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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전후

일기 2008. 1. 1. 17: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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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께서는 시골에 사실 때, 나라에 올리는 세금이나 부역을 반드시 평민들보다 앞서서 바치고, 한 번도 늦춘 일이 없으셨다. 마을의 아전들도 또한 고관의 집인 줄을 몰랐었다.
先生居鄕 凡調役征賦 必先下戶而輸之 未嘗有逋稽 里胥亦不知爲達官家


곽황이 선성(宣城)의 재(宰)로 있으면서 남에게 말한 바 있다. “이 고을의 조세나 공부에 대하여 나는 걱정이 없다. 이선생께서 온 집안 사람을 거느리시고 남보다 앞서 바치시므로 고을의 백성들이 모두 선생의 의를 두려워하고 서로 앞을 다투어 와서 자진 납부하며 도리어 뒤질까 두려워하고 있으니, 내가 번거롭게 한 번도 꾸짖지 않았어도 조금도 모자람이 없으니, 내 어찌 걱정하겠느냐.”
爲宣城宰 嘗語人曰 此縣租稅貢賦 吾無其憂矣 李先生率戶先人備納 鄕里小民 畏先生之義 而爭自來納 猶恐惑後 不煩一呵 靡有所欠 吾何憂哉
<퇴계선생언행록> 卷2, 處鄕 中


능력이냐, 도덕이냐? 조악한 이분법이 나도는 시대다. 도덕도 중요하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능력이 필요하다며 비장한 언설을 늘어놓는다. 내가 아는 유능함은 다양한 자원들이 결합되어 시너지 효과가 나는 건데, 능력 좋아하시는 분들은 경제성장 능력이 단독으로 호젓하게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다. 뭐가 급하신지 자꾸 현실을 초월해 신앙의 영역으로 넘어가시려고 해서 안쓰럽다. 키에르케고르는 도덕적 이상을 성취하는데 한계를 느낀 인간의 불안감은 신에게 복종함으로써 해소된다고 설파한다. 종교적 단계에서 인간의 무력감과 허망함을 극복하게 된다는 기독교 논리인 셈이다. 능력을 성역화하는 분들도 이런 전개를 따라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리는 건 아닐까 싶다. 그런데 키에르케고르조차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하며 ‘신 앞에 선 단독자’가 되라고 했다는데 경제에 종속된 식객이 되어서야 쓰겠는가.


나누기 힘든 걸 굳이 쪼개서 보시는 분들은 아마도 솔선수범하는 태도를 능력이라고 보시지는 않을 게다. 인용한 일화에서 퇴계 선생은 겉으로 드러나는 몸가짐을 보여줬다. 제자들이 오버한 측면이 있겠지만 퇴계의 처신은 볼만한 것이 많았다. 내면적인 인격이나 품성이 밖으로 배어나게 마련이라고 하지만 모든 공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설령 관찰 가능하다고 해도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건 피곤한 일이다. 상대당, 언론, 시민단체나 이익집단 등이 감독 역할을 일감으로 삼아 사회적 분업을 수행한 대가로 밥 벌어먹고 산다. 보수 우경화가 심화되고 있다는 진단이 들리는데 우리 사회가 건실한 견제집단을 남겨둘지 걱정이다. 문제 제기 좀 하려고 하면 과거지향적이니, 네거티브니, 발목 잡기니 하는 지청구가 날아들지는 않을까.


머잖아 새로운 대통령과 둘레 사람들이 이 나라를 다스린다. 그 누가 되었든 간에 도덕의 최소한인 법을 지키자는 말을 하지 않는 분은 없으리라. 준법도 의심되는 판에 말본새와 청렴성 혹은 청부성(淸富性)을 가늠하는 일은 얼마나 사치스러운가. 그러나 이 사치를 부리는 사람이 좀 더 늘어야 이 땅이 좀 더 예측 가능해진다. 사고의 효율성을 높인다. 정치를 도덕화하지 말라고? 나는 다만 정치가 할 일을 법에 맡기는 정치의 사법화(judicialization of politics) 현상이 서글플 따름이다. 정직은 사회자본이기 이전에, 법률 쟁송의 대상이기 이전에 개인의 미덕이다. 대한민국이 정직이나 솔선수범을 정치적 심판의 소재로 삼기를 포기할까봐 두렵다.


071210
2007년 종합부동산세 과세 대상자와 부과액이 2006년에 비해 크게 늘었다고 호들갑인 분들이 있다. 2006년에 급등한 부동산값이 공시가격에 반영됨으로써 과세 대상자가 늘었고 과세표준 적용률이 높아져 부과액도 증가했다. 종부세는 고액의 부동산 보유자에 대하여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조세부담의 형평성을 제고하고, 부동산 가격안정과 지방재정 균형발전을 목적으로 2005년부터 시행됐다. 종부세는 불공평한 소득세제를 보완하는 기제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소득은 감추기 쉬워도 부동산은 감추기 어렵기 때문이다. 보수야당과 일부 언론이 세금폭탄 운운하며 부동산 부자들의 이익을 과대 대표한 건 부끄러운 일이다. 이들의 조세저항을 접하다 문득 고려말 권문세족이 전제개혁에 반발하던 모습이 떠올랐다면 너무 실례일까.


분명히 말하건대 종부세를 못내겠다는 성냄과 종부세를 낼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푸념은 동일선 상에 놓아서는 안 된다. 푸념이 성냄에 견주어 더 마땅하다. 종부세는 소득과는 무관하기 때문에 오랜 세월 한 아파트에서 살아왔는데 갑자기 세금이 올라 부담스럽다는 항변도 일리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1가구 1주택자에 대한 종부세를 경감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설령 미세조정을 하더라도 시장에 규제가 완화된다는 신호를 주지 않기 위한 또렷한 전달이 필수적이다. 1가구 1주택에 대한 양도소득세를 감면해주거나 상속이나 증여·매매 등 소유권 이전이 발생할 때까지 종부세 납부를 유예해주자는 주장도 있다.


