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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풍과 개인주의

잡록 2008. 1. 4. 03:45 |

외우(畏友) 박영선님의 미니홈피를 갔다가 술자리에 한번 불참한 것으로도 타인에게 무한한 서운함을 주는 자의 고독을 엿봤다. 각종 모임이 잦았던 영선님은 머릿수 채우기용 병풍 역할을 계속 해야 할지를 고민하셨다. 문득 존경하는 인호형께서 일전에 들려주신 말씀이 생각났다. 언젠가부터 당연히 와 있어야 하는 사람이 되면, 오라고 챙겨주는 사람이 없어지게 되는 역설. 조연도 아닌 하나의 배경이 되어서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가 보이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은 존재가 된다는 절절한 경험담을 곱씹을 때마다 가슴을 친다. 열심히 끼다보면 안 끼어있게 되고 관객석만이 덩그러니 남겨진 그 감추기 힘든 허망함이랄까. 이건 대학의 과반 활동에 그치기보다는 사람살이의 한 정형화된 주기를 보여주는 듯싶다.


요즘에 내가 몸담은 대학교 과반에서 반 활동이 앙상해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해법을 찾으려면 원인을 알아야 하는데 문제의 원인으로 개인주의의 심화를 드는 경우가 많아서 좀 당혹스러웠다. 개인주의는 집단주의에 대한 반대, 이타주의에 대한 반대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이타주의에 대한 반대를 일컫는 말로 이기주의나 자기본위와 같은 말들이 있다. 그래서 칼 포퍼는 개인주의를 집단주의의 반대라는 의미로만 한정시켜 사용하겠다고 개념 정의하기도 했다. 포퍼는 플라톤이 이타주의를 집단주의와 동일시하고,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동일시했다고 비판했다. 이기적 개인주의와 이타적 집단주의라는 두 가지 선택지만 놓고 고르라고 윽박지르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이유다. 철학자 김용석 선생님은 개인주의를 “'나'라는 개인만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나, 너, 그, 그녀 등 모든 개인을 중요시한다. 즉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의 가치와 존엄 그리고 권리를 전제하는 것”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이기주의에는 자기 존중밖에 없다면, 개인주의에는 이와 더불어 타인에 대한 배려가 있다는 언설이 솔깃하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가르는 관건은 나만 생각할 것인가, 나를 포함한 모든 개인을 생각할 것인가에 있다는 주장에 거개 동감한다. 이렇게 개념 정의를 하고 나면 개인주의는 도피처가 아니라 지향점의 의미가 강해진다. 나는 개인주의는 핑계가 아니라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주장의 논거가 개인주의에 대한 개념 정의에 크게 기대고 있는 관계로 순환논증의 오류를 피하기 힘들다. 스스로 주장하려는 바를 자기 주장의 근거로 삼아버렸다고 볼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개인주의가 속죄양이 되어 쉬운 변명거리로 여겨지는 세태가 못마땅해서 개인주의에 대한 내 개념 정의를 말해봤을 따름이다.


선후배 관계가 데면데면해진 것이 어찌 개인주의 탓이겠는가. 우애보다는 경쟁이 더 실용적인 사회, 대학교 1학년 때부터 학점을 챙기는 게 미덕인 시대에 우르르 몰려서 술이나 마실 짬이 어디 있으며, 후배가 연락을 안 한다고 한가로이 투덜거리는 선배는 얼마나 가여운가(반어법임). 나는 극작가 배삼식 선생님의 <제갈량의 오만>이라는 칼럼을 읽은 이태 전부터 틈틈이 후배들이 덜 유능할 때, 적당히 무능할 때 부담 없이 다짐을 남발하고, 허영심에 들떠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했으면 좋겠다고 주절거린다. 해야만 하는 일보다 하고 싶은 일에 좀 더 손길을 보내고, 좋아하는 책도 많이 보고, 곁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을 만끽할 수 있기를 바란다며 훈장질을 했다. 돌이켜보니 민망하다. 재빨리 유능해져서 그 유능함을 써먹는 재미에 사는 후배들에게 내 잡설은 얼마나 메스꺼웠을까(물론 여기서의 유능함은 무조건 좋은 의미는 아니다).


지난 2007년 2학기 종강잔치 2차에서 우리 반에 비해 사람수가 훨씬 적은 사학과 분들이 종강잔치 하시는 광경과 마주쳤다. 언뜻 보아도 머릿수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서 속상했다. “고대 경영대는 희망합니다 우리를 향한 질투가 더 많아지기를...” 등의 신문 광고씩이나 내는 단과대의 외화내빈을 걱정한 것은 나만의 감정이었을까. 이렇게 말하고 보니 놀지 못해서 실성한 사람 같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친구들의 대부분이 이건 좀 아쉽다고 여긴 만큼 내가 중뿔나게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다. 설령 그렇더라도 개인주의자로 산다고 입으로는 말하면서도, 머릿수가 너무 줄어든다며 안타까워하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 씁쓸하다. 내 자신부터가 머릿수 채우는 병풍 역할을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만만한 손아랫사람에게까지 병풍이 되라고 강권하지 않았나 반성한다.


늘은 재주는 없는 내게 후배들만 쌓일 때 곤혹스럽더니 최근에는 아예 무뎌진 듯싶다. 언제부터인가 후배들 보는 자리에서 나는 얼마나 유익했던가, 나는 또 얼마나 재미났던가를 고민했다. 그런데 요즘은 그냥 얼굴 보는 것만도 좋긴 하다. 좀 더 나은 모습을 보여야겠다는 욕심을 포기한 건 아니지만 그냥 편하게 다가온다. 체념인지 달관인지 잘 모르겠지만.^^;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작품인 <템페스트>에서 프로스페로의 딸 미란다는 “아버지에게 나는 얼마나 큰 짐이었을까?”라고 묻는다. 프로스페로는 “귀여운 내 딸아, 너 덕분에 나는 존재할 수 있었다. 너의 미소는 하늘이 내게 준 용기를 머금고 있었다”라고 답한다. 둘레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짐이 되었을지 모르는 나이지만 “덕분에 존재할 수 있었다”라는 말을 듣고 싶다.


흠모하는 재현형은 “대학생활 동안 내가 부르면 찾아올 사람들을 만들었다”고 자부하셨다. 인호형께서는 이 문구를 “나는 불러줄 사람들이 많다”라고 유쾌하게 패러디하셨다. 내 대학생활 동안 (배움을 제외한) 사람 사귐은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나는 천성은 게으른데 놀 때는 날래다. 불행 중 다행(?)인지 내 인간관계의 폭이 그리 두툼하지 못해서 책임질 사람이 많지 않아 부담이 덜하다. 괜찮은 병풍조차 되지 못한 내게 귀한 시간을 내준 지인들에게 조금만 미안하기 위해서라도 내 자신을 가꿔야겠다. 우선 익자삼우(益者三友) 같은 낡아서 도통 거들떠보지 않는 기준부터 채워보고 싶다. 무능한 주제에 이런 욕심을 부리다니 나는 아직도 정신을 덜 차렸다. 내게는 거침없이 죽비를 날려줄 벗이 좀 더 필요하다. 익구 공부독촉위원 인선을 마무리해야겠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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