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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리들2

일기 2009. 2. 22. 21:58 |

제가 요즘 어수선하게 지내는 관계로 쓰고 싶은 잡글은 많은데 제대로 정리를 하고 있지 못합니다. 아쉬운 마음에 우수리를 모아봤습니다.


090113
기원전 600년 이전 사람인 조로아스터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종교 창시자로 추정된다. 선과 악의 대결, 최후의 심판, 천국과 지옥, 인간의 사후 운명에 대한 관심, 구세주 등 조로아스터교의 기본 교리는 유대교, 천주교, 개신교, 이슬람교, 불교에 모두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조로아스터가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등 기원전 5세기의 성인보다 앞선 시대의 사람이라 이런 가설이 나오는 모양이다. 나는 이런 역사적 사실에서 종교의 발전도 결국 인류의 진화와 함께 해온 지난한 여정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품었다.


문득 신이란 인간의 필요에 의해 창조된 존재로 “인간이 신의 아들이 아니라 신이 인간의 아들”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했던 포이어바흐가 떠오른다. 나는 종교가 인간의 행복에 복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만 보지는 않지만 적어도 종교가 인간의 화목을 해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배타성은 종교의 본질 가운데 하나다. 그것이 근본적이라든가 공격적이라든가를 떠나서 이교도나 비종교인에게 마냥 너그럽다면 그건 이미 종교가 아니다. 그러나 그 배타성에는 절제와 금도가 있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인지 이 땅에서는 다채로운 종교가 스며들고 섞였다. 한국은 다종교 사회라고 할 만하고 세속주의 원칙이 비교적 잘 지켜진 나라라고 볼 수 있다. 헌법 제20조가 규정하고 있는 정신도 이런 현실에 바탕을 둔다. 이 정부 들어서 이 헌법정신을 잊어버린 분들이 우리 사회의 상층부에 제법 많이 계신 듯싶어 살짝 불안하다. 나는 내 자신이 불가지론자인지 무신론자인지 아직 확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설령 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지(全知)-전능(全能)-전선(全善)을 다 갖춘 신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런 내 신념은 헌법의 보호를 받는다.


090120
KBS 드라마 <황금사과>를 IPTV를 이용해 사흘에 걸쳐 다 봤다. 참회하는 가해자와 용서하는 피해자, 그리고 권선징악과 권불십년이라는 설정은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그 비현실성은 어디에도 없는 곳(Utopia)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앨빈 토플러는 제3의 물결이 프랙토피아(Practopia)적 미래를 낳을 것으로 전망했다. Practical과 Utopia의 합성어인 프랙토피아는 피안(彼岸)이 아닌 차안(此岸)이다. 권세를 얻은 자가 누구든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미운 짓을 벌이지 못하도록 사회적인 한계를 분명히 그어야 한다. 그래야만 속죄와 관용, 보상과 문책을 통한 화해의 문이 열린다. 이 경계가 무너지면 용서하려 해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


군사독재 시절을 배경으로 삼아 틈틈이 시국에 대한 한탄을 적절히 섞은 재미가 쏠쏠하다. 극중 대사에 말조심하라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2009년 어느 날 나는 내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런 말 하다가 잡혀간다”라고 농담을 날린다. 요즘 한국 사회가 권력을 소수가 독점했을 때의 폐해를 다시 반복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먼 훗날 이명박 정부가 <황금사과> 같은 드라마의 배경으로 쓰이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돌아볼 능력도 없던 중앙정보부 정 과장(이기영 분)은 드라마 속에만 있는 인물은 아닌 모양이다.


090212
현재 법률 해석의 원리 및 해석의 정당화를 가르치는 곳은 많다. 그러나 입법학이라 불리기도 하는 법률 제정과 개정의 문제를 탐구하는 곳은 드물다. 행정학이나 정책학, 정치학은 물론 사회학, 경제학, 경영학 등과 연계한 통합적이고 학제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인 모양이다. 그간 입법의 문제는 법률 제정 실무자들에 국한된 입법기술로 취급된 경향이 짙다. 하지만 입법 감시야말로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춧돌을 놓는 일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의 말씀처럼 민주주의란 스스로가 옳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체제이기 때문이다.


2006년 9월 출범해 지역주민의 생활에 있어 가장 밀접한 하위법률 연구를 진행한 희망제작소 부설 조례연구소가 좋은 예다.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에서 “무용한 법은 필요한 법을 약화시킨다”라고 역설했듯이 좋은 법률의 존재는 법치 효능감을 제고시키지만 아직 애정 어린 관심이 부족한 듯싶다. 일전에 문학평론가 이명원 선생님은 판례에 대한 단순한 ‘해설’을 넘어서는 체계적인 법률 ‘비평’이 부재하다고 지적하셨다. 입법평론 혹은 사법비평 같은 영역이 단숨에 열리지는 않겠지만 우리 사회에 긴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입법부와 사법부에 계신 훌륭한 분들이 세금 값을 넘게 하신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런 개인적인 신뢰보다는 일상적인 감시시스템과 공정한 평가체계가 더 요청된다는데 동의한다.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자유의 대가는 영원한 불침번이다”라고 설파했듯이 주권자인 시민이 입법을 감시하는 것은 헌법정신에 따른 마땅한 권리이자 의무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사법 감시도 일상화되어야 한다. 욕먹는 게 업인 정치인들은 차라리 담담한 편인데 이런 비판과 분석을 신성모독쯤으로 생각하는 판사나 검사 분들이 많아 걱정이다.


제퍼슨은 또 “신뢰는 어디서나 독재의 어버이이며, 자유로운 정부는 신뢰가 아닌 경계심에 기초하고 있다”라고도 말씀했다. 입법 감시나 사법 감시 모두 권력을 견제하는 시민의 방패막이다. 믿음은 소중한 덕목이지만 권력을 향해서는 최대한 아껴서 써야 한다. 의심이 넘치면 대개 피곤하지만 권력에게 건넬 때는 먼저 의심부터 할수록 우리 삶이 윤택해진다. 정부 여당이 내세우는 법치가 특정인에게 기울어진 것이라면 우리는 만인에게 평평한 법치를 모색해야 한다. 아마 그 평평함은 약자나 소수자에게 좀 기울어진 형태가 되어야겠지만 말이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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