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가 결국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러 갔다지만 나는 광복절을 기념하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향했다. 지난 7월에 생일 기념 회동으로 섭, 청원이와 함께 다녀온 지 한 달 만이다. 동빈, 홍익이와 함께 지난 7월에 봤던 평양에서 온 국보들 특별전을 다시금 보니 역시 두 번째라 그런지 그 때 놓쳤던 느낌들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북한은 1998년부터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도, 황하문명과 함께 '대동강문명'을 추가하여 이를 '세계 5대문명의 발상지'라고 주장하고 교육하고 있다고 한다. 셋이서 그걸 가지고 조금 구박을 했고, 국보, 준국보 지정을 너무 남발하는 게 아니냐며 좀 투덜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북한의 국보는 2006년 현재 1725점이고, 준국보는 658점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우리나라 지정문화재가 2006년 7월 31일 현재 국보 307점, 보물 1444점, 사적 458개인 점과 비교할 때 국보의 개수가 많이 차이가 난다. 북한도 종전에는 국보, 사전 등으로 구분하던 것을 문화유물보호법이 1994년 제정되고 1999년 개정되면서 국보유물, 준국보유물, 일반문화유물 등으로 구분하게 된 것을 보인다.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지정사항을 공포하지 않는 관계로 정확하게 알기가 어렵다. 그동안 남한 학계에서는 북한 국보가 주로 사적 중심으로 지정되어 동산 문화재는 얼마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았으니 이번 전시를 계기로 그 인식이 바뀌게 될 모양이다.


여하간 만약에 북한 관계자가 우리의 말을 들었다면 좀 상심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잖은 명품에는 마땅한 찬사를 보냈으며, 회화가 부족한 북한 문화유산의 형편에는 깊은 안타까움을 보냈다. 높이가 90cm에 달해 한반도에서 가장 큰 빗살무늬토기는 그 규모가 인상적이었고,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악기인 뼈피리는 모형으로 재현해보면 아직도 소리가 난다니 놀라웠다. 영명사터 돌사자는 매우 뭉개졌지만 몇 안 되는 고구려 돌조각이라는 점에서 희소성을 인정했다. 우리나라나 중국 등지에서 보이는 사자상은 대개 곱슬머리가 많아 그 이유가 궁금했다. 관음사 관음보살은 전신을 세밀하게 장식하고 맞뚫음기법으로 입체감을 높게 했다. 화강암보다 조각이 용이한 대리석이라고 하지만 돌을 조각했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정치(精緻)했다. 절에서 쓰는 북 모양의 종인 쇠북(金鼓)은 어떤 소리일지 궁금했다 징 소리가 날지 범종 소리가 날지 한번 들어보고 싶었다. 개성시에 있는 불일사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금동소탑 가운데 9층목탑으로 표상된 것에 눈길이 머물렀는데 이 유물 또한 황룡사 9층목탑 복원에 중요한 자료가 되리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함부로 말할 건 못되지만 황룡사 복원은 못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안 해서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시행착오 없이 이론적으로 완벽히 설정해서 지을 수 있다는 게 허상이 아닐까 싶다. 회화분야는 취약했지만 제법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이 보였다. 특히 김홍도의 선녀도는 애틋한 사연과 함께 기억에 남는다. 서왕모의 생일잔치에 늦게 참석했다하여 청봉산으로 쫓겨났다가 강원이라는 청년을 사모하게 되어 신선들만 먹을 수 있는 영지버섯을 그에게 먹여준 것이 영지선녀로 인해 인간이 영지버섯을 먹게 되었다니 프로메테우스가 떠올랐다.^^;


진귀한 유물 중에서도 단연 발길을 멈추는 곳은 고려 태조 왕건상이다. 북한에서도 개봉되지 않은 것이라 951년경 제작돼 개성 봉은사에 모셔진 왕건상은 왕실의 가장 신성한 상징물인 동시에 국가적 의례에서 중심적인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유교적 제례법과 맞지 않는다고 하여, 1429년(세종 11년) 태조 왕건의 현릉 옆에 묻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왕건은 수모를 당했지만 덕분에 소실 없이 후세에 전해서 빛을 발하게 되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다. 왕건상은 발굴 당시 몸을 비롯한 여러 곳에 금도금을 한 조각과 얇은 비단 천들이 붙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의복을 입은 상태로 사당 안에 모셔져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왕건상에 의복을 입혀야 할지 여부를 놓고 남북이 이견이 있었으나 동대문시장에서 75,000원에 산 옥빛 비단천으로 주요 부위를 가리는 것으로 가까스로 타협을 봤다. 북한은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를 신라가 아닌 고려라고 보는 만큼 고려를 개창한 왕건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서 벌어진 촌극으로 보인다. 왕건의 모습을 부처의 형상에 가깝게 묘사하려다 보니 왕건의 팔다리와 손가락이 곱고 미끈한 것이 전장을 누빈 장수 같아 보이지 않았다. 또 왕건상의 남근은 2cm에 지나지 않는데 이는 색욕을 멀리하라는 불교식 표현이라고 한다. 마음장상(馬陰藏相)이라고 하여 남근이 말의 생식기처럼 오므라들어 몸 안에 숨어 있는 형상을 말한다고 한다. 성기 쪽에 있던 양기(陽氣)가 머리 쪽으로 올라가면 이렇게 된다고 하니 요즘의 거물 숭배나 음경확대술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정액을 되돌려서 뇌를 보강한다는 환정보뇌(還精補腦)는 예나 지금이나 어렵다. 태조 황제께서는 남북이 갈라져 자신의 전시를 놓고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


