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태조 홍무제(洪武帝) 주원장이 세상을 떠난 후 황태손 주윤문이 즉위하여 건문제(建文帝)가 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주원장의 넷째 아들과 맞손자 사이에서 골육상쟁을 벌인다. 건문제와 연왕(燕王) 주체와의 전쟁을 역사는 정난(靖難)의 변이라 부른다. 북경 교외에 있는 명나라 황제의 집단 무덤인 명십삼릉(明十三陵)에 묻히지 않은 명나라 황제는 세 사람이다. 홍무제는 남경을 수도로 정하고 거기서 죽었기 때문에 남경에 있는 명효릉(明孝陵)에 묻혔고, 7대 경태제(景泰帝) 주기옥은 6대 정통제(正統帝) 주기진이 다시 8대 천순제(天順帝)로 복위하면서 명십삼릉이 아닌 금산에 묻히게 된다. 정통제/천순제는 자신의 제위를 빼앗았던 동생 경태제를 폐하고 왕으로 낮춘다. 그래서 명십삼릉에 안장하는 대신 경태릉(景泰陵)을 조성해 왕의 예로써 장사를 지내게 된다. 건문제는 영락제가 남경으로 쳐들어왔을 때 실종되어 생사가 밝혀지지 않아서 아예 무덤조차 없다. 참고로 명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17대 숭정제(崇禎帝) 주유검은 이자성의 반란군이 베이징으로 쳐들어오자 자금성 뒷산에서 목매어 죽는다. 불행 중 다행인지 청나라의 배려로 황제의 예로 명십삼릉에 묻히게 된다.


영락제는 건문제의 치세 4년을 역사에서 지우려고 무던 애쓴 모양이다. 실제로 명의 기록에는 건문제 시대가 누락되어 있다. 홍무제는 홍무 31년에 죽는데, 영락제가 등극한 이후 명의 문서에는 홍무가 35년 간 지속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는 영락제가 아버지 홍무제의 자리를 이어받은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이런 눈 가리고 아웅이 얼마나 통하겠는가. 여하간 정권을 장악한 영락제는 건문제의 옛 신하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다. 병부상서(兵部尙書) 철현(鐵鉉)은 영락제를 보고도 의연히 돌아서서 굽히지 않고 항변하였는데, 이에 격분한 영락제는 그의 귀와 코를 잘라서 삶은 후에 그의 입 속에 넣고는 맛이 어떤지를 물었다. 철현은 “충신과 효자의 고기가 어찌 맛이 없겠소!”라고 답했다고 한다. 중국사는 이처럼 민망할 정도로 잔인한 이야기들이 많다.^^; 영락제는 건문제 측근들을 무참히 제거했지만 방효유(方孝儒)는 스승이기도 하거니와 명성 높은 대학자이기에 회유하기 위해 즉위 조서를 짓도록 명했다. 영락제는 그가 자신의 편이 된다면 황위를 찬탈한 정통성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었을 것이다.


한사코 쓰지 않겠다는 방효유에게 영락제는 강제로라도 조서를 쓰게 할 작정으로 지필묵을 가져오게 한다. 방효유는 마침내 붓을 들어 무언가를 써 내려갔다. 종이에는 연적찬위(燕賊簒位, 연나라 도적이 황위를 찬탈하다)라는 네 글자만 쓰여 있었다. 영락제는 노발대발하며 “네가 아무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해도, 설마 네 죄가 구족(九族)에게까지 미쳐도 좋단 말이냐?”라고 말한다. 그러자 방효유는 “구족이 아니라 십족(十族)을 멸해도 할 수 없는 일이오!”라고 일갈한다. 영락제는 칼로 방효유의 입을 귀 밑까지 찢도록 하고 방효유의 본가, 외가, 처가 친척과 십족인 친구, 문하생을 잡아들여 방효유 앞에서 한 명씩 차례로 처형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방효유를 취보문 밖에서 책형에 처했다. 이 때 죽임을 당한 사람이 847명이라고도 하고, 873명이라고도 하는데 중국 역사상 가장 잔인한 형벌일 것이다. 역사가들이 영락제의 잔인함이 진시황을 능가했다고 한 것은 오히려 무딘 표현이다. 명나라판 수양대군인 영락제를 도무지 곱게 볼 수 없는 것은 내 옹졸함 때문인가.


