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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성이 능력이다2

경제 2007. 11. 6. 03:55 |

<도덕성이 능력이다>는 총 5부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순서대로 읽으셔야 하지만 따로 읽으셔도 무방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A는 Amorality의 약자로서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지도자를 지칭하는 가상의 인물입니다. 대선 끝날 때까지 틈틈이 수정할 계획이니 퍼가지 말아주세요.^0^


2. 도덕성과 능력의 상관관계


네덜란드의 일화 하나는 언제 반추해도 신선한 충격이다. 로테르담 시장으로 재직하면서 16년 동안 한국돈으로 4백 만원의 판공비를 착복했다는 혐의로 내무장관직에서 물러난 페퍼 전 시장의 존재가 무겁게 다가온다. 입만 열면 대가성이 없었다는 핑계를 대는 우리네 풍토와는 너무 다른 세상이다. 사스키아 스티벨링 감사원장은 이에 대해 “액수의 문제가 아니라 공직자에 대한 신뢰의 문제”라고 답했다. 네덜란드 공직자의 이런 자세는 도덕성과 능력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는 판단에 기인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현실은 더 퇴행적이라 부끄럽다. 이중적 윤리 잣대가 횡행하는 건 기본이고, 최고 지도자 (후보) 평가에 대한 관대화 경향은 끔찍한 정도다. 이러한 이중성과 관대화는 ‘탈도덕 현상’을 확대 재생산한다. 여기서는 도덕성과 능력의 상관관계에 대한 탐구에 집중하면 될 듯싶다. ‘탈도덕 현상’의 핵심 논리는 도덕성과 능력의 낮은 상관관계이며, 능력에 가중치를 부여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탈도덕 현상’은 열악한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한 유능한 지도자를 지향한다. 개혁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염증을 토로한다. 참여정부는 출범 초부터 깨끗하고 정통성 있는 정부라는 자의식이 충만했다. 정부의 도덕적 자부심은 그 자체로 큰 자산이었고, 소수파 정부로서의 약점을 보완하는 기제로 작동했다. 마키아벨리는 결과는 가치나 동기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며 결과적 선(善)을 옹호했다. 이러한 비도덕주의(amoralism)은 정치를 도덕과 종교로부터 분리해냈다. 막스 베버는 이러한 마키아벨리의 도덕관을 상당 부분 계승했다. 그는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신념의 윤리(Gesinnungsethik)와 책임의 윤리(Verantwortungsethik)를 제시했다. 신념윤리(혹은 심정윤리)는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행위자의 심정, 의향에 도덕적 가치를 둔다. 선에서는 선만이 생겨나고 악에서는 악만이 생겨난다고 믿고, 동기가 선하면 주어진 행위는 그 결과에 상관없이 선하다고 본다. 이에 반해 책임윤리는 인간의 평균적인 결함을 계산에 넣는다. 달리 표현해 세계의 윤리적 비합리성(die ethische Irrationaliaet der Welt)을 고려해서 행동한다. 동기의 선함보다는 결과의 선함을 더 중시하며 예측 가능한 결과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을 진다는 특징이 있다.