기획특별전 관람을 마치고 찾아간 상설전시관 관람은 이번이 다섯 번째이기는 하지만 갈 때마다 새로 눈에 들어오는 문화유산들이 참 많다. 국민의 성금으로 되찾아 온 선무공신 김시민 교서를 보면서 해외로 반출된 문화유산을 찾으려면 얼마나 돈이 많이 들지 한탄을 했다. 홍익이는 일본에 있는 몽유도원도를 얼른 찾아와야 한다고 역설했고 예상되는 막대한 금액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국보급 문화재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보통 그 가치를 보험가로 추산하는데 국보 제83호 금동반가사유상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 문화교류전 출품 당시 500억원의 보험에 들어 최고를 기록하고 있으며, 국보 제78호 금동반가사유상이 98년 미국 메트로폴리턴박물관 전시 때 300억원짜리 보험에 가입한 바 있다. 그러나 문화교류 차원에서 보험가가 낮게 책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임을 감안하면 실제 가치는 헤아리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하다. 문화방송 느낌표 프로그램인 ‘위대한 유산 74434’가 말하고 있듯이 해외로 유출된 우리 문화재는 7만 5000여점으로 추산되고 있으니 망연자실할 뿐이다. 얼마 전 홍익이가 중국 동북지방을 여행 다녀와서 장군총에 받침돌 하나가 없어져서 그 부분이 붕괴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줄 때 마음이 아팠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습기가 차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는 생생한 증언에 가슴이 미어진다. 우리 국내법의 효력이 미치지 않는 해외 소재 문화재는 국보나 보물로 지정할 수 없다지만 적어도 체계화된 목록을 작성해서 끊임없이 환수 노력을 해보는 건 어떨까.


고려 묘지명(墓地銘) 기획특별전에서 최윤의 할아버지 묘지명과 기념촬영을 했다. 해주 최씨 선조이신 최윤의 할아버지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알려진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을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상정(詳定)은 골라 뽑았다는 뜻으로 고금의 예문을 모아 편찬한 책이니 좀 거칠게 말하면 가려뽑은 의례서로서 규정집, 법령집 같은 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가 명언명구 수집을 즐기는 건 어쩌면 조상님의 상정(詳定) 정신을 좀 이어받아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상정고금예문을 1234년(고종 21년)에 금속활자로 찍어냈다는 기록이 있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동여지도의 목판과 목판본을 볼 수 있는 작은 기획전에서 아름다운 장인정신을 만날 수 있었다. 대동여지도를 인쇄하기 위해 만든 목판 9장이 공개되었는데 대동여지도는 55~60장의 나무판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는 12장이 남아 있다고 한다. 어쩐지 함경도 지역의 목판만 집중적으로 전시되어 있기에 의아했는데 상당부분 소실된 것이었다. 대동여지도는 1861년 초간본이 발간된 이후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수정작업의 흔적을 보는 건 코끝이 시큰해지는 일이었다. 목판까지 직접 판각했다고 하니 고산자 선생 앞에서 감탄사를 아끼는 건 죄송스런 일이다. 인간의 꿈이란, 노력이란 참으로 숭고하구나 다시금 깨달았다. 신라실에서 아기자기한 신라 토용을 보며 동물모양의 토용은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찰흙 수업 교재로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적나라한 성애 장면을 교재로 쓰기는 좀 민망하니까.^^;


건성으로 지나치기 일쑤인 서예실에서 좀 시간을 두고 관람을 했다. 초서체 가운데 하나인 미친 듯이 흘려 쓴 광초(狂草)를 놓고 맨 정신에 이렇게 쓸 수 있는지 갑론을박했다.^^; 나중에 생의 막바지에 여유 있는 하직을 통해 시간을 확보하고 서예를 좀 배우고 싶다. 저무는 일만 남았을 때 추한 뒷모습을 남기지 않고 싶다. 우선 서예감상법부터 좀 배워둬야겠다. 회화실의 경우 주기적으로 교체를 하다 보니 새로운 것들이 눈에 띄었다. 아무래도 회화 보존의 특성상 오래 전시할 수 없으니 자주 바꿔주는 모양이다. 그런데 한 권의 책으로 된 단원 김홍도의 풍속도첩은 교체 전시를 쪽수만 바꾸면 된다며 박장대소했다. 여전히 회화는 내게는 미개척 분야지만 미술사학자 고 오주석 선생님의 저작에서 많은 가르침을 받은 건 행운이었다. 오 선생님은 우리 그림은 세로쓰기를 하던 습관에 맞게 오른쪽 위에서 시작하여 왼쪽 아래로 가며<↙> 그림을 그렸다고 강조하셨다. 가로쓰기에 익숙한 우리는 자꾸만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내려가며<↘> 그림을 보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 회화를 제대로 감상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또한 요란스러운 일본식 표구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그림을 침범하지 않는 은은한 우리 표구에 대한 예찬도 새록새록하다.