흔히들 명나라 시대에는 송나라 때 볼 수 있었던 기개 있는 선비들이 적었다고 한다. 명나라의 숭정제는 이자성군이 몰려올 때 그를 지키려는 대신과 군사는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단지 내시 왕승은만이 옆에 남아 그가 나무에 목을 매는 최후를 함께 했다고 전한다. 이에 반해 송나라의 황혼은 누추하지 않았다. 사실 남송과 원나라의 전력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송은 몽골에 맞서 독자적으로 항전했다. 1276년 수도 항주가 함락되고 공제(恭帝)가 투항하여 사실상 멸망했음에도 마지막까지 송나라를 지키려는 필사적인 노력이 있었다. 문천상(文天祥), 육수부(陸秀夫), 장세걸(張世傑)을 일컫는 송말삼걸(宋末三傑)이 대표적이다. 바닷가인 애산에 임시로 망명정부를 세우고 버텼지만 1279년 마침내 몽골군에 함락된다. 육수부는 어린 황제를 등에 업고 물에 뛰어들었고, 송나라 부흥을 위해 베트남으로 향하던 장세걸은 태풍을 만나 침몰해 죽었다. 대도(북경)로 압송된 문천상은 그의 재능을 아낀 원 세조 쿠빌라이칸이 여러모로 구슬렸으나 끝내 거부하고 처형되었다. 문천상이 남긴 시의 마지막 두 구절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인생은 예로부터 누구나 한번 죽는 법, 일편단심을 남겨서 청사를 길이 빛내리라(人生自古誰無死 留取丹心照汗靑)”


천하의 쿠빌라이칸도 문천상의 정신을 빼앗지 못했다. 송나라의 최후를 장식한 선비들이 많았던 것은 문치주의라고 불릴 정도로 문인들을 우대했던 송 태조 조광윤의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광윤이 황위계승자에게 남긴 석각유훈(石刻遺訓)의 내용은 무척 간단했다. “송에 나라를 물려준 후주 왕실 시씨를 자자손손 돌봐줄 것, 황제의 행동에 반대하는 발언을 했다고 해서 사대부를 죽이지 말 것” 이 두 가지였으니 외우기도 쉬웠을 것이다. 이처럼 선비의 명예를 존중하고 간언을 미워하지 않은 정신이 바로 송나라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반면 영락제가 자행한 방효유의 멸족은 헌정질서나 대의명분을 지키기보다는 현실의 힘에 굴복하라는 압력이었다. 영락제의 만행은 대다수 지식인들의 마음을 얼어붙게 했다. 명나라의 마지막이 그토록 시시했던 것도 결국 자업자득인 셈이다.


몽골의 장수 장홍범(張弘範)이 장세걸에게 항복을 설득했을 때 장세걸은 “나는 항복하면 살고 또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의리상 마음을 변할 수 없다”며 거절한다. 제가 누릴 권세와 이득을 알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지켜낸 배짱과 용기를 헛된 개죽음으로 칭하고 싶지는 않다. 의병장 조헌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맹세하는 말에서 “오직 의(義)라는 한 글자만을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두라(唯一義字 終始念之)”고 역설했다. 700명의 의병으로 금산 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의병들과 함께 모두 전사한 마지막 결전에 앞서서도 “오늘은 다만 한 번 죽음이 있을 뿐이다. 죽고 삶이나 나아가고 물러섬에서 의(義)라는 한 글자에 부끄럽지 않게 하라(今日只有一死 死生進退 無愧義字)”고 말했다고 한다. 이기적인 본연을 거스르는 행동은 감동을 자아내게 마련이지만 의리의 사나이에도 등급은 있다. 방효유, 송말삼걸, 조헌, 사육신 같은 이들이 상급이라면 전두환의 충복으로 유명한 장세동 전 안기부장은 하급이라 할 만하다. 상하를 가름하는 기준은 간단하다. 지킬만한 것을 지켰는지 여부를 보면 된다. 참여정부에서 고위직을 맡으며 승승장구하던 사람이 한나라당 공천을 받기 위해 돌변한 허준영 전 경찰청장을 떠올리면 장세동에 대한 박절함이 조금 누그러지지만 결국 오십보백보다.^^;


