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한 편파성

사회 2006. 7. 25. 03:41 |

2002년 6월 당시 칼럼니스트로 활약하던 유시민 선생은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에 연재했던 '유시민의 시사카페'에서 '칼럼니스트의 정치적 중립성 문제'를 언급했다. 이 칼럼은 지금도 내게 큰 지적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는 스스로에게 “칼럼니스트는 반드시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가?” “칼럼니스트가 논리와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정치적 사안에 대해 중립을 지키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며 어떤 것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정치적 중립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는 칼럼니스트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비난받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왈가왈부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곱씹어 볼만한 주제다. 유시민 선생은 정치적 중립은 이론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칼럼니스트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고 답한다. 중요한 것은 정치적으로 중립이냐 여부가 아니라 어떤 칼럼니스트가 왜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지 않은 태도를 형성하고 표명하게 되었으며, 그가 정당한 방법으로 자기의 정치적 견해를 뒷받침하는지 여부라고 헌걸차게 말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이한 시각과 논리 사이의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이라는 그의 입장에 거개 동감한다. 우리 사회의 극단적 대립은 중립성이 부족했다기보다 공정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또한 나와 다른 견해와 겸허하게 경쟁하려는 시장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런 진단과 더불어 우리 사회에 중간 영역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중립성이라는 표현보다는 중간 영역이라는 표현이 좀 더 가치중립적인 것 같다). 자신이 편드는 가치를 옹호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건 자연스럽다. 그러나 우리 둘레를 살펴보면 저마다의 편향성을 보이면서도 상당부분 중립적으로 사안에 접근하는 사람들도 많이 볼 수 있다. 그것이 한갓 개똥철학으로 치부될지언정 대개의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은 제 나름대로 정보를 처리하고 세상을 판단하며 소신을 품는다. 그것이 민주공화국 시민으로서의 권능이자 책무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의 공고화(consolidation)를 위한 요소 가운데는 이러한 갑남을녀들의 의사를 폭넓게 수렴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도 분명 포함될 것이다. 정치적 중립이라는 이데아(Idea)가 실현불가능하다고 하지만 그에 비슷한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는 있다. 마찬가지로 공정한 편파성도 이데아일 뿐, 우리가 추구하는 건 그 언저리까지다. 이데아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답답해하지 말자. 그게 불완전한 인간이 만들어내는 불확실한 세상일지니.


자신의 색깔을 사랑하고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표현하기를 즐기는 사람들 가운데는 중간 영역에 잘 대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유시민 선생의 주장도 자칫 잘못하면 그런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중립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 모두 편파적이 되어야 한다로 귀결되는 건 곤란하다. 그러다 보면 극단적인 해법만이 최선이라고 외치거나, 바람직한 방향으로 냉큼 달려가자고 재촉할 여지가 많다. 고교 평준화 제도가 문제가 있다며 당장 고교 입시를 부활시키라는 주장에 많이 무리가 있듯이, 민족사적 과제인 남북통일을 왜 당장 이루지 못하느냐고 보채는 것도 억지스럽다. 가령 한-미 FTA 문제는 찬성과 반대 두 가지 영역 밖에 없는 건가. 그 사이에 있는 조건부 찬성, 조건부 반대, 가능하면 찬성, 가능하면 반대식의 입장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가 이거 양보하면 차라리 협상을 결렬하겠다는 마지노선을 가지고 있다고 치자. 그런데 저쪽에서 상당한 수준의 양보를 해왔다면 우리의 마지노선도 다소 수정할 수 있는 게 아닐까(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 구체적인 협상에 대한 평가를 내린 건 아니다).


