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에 한국어문회에서 주관한 한자능력검정시험 1급을 치르고 왔다. 100점 만점에 80점 이상이어야 하는데 가채점 결과 70점 정도 받은 것 같다. 꾸준히 틈틈이 공부를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도 평소에 한자를 좋아했던 정분 덕분인지 벼락치기 한 것 치고는 선방한 셈이다. 그래도 세세한 실수는 못내 아쉽다. 가령 맛볼 상(嘗)자에 날 일(日)을 넣어야할 것을 눈 목(目)을 넣는다거나, 전전반측(輾轉反側)에서 측(側)자에 사람 인(亻)변을 넣을 것을, 삼수 변(氵)을 넣어버렸다거나 하는 식의 자잘한 실수는 신경이 쓰인다. 꼼꼼하게 보지 못한 티가 확 난다. 본래 어문회 한자시험이 현재 인정되는 국가공인 한자자격증 가운데 가장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있다. 다른 시험들은 100점 만점에 70점 이상이면 되는 것을 80점 이상을 고수하는 점은 그렇다고 쳐도, 요즘 거의 의식되지 않는 장단음 문제를 10문제(200문제의 5%)나 내는 것도 엄청난 압박이다. 고등학교 시절 3급, 2급 시험을 치를 때 장단음 문제는 그냥 찍고 말았지만 합격선이 높은 1급 시험의 경우에 장단음 문제 10개를 틀렸다고 가정하고 출발하니 여간 조마조마한 게 아니다.


고3 수험시절 주위의 걱정스런 눈초리를 무마해가며 5월에 2급 자격증을 땄다. 한 주 뒤에는 고대에서 한문 경시대회가 열렸고 한문은 그 때나 지금이나 잘 모르지만 아직 기억이 생생한 한자를 조합해서 제법 문제를 풀었던지 장려상으로 턱걸이 입상하는 영광을 얻었다. 한문이나 현대 중국어는 고립어(孤立語)이기 때문에 문법적 관계가 주로 어순에 의해 표시된다. 영어처럼 시제나 진행, 완료형에 따라 동사가 변하는 것도 없고 생각보다 문법이 간소한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별 한자 뜻만 잘 알고 있으면 어순에 주의해서 어찌어찌 해석은 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복잡다단한 한자어가 한문 해석을 어렵게 만드는 장애물임은 부인할 수 없다. 고립어인 중국어와는 달리 한국어는 토씨(助詞)와 어미를 활용하여 말에서 각 낱말이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 나타내는 교착어(膠着語)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문을 읽을 때도 토씨나 어미를 사용했고, 여기서 구결(口訣), 이두(吏讀), 향찰(鄕札) 등의 표기법도 파생된다. 참고로 고립어는 문장의 순서를 바꾸면 아예 뜻이 바뀌지만 교착어는 문장의 순서가 바뀌어도 뜻이 거개 통한다. 가령 “나는 내일 서점에 갈 것이다”는 문장을 “내일 나는 서점에 갈 것이다”, “나는 갈 것이다, 내일 서점에”, “내일 나는 갈 것이다, 서점에”라고 해도 뜻이 바뀌거나 하지 않는다.


여하간 한자 자격증에 대해 몇 가지 험담을 하고 싶다. 우선 네 군데의 국가공인 한자 자격증의 급수별 배정한자가 많이 차이가 나는 점은 못마땅하다. 네 단체가 똑같은 한자습득능력을 측정하려다 보니 차별화를 위해 배정한자를 달리 한 모양이지만 수험자 입장에서는 당혹스럽다. 1급은 3,500자가 배정되어 있는데 네 자격증을 모두 따려면 5,000자 가까이 공부해야 한다니 어지간한 중국 사람도 이렇게 한자를 많이 공부하지는 않을 것 같다.^^; 다음으로 한국어문회에서 기출문제의 공개를 꺼리는 점도 불만이다. 수험생이 문제를 알게되면 수험생이 채점한 점수와 어문회에서 채점한 점수가 차이나서 이런저런 클레임이 걸려올 것이 귀찮기도 할 것이다. 그 많은 시험지를 한자 전문가가 하지 않는다면 경미한 실수나 오차가 있을 텐데 그걸 감추기도 힘들 테고 말이다. 수험생들이 제 기억을 복원해서 힘겹게 시험문제와 모범답안을 만들어내는 수고로움을 당최 언제까지 전가할 것인가. 이런저런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음 시험 때는 일취월장(日就月將)해야겠다. 11월에 다시금 1급 시험에 도전하기 전까지 평소에 좀 공부해야겠다. 내 대학 입학에 지대한 공헌을 해준 한자와의 인연을 아름답게 이어가고 싶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 서예학원에 다니면서 먹을 갈던 그 때부터 나는 한자와 한문을 편애하게 되었다. 물론 그 편애는 모국어라는 큰 틀에서 이루어진다.