이탈리아의 사회학자 파레토는 “엘리트란 인간의 모든 영역에서 가장 우수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로 정의하며, “엘리트의 자격은 시대에 따라 변하며 역사는 그들의 등장과 몰락으로 이뤄지지만 항상 엘리트가 지배한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고 주장했다. 여야가 바뀌고, 시민단체 인사들이 정책결정에 참여하고, 노조가 경영에 참가하고, 여성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결국 신진 엘리트일 뿐이라는 통찰에 매섭다. 이러한 엘리트 이론은 지배계급의 세습을 은폐하고,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나는 엘리트의 존재에 충분히 긍정적이다. 물론 의회 민주주의는 주권재민의 원칙을 바탕으로 시민의식을 갖춘 대중을 상정한다. 아울러 다원주의 사회에서 부문별로 다른 전문성을 갖춘 다채로운 엘리트가 성립 가능하다.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갖춘 엘리트, 의회 민주주의와 시민의식, 다원적 가치를 수용하는 문화가 얼마든지 조화될 수 있다고 본다. 엘리트의 위상과 역할, 분류에 대한 이견 속에서도 엘리트의 존재 자체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부러 줄이지 않는다면 엘리트가 차지하려는 부와 명예와 권력은 늘 희소해서 다투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자신이 향유하는 만큼 책무를 다하는 엘리트들이 많이 늘었으면 좋겠다.


나처럼 삶은 단 한 번뿐이라고 믿는 사람은 대충 살 생각도 없지만 기왕이면 호의호식하며 살고 싶다. 누군가 나 대신 손해배상과 손실보상을 해줄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내가 누리는 자유만큼 책임을 감내하며 열심히 착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처럼 내가 방효유의 처지에 놓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효유는 충절로 이름을 빛냈지만 그와 관계 맺은 숱한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었다. 방효유가 제 아무리 선비정신의 고갱이를 보여주고, 지식인의 절개를 드높였다고 한들 억울하게 죽은 목숨 앞에서는 거대한 죄책감이 들었을 것이다. 이런 고약한 사고실험으로 내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는 건 괴롭다. 천만다행으로 개명된 천지에 살고 있는지라 적어도 그런 무도한 경우는 염려하지 않아도 되니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러나 입술 꽉 깨물고 연적찬위(燕賊簒位)라고 써내려가고, 민폐를 끼치지 않으면서 지인들을 북돋워주는 사람이 되기란 여전히 어렵다. 그래도 지켜야할 것을 지키면서 삶의 보람을 찾는 의리 있는 녀석이 되어보도록 하자. 방효유의 고뇌를 품고, 문천상의 기상을 흉내 내는 것만으로도 조금 나은 내 자신이 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수 있으리라. 제대로 잘 살기란 참 까다롭다. - [小鮮]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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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민 2006.08.08 09:35 Address Modify/Delete Reply

    책 내셔도 되겠네요.. 정말 대단하세요,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켜 결론에 이르는 필력이란.... 신문칼럼은 님같은 분이 쓰셔야 하는데...

  2. 익구 2006.08.09 11:35 Address Modify/Delete Reply

    어릴 때 중국사를 읽다가 방효유 이야기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 다시금 떠올라 잡글을 함 써봤어요. 옛사람 중에서 특출한 경우를 뽑아서 오늘날의 사람을 구박하는 건 그리 대단한 재주는 아닌 거 같지만요. 그리고 전 제 게으름을 이겨내서 틈틈이 책을 보고 싶을 따름입니다. 칼럼은 선생님이 애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