모 아니면 도라는 식의 접근은 효율성을 높이고 지지자들의 충성도를 높인다. 강한 추진력을 통해 기대했던 것 이상의 성과를 경우도 적잖이 있다. 그러나 이익 갈등이 다각도로 진행되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더 이상 그런 틀을 가지고 사회를 운영하기에는 너무 위험부담이 높다. 섬세하게 계산되지 못한 갈등 비용은 두고두고 화근이 될 것이다. 갈등 비용 관리는 주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소설가 김훈 선생은 “어느 편이냐고 묻지 마라. 그 질문은 너무 폭력적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도 “회색분자가 많아야 좋은 세상”이라고 말한다. “기회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이지만 양심적인 사람들을 데리고 가야”한다는 말은 많은 영감을 준다. 나는 유토피아를 믿지 않지만 굳이 말해보라면 ‘보통선(普通善)’이 만개한 세상이라고 말하겠다(보통선은 내가 고등학교 시절 만들어 놓고 자화자찬했던 용어로 쉽게 말해 소극적인 선이란 뜻인데 앞으로 좀 더 정교하게 다듬어볼 생각이다. 내 이런 소박한 바람이 결국 아담 스미스가 주창하던 내용들과 별반 다를 게 없지 않나 은근히 두렵다.^^;). 이는 누군가의 희생을 먹고 진보하는 사회, 착한 사람들의 손해를 먹고 지탱되는 사회가 아닌, 보통 사람들이 상도덕을 준수하며 제 몫을 챙기는 사회다. 그곳은 날마다 천사와 악마가 건곤일척을 벌이지 않아도 되는 곳, 갈등 비용이 많이 줄어든 곳일 것이다.


중립성 이야기를 하다보니 생각나는 인물이 있다. 바로 문화일보 윤창중 논설위원이다. 나는 그가 2002년 이후로 연재한 칼럼을 거의 빠지지 않고 다 읽어 왔다. 그는 노무현 스토커로 불릴 정도로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 집권여당에 대한 비판적 글쓰기를 해온 인물이다. 비슷한 소재로 글을 쓰면 질릴 법도 한데 늘 새로운 채찍을 준비하는 걸 보면 무척 솜씨 좋은 논객이기도 하다. 오죽했으면 2002년 대선 국면에서는 전국언론노조 문화일보지부 공정보도위원회에서 “윤 위원의 칼럼의 내용과 형식에 있어 공정성 시비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물론 그는 이런데 굴할 사람이 아니다. “권력을 비판하는 것이 두려우면 신문사 자리를 버리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매일매일 하며 살고 있다”는 그의 말에 고개가 숙여진다. 그러나 “내가 사무실에 앉아 해야할 일은 노정권을 비판하는 일이라고 굳게 믿는다”고 밝히는 대목에서는 고개가 갸우뚱거린다. 왜 그런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갈까.


윤 위원의 칼럼을 읽다가 그의 편파성을 도드라지게 드러난 부분을 발견했다. 2003년 5월 “전대통령 YS”라는 칼럼에서 김영삼 전대통령이 돈이 부족해 힘들게 지내고 있다고 전한다. YS의 덕목 중 하나는 돈에 관한 한 욕심이 없다는 점을 들며 “정부로부터 연금으로 월 844만원, 예우보조금 월 542만원 등 모두 1386만원을 받”지만 “어쩔 수 없이 전직 대통령의 품위 유지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씀씀이가 있기 때문에 매달 돈 때문에 허덕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김 전대통령의 살림살이를 추론해 정부지원금이 순식간에 바닥나는 과정을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그런데 2006년 3월 “盧대통령의 노후”라는 칼럼에서는 태도가 돌변한다. “노 대통령은 실제로 노후를 걱정할 게 없다”면서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른 혜택을 설명한다. “노 대통령이 저축한 돈 가운데 다만 얼마라도 서민 복지를 위해 쾌척하며 양극화 해소를 외친다면 서민들조차 이렇게 복장을 터뜨리고 있지 않을 것”이라면서 “하위소득층의 상대적 박탈감을 자극해 선거에 이용하려는 그 뻔한 위선과 언어의 유희, 그야말로 진정성의 문제”라며 최후의 일격을 날린다. 퇴임한 전직 대통령의 예우가 김영삼과 노무현이 크게 다르기 않을 텐데 누구는 교훈적인 미담이 되고, 아직 퇴임도 하지 않은 현직 대통령은 진정성이 없다고 외치니 참 난감하다. 이게 다 저축한 노무현 탓인가.^^;