나는 한국어를 끔찍이도 사랑한다. 비록 전문적인 한국어 탐구를 하지는 못하겠지만 맛깔스런 글을 지어내는 것은 내 평생의 꿈이다. 나는 내 모국어의 품이 넉넉했으면 좋겠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한자어도 마땅히 한국어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언중의 관심에서 벗어난 옛 한자어들이 서서히 사장되는 것이 안타까워서 이러는 것은 아니다. 툭하면 불거지는 한글 전용과 한자 혼용의 문제에서 이미 한글 전용론의 승리는 완연하다. 나 또한 한자가 혼용된 텍스트를 읽는 것은 세로쓰기로 된 책을 읽는 것만큼 더디고 꺼려진다. 그러나 나는 한글만을 쓰더라도 필요에 따라 괄호 안에 병용하는 건 좀 더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나는 한국어를 풍요롭게 쓰려는 사람은 마땅히 한자도 좀 배우고 익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반드시 옳은 일이기 때문이 아니라 효율적이고 실용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결코 지적 허영이나 낭비가 아니라 지적 알뜰살뜰함이라고 생각한다.


한자는 물론 중국 사람의 글자다. 그러나 그것은 중국인만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선조들은 한자를 아쉬운 대로 잘 써왔다. 그러나 한국어는 영어의 알파벳처럼 다음절 언어인데 반해 중국어는 단음절 언어라 한국어를 표기할 때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한국어와 중국어는 어순까지 다르니 우리 글자가 없던 시기에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하는 데 얼마나 고초가 심했을 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두나 향찰 같은 한자차용표기법(漢字借用表記法)이 쓰였지만 한계가 적잖았을 것이다. 이두가 발달한 형태인 향찰의 경우 한국어의 입말을 가능한 한 가장 완전히 표기하게끔 고안된 서기 체계다(고종석, 『국어의 풍경들』, 문학과지성사, 1999, 36~47쪽 참조). 이두는 생략해도 한문이 그대로 남아 이해할 수 있으나, 향찰은 생략하면 문장 전체가 없어져버린다. 향찰로 표기된 문장은 한문이 아닌 한국어 문장인 셈이다. 만약 향찰이 좀 더 발전했다면 우리는 지금 일본의 가나 같은 보조적인 음절 문자를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향찰은 식자층의 외면으로 고려 초기에 소멸해버렸다. 이두와 한문만으로 제대로 된 언어생활이 힘들었기에 한글 창제를 할 유인이 컸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향찰이 아무리 정교하게 개발되었더라도 한자를 통해 한국어를 온전히 구사할 수 없었기에 한글 창제 같은 노력이 계속되었을지도 모른다.


고종석 선생님이 누차 지적하셨듯이 한글은 음소 문자이면서도 낱글자를 음절 단위로 네모지게 모아씀으로써 음절문자의 효과를 내고 말았다. 실제의 운용은 일본의 가나 같은 음절문자와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이다. 세종대왕을 위시한 훈민정음을 만든 분들은 처음부터 한자가 끼어들 여지가 있는 표기법을 염두에 두었다는 주장에 동감한다. “ㅎㅢ마o(希望)”, “lㄴ새ㅇㅁㅜ사ㅇ(人生無常)”이라고 쓰는 것보다 “희망(希望)”, “인생무상(人生無常)”으로 표기하는 것이 한자가 들어가기가 쉬움은 몇 번 해보면 시각적으로 알 수 있다. 요컨대 한글 한 음절과 한자 한 음절이 일대일로 대응되면서 한자가 개입될 여지가 충만해졌다. 이는 한국 한자음을 중국 한자음에 가깝게 고치고 싶다는 한글 창제자들의 욕망이 투영되어 음절합자식(音節合字式) 철자법을 낳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창제자의 의도 혹은 시각적 조화가 한자를 배워야한다는 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한자를 쉽게 베어낼 수 없게 된 까닭은 규명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한자 습득이 한자어 이해를 돕는 것은 한글전용이란 원칙과 별개로 얼마든지 병행해서 추구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가 한글 전용이라는 밥상을 차리고 싶어도 한자라는 반찬이 없으면 곤란할 정도로 한자어는 한국어에 깊게 침투해있다. 한자어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적정 수준의 한자 학습이 부당한 노동력 낭비이며 인권 유린(?)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종종 이야기되는 한자문화권이라는 개념은 그리 크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자는 한자문화권 밖으로 더 퍼져나갈 가능성이 높다. 영어 공부에 쏟는 정성의 일부만 한자 공부에 두면 좀 더 풍성한 언어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겸사겸사 동양고전도 많이 읽으면 금상첨화다. 여하간 내 지인들에게 한자 자격증 시험에 도전해볼 것을 권한다. 시험 본다는 핑계로라도 좀 배워두면 좋겠다. - [小鮮]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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