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꼽등이 생각

잡록 2010. 8. 30. 04:04 |

꼽등이는 며칠 전에 알게 된 곤충이다. 처음 들었을 때는 ‘곱등이’였는데 국어사전이나 백과사전에 ‘꼽등이’라고 나오기에 이 표기를 따른다. 머리부터 배로 이어지는 등 쪽이 곱사등이처럼 굽어서 그런 이름이 붙여진 모양이다. 귀뚜라미와 비슷하지만 더듬이가 길고 뒷다리가 길어서 잘 뛰는 편이다. 적잖은 분들이 꼽등이를 혐오하는 이유도 이 친구가 예상치 못한 점프력을 보여주기 때문인 듯하다. 나도 그래서 메뚜기과를 데면데면하게 여기는 편이다. 어쩌면 내가 가공할 점프력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곤충 따위는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종(種)차별주의(speciesism)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영화 ‘스타쉽 트루퍼스’의 트라우마 때문일수도 있겠다.^^;


꼽등이는 시각과 청각이 약하고, 날개가 없어 귀뚜라미처럼 울지도 못한다고 한다. 나는 곤충계의 헬렌 켈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고 둘레 사람들에게 거의 동감을 얻지 못했다. 헬렌 켈러를 언급하니까 EBS 지식채널 ⓔ에서 헬렌 켈러가 장애를 극복한 인간 승리의 대명사로만 알려졌을 뿐, 그가 사회주의 운동에 몸담았던 사실은 대개 은폐되었음을 지적하는 <미국의 우상>편이 떠오른다. 헬렌 켈러의 삶을 발췌해서 간직하려는 그들은 헬렌 켈러를 그의 삶과는 정반대로 소비한다. 사회적 모순을 비판하던 그를 개인의 초인적 노력으로 역경을 딛고 일어서라는 자조론, 자력갱생의 미덕으로만 이용하려 했으니까 말이다. 헬렌 켈러 선생님은 낙관주의자의 사표셨는데 꼽등이도 세상의 비난을 의연하고 꿋꿋하게 해쳐나가길 바랄 따름이다.


꼽등이가 해충이라고 하는데 어떤 악행을 저지르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토로했더니 이런저런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벌레 중에 피나게 무는 것은 거머리와 꼽등이 뿐이라든가, 꼽등이의 입과 항문 주변에 세균이 많은 비위생적 녀석이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 좋다는 등의 이유는 무척 설득력 있었다. 음습한 곳에 사는 야행성 곤충이 한 둘이 아니지만, 초식성이 아니라 쓰레기 부식질이나 죽은 곤충 등도 먹는 (대부분은 동물성 먹이를 먹는) 잡식성이라는 사실이 꼽등이에 대한 비호감을 부채질한다.


꼽등이의 다양한 별칭 중에 ‘소악마’라는 것도 있었다. 고종석 선생님의 신작 소설 『독고준』에서는 “호모사피엔스가 가장 싫어하는 종은 호모사피엔스일 것이다. 인간은 악마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그러니까 우리들 자신이 악마이므로”라는 구절이 인상 깊었다. 넘치는 혐인(嫌人)도 경계하고 싶지만, 인간이 발전하거나 진화하는 게 맞는다면 우리 내부의 악마성을 조금씩 줄여나가는 것에 있지 않을까 싶다. 사랑을 더해가는 세상보다는 미움을 덜어가는 세상이 좀 더 현실적인 목표 같기 때문이다. 꼽등이에 대한 사랑을 더하기는 어렵지만 미움을 더는 것은 약간의 정성이면 가능하다.


시인 김명수 선생님은 ‘꼽등이’라는 시에서 “귀뚜라미처럼 울지도 못하는 꼽등이가/ 수염이 너무 길고/ 뒷다리도 너무 가늘다고 여겨졌다”라고 쓰셨다. 메뚜기나 귀뚜라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이지만 혹시 꼽등이를 만나게 된다면 시인만큼은 아니더라도 조금은 다정한 눈길을 건네 보고 싶다. 꼽등이를 해충이라 부르는 이유가 인간을 기준으로 한 것인지, 아니면 황소개구리나 베스처럼 자연계의 시각으로 본 것인지 아직도 헛갈리기 때문이다. 이 흉한 몰골의 벌레보다 인간은 얼마나 더 아름답고 덜 추악한 것일까? 이따금 자신이 없다.


내가 거니는 대학원 건물에 종종 출몰한다고 하니 곧 만나게 된다면 그 괴이한 형상을 마주치고 나면 내가 앞장서서 악플을 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전에 나쁜 벌레가 있으니 좋은 벌레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살육을 저지르는 인간이 이런저런 미물(微物)을 성토하는 것은 민망한 일이 아닐까 의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꼽등이의 존재를 알게 해주신 혜림누나, 꼽등이 못지않은 무서운 풍채로 유명한 그리마와 연가시와 같은 곤충 영상을 보는데 많은 도움을 주신 은영누나, 현영에게 다시금 고마움을 표한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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