국보 제302호 진주 청곡사 괘불은 길이 10m, 폭 6.3m에 이르는 지라 정말 엄청났다. 괘불(掛佛)은 글자 그대로 '걸어 매다는 불화'를 말한다. 석가모니가 설법하는 장면인 영산회상도를 그린 이 괘불은 본존불인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양 옆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화면 가득히 배치했다.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걸개그림인데 이 때 야외에 설치하는 법단이 야단(野壇)이며, 괘불이 걸리는 날에는 절에 사람이 북적거렸기에 야단법석이란 말이 나온 건 이제 상식이 된 거 같다. 국립중앙박물관 측에서는 이 거대한 불화를 전시하면서 소책자를 발간했는데 중앙박물관에서 특정 유물 1점만을 대상으로 한 이런 도록 발간은 사상 처음인 것을 보인다. 대중적 인지도가 있는 문화유산을 선별해서 이런 소책자를 많이 발간했으면 좋겠다. 높아진 문화적 수요에 공급이 절실하다. 수요가 공급을 창출한다는 케인지언이 되어 본다. 불교회화실을 지나며 나는 또 고려불화의 90%가 외국 특히 일본에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광복절이라 보니 일본이 조금 더 미워졌다. 일전에 이건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가장 마음이 끌리는 유물로 꼽은 것이 반가사유상 전시실 가는 길목에 전시된 10세기 고려 철조불두(鐵彫佛頭)인데 나 또한 무척 좋아한다. 다정다감한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그간의 근심걱정이 가벼워지는 치유효과가 있는 것 같다.


독방을 쓰시는 국보 제78호 금동반가사유상의 미소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 앉아서 바라보니 은은한 미소가 더욱 그윽하게 다가왔다. 반가사유상은 오른쪽 발을 왼쪽 무릎에 걸치고(半跏), 오른쪽 손가락을 뺨에 살짝 대고 깊은 명상에 잠긴(思惟) 불상의 모습(像)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런 식의 사색과 고뇌는 사람의 몫이다. 모든 것을 다 아는 신이라면 이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반가사유상은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말미암아 가장 성스럽게 다가온다. 열반을 앞둔 부처님에게 앞으로 누구를 믿고 의지하냐며 제자들이 하소연했다. 부처님은 “그대들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아라”는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을 남겼다. 이 말씀처럼 인간은 한바탕 웃고 떠들다가도 결국 자기 자신과의 고독한 상념이 젖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동빈이가 연신 미소를 찬탄하니 안내하시는 분께서 국보 제83호에 비해 미소가 더 깊다며 맞장구를 쳐주셨다. 개인적으로 국보 제78호에 금박이 좀 더 남아 있었더라면 인기가 더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불상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열없는 짓이지만 우아하고 화려한 78호가 다보탑이라면 정갈하고 청순한 83호는 석가탑이 아닐까 싶다. 큰 맘 먹고 산 강우방 선생님의 <반가사유상> 도록을 다시금 펴봐야겠다.


청자실에서는 고려청자가 발색(發色)이 고르지 못했다는 단점이 있지만 역시 일품이라며 어지러울 정도로 뚫어져라 봤다. 분청사기실의 추상성 짙은 작품들은 현대미술에도 많은 영감을 줄 것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백자실에서 발견한 희준(犧尊, 소 문양의 술잔)과 상준(象尊, 코끼리 문양의 술잔)은 제기로 종묘나 문묘에서 행해지는 제사에서 사용했다고 하는데 익살스런 모양에 한참을 감상했다. 술을 담는 야외용 합인 주합(酒盒)도 인상적이었는데 위와 아래는 안주를 담거나 술잔으로 대용하고, 가운데는 술병인 매우 재미난 유물이다. mannerist 선배님께서는 문화적 가치를 특수성에서 찾아야지 보편성에 기대는 건 적어도 학적 영역에서는 그 근거를 대기가 점점 어려워진다고 지적하셨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우리 미술이 이룩한 것은 역사적으로 한국의 정치나 경제, 문학과 과학 등 다른 분야에 비해 세계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할만한 몇 안 되는 분야라고 보고 싶다. 자기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턱없이 낮은 것에 대한 반발심인지, 결국 촌스런 민족주의적 감수성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오늘도 마음의 양식을 과식했다. 기획특별전 공짜표를 선사해준 동빈이에게 각별한 고마움을 표한다. 8월 가기 전에 호림박물관 소장 국보전도 보러 가야겠다. 나는 내 것의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 [小鮮]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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