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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학생이 선택하는 삶

잡록 2008. 3. 20. 02:44 |

<내 이름은 김삼순>이라는 드라마 첫 회에서 삼순이는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이렇게 묻는다. “날 사랑하긴 했니? 3년 동안 넌 한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해준 적이 없어. 날 사랑하긴 한 거야?”나도 내 자신에게 묻고 싶다. “공부하기는 한 거야?” 그간 기웃거리던 행정고시 공부를 사실상 접었다. 편 것도 없으니 접을 것도 없다고 해야 맞는 표현이겠지만.^^; 졸업하기 전에 재수강을 하기로 결심한 행정법총론 강의 때문에 실낱같은 인연은 유지되지만 내 마지막 전공 과목으로 시험 과목인 미시경제론이나 거시경제론 대신 금융론을 넣음으로써 내 진로가 바뀌었음을 비로소 추인했다.


나는 어떤 결심을 할 때 관련 책을 사는 고약한 버릇이 있는데 이번에는 시험과는 전혀 관계없는 성백효 선생님이 번역한 『맹자집주』와 『논어집주』, 기세춘 선생님이 쓰신 『노자 강의』 등의 책을 구매했다. 4학년 1학기씩이나 된 학부생이 제 진로를 백지상태에서 검토한다는 건 민망한 일이다. 그런데 나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이는 고상한 예외주의라기보다는 내 삶을 그나마 이어가는 원동력인 대책 없는 낙관주의가 자기방어를 위해 발동했을 따름이다. 학교 내에 있는 국제관계연구원에서 인턴 일을 시작한 것 외에 더 정해진 바는 없다. 티베트 독립을 희망하기 전에 내 일신의 안온함을 꾀해야 할 텐데 걱정이다.


어제는 친구의 꼬드김으로 어느 기업 채용설명회를 참석했다. 올해부터는 인턴사원을 뽑을 때 작년까지는 없던 영어면접을 본다는 말에 흠칫 놀랐다. 경쟁률은 20대 1쯤 되겠냐고 대충 물었다가 면박을 당했다. 0을 하나 더 붙여 200대 1이 될 수도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역시 날라리 경영학도로 살다 보니 냉혹한 자본의 논리를 아직도 깨우치지 못했다.^^; 생각 있으면 주말까지 자기소개서를 내라고 하는데 이 일을 떠나서라도 가까운 시일 내로 자기소개서라는 것도 좀 작성해봐야겠다. 도무지 소개할 것이 없는 내 지난날을 반성하는 기막힌 계기다.


얼마 전에 김우창 선생님의 <자기가 선택하는 삶>이라는 칼럼을 무척 감명 깊게 읽었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남을 이기기 위한 위인지학(爲人之學)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한, 자아실현을 도모하는 공부라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추구하라는 가르침과 상통한다. 이 글에서 선생님은 우리 사회가 외면적 순응만을 요구하고 내면적 의미의 추구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진단하셨다. 젊은 시절에도 자기 스스로가 의미 있다고 느끼는 삶을 추구할 여유가 없다는 한국 현실에 대한 탄식이 고맙다. 내가 대학을 선택하고, 스스로 직장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대학과 직장에 의해 선택 당하는 문제를 지적하실 때 적잖이 통감했다. 자기가 선택하는 삶은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두렵다. 그 두려움을 덮고도 남을 설렘이 없다면 선택을 할 유인이 많이 떨어진다. 설렘, 그간 잊고 있던 말이다.


사기업 취직에 대한 밀도 있는 고민을 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역지사지한답시고 기업의 채용담당자가 되어 나 같은 녀석을 뽑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일어날까를 상상하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이 또한 내가 선택하는 삶이라기보다는 남에게 선택 당하는 삶의 전형일 게다. 이러한 역지사지가 잘못이라기보다는 그에 앞서 품어야 할 고민을 망각하는 것이 잘못이리라. 그러고 보니 내가 원하는 게 진정 무엇이었는지, 내 가슴을 뛰게 만드는 것을 찾아봤는지 부끄럽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고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마구 넘쳐나지도 않는다. 대개는 고운 정만큼 미운 정이 드는 모양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숭고하면서도 비루한 밥벌이에 나서는 이 땅의 모든 생활인들의 애환이 슬몃슬몃 나를 맴돈다.


이렇게 피곤한 채 죽으면
영원히 피곤할 것만 같아서
그것이 문득 두려워서

죽고 싶도록 슬프다는 친구여
죽을 것같이 슬퍼하는 친구여
지금 해줄 얘기는 이뿐이다
내가 켜 든 이 옹색한 전지 불빛에
生은, 명료해지는 대신
윤기를 잃을까 또 두렵다