외람된 말씀이지만 내 부족한 인식에 근거해서 볼 때 윤 위원이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허상과 싸우느라 열심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2006년 7월 24일자 “17% 대통령”라는 칼럼에서 “노 대통령의 지지층이 평택, 광주의 친북·반미시위 때나 볼 수 있는 맹목적인 좌파·친북·반미 세력에 불과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기야 일전에도 열린우리정권은 주체사상 맹동주의 세력이라고 하신 분이니 더 이상 기대를 하는 게 무리일 듯싶다. 그토록 날카로운 윤 위원이 “‘내부 붕괴형’ 정계개편”란 칼럼에서 “무자비한 자상(刺傷)에 고통의 본능을 억제하는 농축의 절제미는 ‘2% 부족한 영남 공주’를 옛말로 만들어 버렸다”며 박근혜를 평하는 대목은 그가 꽤 따뜻한 품격을 지니고 있음을 엿보게 한다. “정치인의 약속”라는 칼럼에서 송파갑 불출마를 선언한 맹형규의 인간적 고뇌에 연민을 느끼면서 한국 정치가 그래도 희망이 있다고 외치기도 했다. 물론 맹형규는 재출마를 해버렸고 윤 위원은 졸지에 민망한 처지가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를 예상했는지 “눈 딱 감고 재출마해도 그만이다”는 복선을 깔아두기도 했다. 놀라운 혜안이다.^^; 여하간 윤 위원의 글을 보며“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심연(深淵)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면 심연이 당신의 영혼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는 것이다”는 니체의 말을 꺼내들게 한다. 가뭄에 콩 나듯해도 한나라당에게 쓴소리를 내뱉던 그의 모습이 그립다. 2007년 대선의 승자가 누가 되든 간에 지금의 냉소와 저주에서 좀 더 나아간 글쓰기를 많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예전에는 공정한 편파성이 손쉽게 이를 수 있는 경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떤 사안에 대한 균형 잡힌 접근을 하면 할수록 고통스러운 선택이 도사리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차라리 언제나 기댈 수 있는 내 편이 있는 게 마음도 편하고 좋을 텐데 말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고 나니 내가 그간 편파적으로 자랑스레 해왔던 언동들이 부끄러워진다. 나는 좀 더 꼼꼼할 필요가 있었다. 윤창중 논설위원 같은 식의 편파성은 이제 정중히 거절해야겠다. 무엇보다 그렇게 단순하게 세상을 살아가기가 너무 손쉽기 때문에 재미가 없다. 물론 살아있는 권력을 비판하는 용기를 배울 용의는 충만하다. 나는 시원하고 화끈한 사람보다 맹맹하고 조신한 녀석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중간 영역을 청취하기 위해 좀 더 노력하고 싶다. 그러면서도 공정한 편파성이라는 이데아를 손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공정한 편파성과 균형적 중립성의 차이가 실상 대단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본다. 일단은 좀 더 바지런해지고 함부로 손가락질하지 않기를 다짐한다. 아무 편이 아닌 사람들과도 알콩달콩 잘 지내야겠다. - [小鮮]


편을 갈라서 사는 것이 편안한 사람들이 볼 때 아무 편도 아닌 사람은 회색인이자 경계인이거나 기회주의자일 수 있다. 그러나 아무 편도 아닌 사람들이야말로 자유ㆍ민주주의자이며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존중할 줄 아는 인문주의자다. 필요한 것은 관용의 정신이며 상대방을 존중할 줄 아는 자세다. 그런 자세가 없으면 한국사회는 더 성숙해질 수 없다. 아무 편도 아닌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
- 임철순. "아무 편도 아닌 사람." 한국일보. 2004. 02. 05.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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