후 그 출처를 명기한다면 그 정도는 양해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하간 쓸데없이 누리꾼들을 범법자로 만드는 현행법의 보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공짜가 없는 세상에 권리 보호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시장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익구닷컴의 글들은 원칙적으로 copyleft를 추구합니다. 남의 글 부지런히 실어다 나르는 제가 무슨 염치로 copyright를 주장하겠습니까?^^; 제가 쓴 잡글의 경우에도 원칙은 동일합니다. 제 잡글을 별도의 허락 없이 발췌해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만 출처 정도는 밝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사실 이렇게 하실 일이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 됩니다만요.^^


아무쪼록 오늘도 열심히 배워서 남도 많이 나눠주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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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구닷컴 3차 리뉴얼이 완료되었습니다. 고심 끝에 블로그로 전환하기로 했습니다. 손님들의 클릭 수를 줄여주는 배려가 필요하다는 말에 솔깃해서 전격적으로 결정한 것입니다. 최신 글 보기 기능이 없고, 게시판 글 하나하나를 클릭해야 하는 舊 익구닷컴의 불편한 점을 고쳐보고자 나름대로 고객 중심의 사고(?)를 발휘했습니다. 이번에도 전작업의 99%를 싫은 소리 없이 도와주신 윤정누나께 가슴 깊이 고맙습니다.^^


제가 홈페이지라고 조잡하게 만들어 프리챌에 셋방살이 시작한 것이 2003년 4월 4일이었습니다. 그 후 사촌누나의 도움으로 2003년 7월 15일 익구닷컴이 개통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출발을 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미 많은 포털 사이트에서 이런저런 블로그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쓰면 용량 제한도 없고, 도메인비와 웹 호스팅 비용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데도 굳이 이렇게 돈 내고 꾸려나가는 것이 조금 답답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생하며 세간살림 채워나가는 재미는 쏠쏠합니다.


부지런한 사람이라면 홈페이지 하나쯤 거뜬히 운영하겠지만, 저같이 게으름을 사랑하는 녀석에게는 무척이나 성가신 일입니다. 좋아하는 글을 퍼 나르고, 별 시답지도 않은 일상사나 생각들을 잡글로 써갈기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인터넷에 쏟아 붓는 시간들의 상당수가 이 홈페이지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너도나도 정신 없이 달려가는 세상에서 이 무슨 한가한 신선놀음이냐는 불안감도 종종 엄습하고요.


잡글이라도 써내는 것은 나름대로 커다란 용기와 노력이 듭니다. 가끔은 밑천이 달리면서 억지로 글 쥐어 짜내지 말고 공부나 하자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지만 조금 모자라더라도, 조금 오류가 있더라도 열심히 발언하되 성실히 고쳐나가고 보강해나가는 노력을 하는 것도 꽤나 괜찮은 전략 같습니다. 물론 입으로만 거창한 이야기 주절거리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언제나 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을 말하고 제 멋에 취해버리는 것에 대한 욕망은 부인하기 힘듭니다.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일상사에 의미를 부여하고 기록을 남기는 것이 바로 홈페이지의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무언가 흔적을 남기기 위해 노력하는 그 순간의 행복은 개인 홈페이지 꾸리는 사람들이 포기하기 힘든 행복일 것입니다. 각박한 세상에 잡글 몇 개와 사진 몇 장으로 위안을 삼아 힘을 낼 수 있다면 분명 싸게 먹히는 유희일 것입니다. 경영학적으로 비용-편익 분석을 해도 크게 나쁘지 않을 것 같고요...^^


문자 텍스트에 중독된 저인 만큼 조금 지루한 이야기라도 놓치지 않고 모으고 풀어놓아 보겠습니다. 늘 한결같은 모습이되 끊임없이 혁신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겠습니다. 바쁜 시간 쪼개서 이 누추한 구석에 들러주시는 여러분들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개인 홈페이지를 운영한다는 것은 즐겁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두렵고 신경 쓰이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익구닷컴을 처음 열었을 때의 환희와 설렘을 잊지 않겠습니다.


종종 들러주시고 방명록이나 댓글들도 좀 남겨주세요. 그게 힘이 됩니다. 벽에다 대고 독백을 늘어놓는 기분보다는 적당한 피드백이 있어야 저도 힘이 샘솟는답니다. 그럼 오늘도 재미난 하루 되세요. 고맙습니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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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익구닷컴을 들러주시는 여러 벗님들...
이 썰렁한 집구석에 몇 마디 따스한
글 선물 남겨주고 가시지 않으시렵니까?
익구가 당신의 방명록을 기다립니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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