이런저런 검토를 하다보니 문득 마음이 불편하다. 내가 특별히 못 된 심보이기 때문은 아닌 듯싶다. 집 한 채가 전부인 봉급생활자나 고령 은퇴자들이 투기와는 무관하더라도 서민들에 비해 담세능력이 월등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종부세 과세대상이 되는 주택의 시세는 8억원이 넘는다. 시세 8억원 미만인 집을 갖고 있거나 집이 없는 서민은 1000만가구인데 고령 1주택자인 2만 명을 각별히 염려하는 게 선후 관계가 맞느냐 헛갈린다(박구재. “종부세를 위한 변명” 경향신문. 2007. 12. 03. 참조). 종부세 대상자들의 하소연을 귀담아 듣는 자세로 사회 소외계층을 챙겼다면 이 나라가 이렇게 삭막하지 않았을 것이다. 1가구 1주택에 대한 종부세 완화가 공평과세와 조세정의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면밀하게 살피지 않고 세금 덜어주는 게 엄청난 묘안인 것처럼 호언장담하는 게 마뜩잖다.


토지의 공공성을 둘러싼 논쟁은 예나 지금이나 한판 승부로 끝낼 문제는 아니다. 또한 불완전한 인간이 만든 세금제도가 무결점일리도 만무하다. 종부세 효과가 미진한 이유 가운데는 정책이 제대로 안착하겠느냐 하는 의심이 많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자리를 잡아가는 종부세 제도를 무작정 흔들기보다는 좀 지켜보면 안 될까? 아둔한 내가 보기에도 종부세에 쏟아 붓는 열정을 좀 더 비천한 곳에도 좀 건네면 사치인가? 종부세에 짜증을 내시는 분들은 그래도 당장 먹고 살만하시기에 드리는 말씀이다. 그나저나 밥벌이도 제대로 할지 모르는 내가 벌써부터 내 집 마련을 걱정하는 건 너무 빠른 김칫국이다.^^;


080101
2007년 12월 31일과 2008년 1월 1일 사이에 고종석 선생님의 단편 <엘리아의 제야>를 읽었다. 소설의 배경은 딱 5년 전 이맘때다. 섣달 그믐날(양력)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 모임에서는 안주 삼아 2002년 대선 이야기가 나온다. 5년 뒤에도 비슷하지만 사뭇 다른 광경이 펼쳐지고 있다. 과연 2002년에 노무현을 끝내 찍지 않았던 이들의 좌절에 견주어 2007년에 차마 이명박을 찍지 않았던 이들의 낙담은 어느 정도일까.


흠뻑 취했던 주인공이 숙취를 다독이려는 노력이 줄거리다. 이런 표현은 없겠지만 숙취 문학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 아닐까 싶다. 잃어버린 기억의 퍼즐을 맞추며 함께 했던 벗들을 돌아보는 게 마치 내 삶의 한 단면을 들여다보는 듯해 친근하다.^^; 주인공이 산책 중에 타워팰리스 쪽을 바라보며 “누군가의 가랑이 밑을 지나지 않았다는 건 내 자부심이다. 기품 있게 살자”라고 새해 다짐을 하는 장면은 짠하다. 김병익 선생님은 화자가 헤프다는 것, 천민스럽다는 것에 본능적인 저항감을 느낀다고 평했다. 나도 그 꿈에 기대고프다.


내 나이 스물하고 하나였을 때 어느 어진 이가 하는 말을 들었지. “금화든 은화든 동전이든 다 내주어버려라. 그러나 네 마음만은 간직하라. 진주든 루비든 다 내주어버려라. 그러나 네 생각만은 자유롭게 하라.” 그러나 내 나이 스물하고 하나였으니 이런 말은 소용없었지.

내 나이 스물하고 하나였을 때 나는 또 그가 하는 말을 들었지.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을 결코 거저 주어지는 법이 없지. 그것은 많은 한숨으로 보답 받고 끝없는 후회에 팔린단다.” 이제 내 나이 스물하고 둘이 되니, 오, 그것은 진실, 그것은 진실.


주인공의 가족이 정담을 나누다 앨프리드 하우스먼(A. E. Houseman)의 <내 나이 스물하고 하나였을 때(When I Was One-And-Twenty)>라는 시를 암송하는 대목이 푸근하다. 이 시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기 마음을 함부로 건네면 그로 인해 권태에 시달리고 회한이 사무친다는 충고를 노래하고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좀 더 넓게 풀이해봐도 좋을 듯싶다. 싫증이 엄습하지 않도록 자기 삶의 주인의식 혹은 자존감을 지키라는 뜻으로 봐도 무방하다. 나는 이 시의 조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해에도 지인들에게 마음을 냉큼 주었다가 실망하기도 하고, 스스로를 생각의 감옥에 밀어 넣기도 하겠지만.


내 나이 스물하고 여섯이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 중독되지 않는 생각을 건사하는 한해를 꾸려야겠다. “만 냥이 어찌 나를 도에 살찌게 하겠소(萬金何肥於道哉)?”라는 허생의 일갈이 내게도 함께 하길! 유능과 실용을 권하는 사회에서 마음공부와 역사공부를 팽개치지 말기를! 올해도 이 모자란 녀석과 함께 해줄 여러분 모두 새해 복 많이 만드시고 나누시길 바랍니다.^0^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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