- 황인숙, <묵지룩히 눈이 올 듯한 밤> 中


새해 들어 가장 먼저 내 눈에 들어온 시다. 사실 나는 무슨 일이든 피곤할 만큼 열심히 해본 적이 없는 듯싶다. 후배들을 보면 이틀 밤도 잘만 샌다는데 나는 지금까지 밤을 새본 적이 없다. 진정한 의미의 밤샘이란 늦잠이나 낮잠도 없이 새벽 공기를 맡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술 마시다가 아침 먹고 들어간 적이야 있지만 노는 걸로 지새운 밤을 자랑할 만큼은 내 낯짝이 두껍지 못하다. 모닝콜을 느지막이 맞춰놓고도 못 깨어나 늦잠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내 자신을 보니 문득 불안하다. 졸린 눈을 비벼가며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모든 걸 다 거두지는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내가 흠모하는 기열형께서 “내가 아쉬움이 없는 건 아쉬움이 남을 짓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술회하는 말씀이 너무 멋졌다, 따라하고 싶다. 아쉬움이 남을 짓을 하면서 그에 대한 아쉬움조차 정직하게 느끼지 못하는 내 자신이 딱하다. 무지근할 때까지 내 자신을 닦달할 용기는 좀처럼 나지 않지만 혹여 그런 순간이 도래한다면 이 다짐들을 기억하길. 더 많이 웃도록 하자. 술맛도 건사하자. 그 무엇보다 기품을 잃지 말자! 노곤함은 늘, 언제나 과정이어야지 결과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종종 나른함이 삶의 목적인양 사는 사람을 봤다.


지난 1월 11일 타계한 뉴질랜드의 탐험가 에드먼드 힐러리를 처음 접한 건 어린이용 명언집에서였다. “나는 기술적으로는 프로가 되고 싶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언제나 아마추어이고 싶다”라는 말씀으로 기억하는데 인터넷 상에서는 “정신적으로는 아마추어, 기술적으로는 프로이고 싶다”라고 퍼져 있다. 프로가 맡은 일을 능수능란하게 처리하는 재주라면 아마추어는 순수함이나 겸손함을 가리키는 뜻으로 많이 풀이한다. 전문 분야의 솜씨에 국한되지 않는 통섭하는 능력이라든가, 인간미와 동떨어지지 않는 기예라고 봐도 괜찮다. 빼어난 기능인이 되기도 어렵지만 이를 넘어서려는 마음가짐도 필요하다.


시에 나오는 ‘-대신’이  어미 ‘-은’, ‘-는’ 뒤에 쓰일 때는 앞말이 나타내는 행동이나 상태와 다르거나 그와 반대임을 나타낸다. 즉 명료해져서 윤기를 잃어 가는 상황을 묘사한다. 명료는 전문적인 지식 같은 서늘한 유능함으로, 윤기는 우애와 신뢰 같은 정다운 인간미로 해석하고 싶어졌다. 힐러리의 경구에 대입해 본다면 프로의 소양을 갖추다 보니 아마추어적 감수성을 잃는 형국이다. “유능한 대신 부패하다”와 “부패한 대신 유능하다”는 뜻빛깔이 다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시인은 잃어 가는 윤기에 방점을 찍으며 안타까워한다. 나는 훨씬 더 명료해져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윤기를 덜 잃었으면 좋겠다. 또렷해지면서도 매끄럽고 싶다는 바람은 얼마나 거대한가.


힐러리에게 에베레스트를 어떻게 올랐냐는 질문이 쏟아지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올라갔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면 운명이 손을 들어주기 시작한다는 그의 지론은 내 어깨를 짓누른다. 요즘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폐허다. 내가 스스로 헝클어뜨려 놓고 괜히 투덜거린 건 아닐까 싶다. 맹자는 “사람은 모름지기 스스로를 업신여긴 뒤에 남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받는다(夫人必自侮 然後人侮之)”라고 역설했다. 어질지 못한 사람(不仁者)은 스스로를 모욕했기 때문에 남의 미움을 받는다는 맥락에서 쓰인 표현이다. 맹자는 이어 『서경』 태갑(太甲)편을 인용하며 “하늘이 지어낸 재앙은 오히려 피할 수 있으나 스스로 만든 재앙은 피하지 못한다(天作孼 猶可違 自作孼 不可活)”라고 강조한다.


복학해서 듣는 논어 강의에서 내 가슴을 아리게 만드는 구절을 접했다. 어찌나 따갑던지 강의시간이 참 길게 느껴졌다. 공자의 제자 염구가 “선생님의 도를 기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힘에 부칩니다(冉求曰 非不說子之道 力不足也)”라고 고충을 토로한다. 공자는 “능력이 부족한 자는 도중에 그만두게 마련인데 지금 너는 미리 금을 긋고 있구나(子曰 力不足者 中道而廢 今女畫)”라고 꾸중한다. 즉 중간까지는 가서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한계를 긋고 멈추는 자포자기한 상태를 질타한 말씀이다. 숨이 차서 헐떡거리는 남들의 모습을 보고 지레 겁먹어 몸을 움츠리고 발을 뺄 궁리만 했던 건 아닌가 부끄럽다. 획(畫)을 한 번 그었으니 이제 당분간 삼가야겠다. “미안하다, 여기까지라서...”라고 말하며 퇴각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


영국의 산악인 조지 말로리도 에베레스트에 오르려 애썼다. 사람들이 왜 산에 오르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그것(에베레스트)이 거기에 있으니까요(Because It's there).” It은 에베레스트를 가리킨 말이었지만 요즘은 산 일반으로 많이 쓰인다. 좀 더 확장해서 특정한 목표를 It으로 두고 매진하는 경우도 많다. 진부한 명언을 꺼내드는 까닭은 “Because It's there”를 외칠 기력이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프로도, 아마추어도, 명료도, 윤기도 모두 놓칠 것만 같다. 단순히 내가 게을러서 생긴 문제는 아니다. 길을 잃은 모양이다. “안개의 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기형도, <안개> 中).” 안개 탓만 하지는 않으련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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