베버는 신념윤리를 따르는 사람은 나쁜 결과가 나올 경우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세상이나 타인의 어리석음에 돌린다고 평한다. 이에 반해 책임윤리는 인간의 불완전성을 사려 깊게 궁리한다고 표현하기 때문에 두 가지 윤리의 개념 정의에서 베버의 의도적 편향을 엿볼 수 있다. 베버는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는 절대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둘이 서로 도와야 비로소 정치의 소명을 지닐 수 있는 참된 인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베버는 신념윤리는 무책임이 아니며, 책임윤리가 무신념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신념윤리를 평가절하하고 정치인은 책임윤리를 함양해야 한다는 쪽이다(류지한, “베버의 가치 철학에서 책임윤리와 합리성의 한계”, 『철학논총』 제29집, 새한철학회, 2002, pp. 179~203). 도덕성 시비에 휘말린 후보를 응원하는 쪽에서는 뜬금없이 책임윤리를 꺼낸다. 참여정부는 신념에 함몰되어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책임윤리를 설파했던 베버도 두 윤리를 양자택일할 수 있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설령 그가 책임윤리에 올인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자신의 편의에 근거한 개념 정의에 힘입은 결론이다. 행위의 결과를 절대적으로 무시하는 정치는 존재하기 어렵고, 자신의 비전(심정)도 없이 결과를 향해 매진하는 정치 또한 상상하기 힘들다.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는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느냐,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하느냐 정도의 논쟁이 있을 뿐 이 둘을 엄밀하게 구분하는 건 실익이 없다. 선심성 행정을 비판하는 논거로 책임윤리 명제를 가져다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남발해서 외칠만한 소리는 아니다. 설령 베버의 논리를 오롯이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A가 책임윤리의 적격자라는 견해가 도출되지는 않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경제성장이라는 목표에 투신해야 한다는 건 어찌 보면 신념윤리와도 제법 닮았다. 신념윤리의 대표적인 사례로 기독교적 가치관을 든다. 산상수훈(山上垂訓)을 연상시키는 절대윤리의 그림자가 경제대통령 담론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이러한 메시아주의는 신념윤리의 부정적 측면이다. A가 책임윤리의 적임자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에 대한 묻지마 지지는 책임윤리를 지향하는 태도는 아니다. 책임윤리는 결과로써 승부하는 것이다. 메시아를 옹위하려는 의도가 지나쳐 성과 평가에도 선택적 잣대를 들이대지는 않을까 염려스럽다. 모든 문제를 떠나서 A가 예측 가능한 결과에 책임을 지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지는 도덕성 여부에 관계없이 검증할 문제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책임윤리로 ‘탈도덕 현상’을 설명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그러면 조조의 인재 기용 방식인 ‘유재시거(唯才是擧, 능력만이 추천의 기준이다)’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건안 15년(210년) 조조는 명을 내려 “만일 반드시 청렴한 선비가 있어야만 기용할 수 있다면, 제나라 환공(桓公)은 어찌 천하를 제패할 수 있었는가!”라며 “오직 재능만을 천거하는 것이 옳으니, 나는 그런 자를 쓸 것이다”라고 말한다. 건안 19년(214년)에는 “품행이 바른 인물이라고 해서 반드시 진취적인 것이 아니고, 진취적인 인물이라고 해서 반드시 품행이 바른 것은 아니다”라며 유능한 인재가 버려지지 않기를 당부했다. 조조는 능력만 있으면 도덕성이 모자라도 기용하겠다는 의지를 가졌다. 물론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억울한 누명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진일보한 의미도 품고 있지만 그의 신하 중에 권모술수에 강한 인물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결국 사마의의 쿠데타로 위나라는 망하게 된다. 인재난에 시달리던 촉나라의 인재 기용 방식을 정확히 알기는 힘들지만 제갈량의 출사표에서 간접적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그가 후주 유선에게 신하를 추전하며 “착실하며 뜻과 헤아림이 충실하고 순수하다”“성품과 행함이 선량하고 공평하다”“곧고 믿음직해서 절개를 위해 죽을 만하다”라고 평한다(김재웅, 『제갈공명의 도덕성 우선의 리더십』, 창작시대, 2002).


위와 촉의 국력 차이를 볼 때 서로 다른 인재 채용이 어떤 기능을 했을지 가늠하기는 힘들다. 하나 분명한 것은 평생 청렴했던 제갈량이 단지 재능만으로 그만한 공적을 쌓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조조의 유재시거(唯才是擧)가 도덕성과 능력이 낮은 상관관계를 입증하지도 않는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탈도덕 현상’의 근원을 탐구하는 게 무익하게 느껴진다. ‘탈도덕 현상’은 어떤 논리체계를 가진 실체라고 보기 멋쩍다. 그렇다면 현재의 정치지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A를 대체할 만한 대안세력의 부재가 가장 큰 원인일 수 있기 때문이다. A의 반대세력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상태에서는 유일한 선택지로 지목된 A에 대한 방어심리가 기형적으로 발현될 공산이 크다. 슬프게도 광신으로 불신을 치유하지는 못한다. 거품(bubble)은 반드시 터지게 마련이다. ‘탈도덕 현상’은 이제 신뢰의 문제로 옮겨가야 한다. 그래야 좀 더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하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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