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公人)이라면

사회 2006. 8. 21. 01:30 |
이우근 서울중앙지법원장이 법원 내부통신망에 올린 ‘부패의 향기’라는 제목의 글이 화제다. 그는 최근 신임 헌법재판관으로 법조계 후배들이 지명되자 용퇴를 결심한 뒤 법조인의 자성을 촉구하는 글로 최근 법조 비리와 관련된 자신의 속내를 밝혔다. 내부통신망에 올린 글이라 원문을 볼 수 없어서 언론매체에서 보도된 조각들만 접할 수 있지만 대강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돈, 명예, 권력, 쾌락 따위의 달콤하고 나긋한 향기로 양심을 마비시키는 부패의 유혹은 차마 거부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힘으로 이성을 제압하고 도덕성을 무력화한다”

“부패는 악취가 아니라 향기를 풍기며 다가온다. 부패의 유혹 앞에는 장사가 없다. 명철한 지식인도, 시민운동가도, 근엄한 종교인이나 법조인마저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속적이고 습성화된 부패의 경향은 타락의 사슬로 영혼을 옭아매기에 자기 정화는 그토록 어려운 법이다”

“부패와 비리를 다스리는 법조인이 스스로 비리를 저지르거나 부패에 젖어드는 일은 여간 심각한 부조리가 아니다. 법조인이라면 시대의 아픔과 이웃의 괴로움을 온몸으로 함께 나누는 사랑의 소명의식, 그리고 투철한 자유의지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손바닥 뒤집듯 쉽게 이뤄지는 자기 정화는 없다. 치열한 자성을 통해 새로운 인격으로 태어나는 출산의 고통 없이 올곧은 자정은 불가능하다”


“셰익스피어는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을 준법정신이 투철한 모범시민으로 그렸다. 그러나 샤일록은 남의 곤궁함을 존중하지도,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 관대하지도 않았다. 그는 사랑을 알지 못했다. 남을 존중하고 타인의 자유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법조인이라면 남의 비리를 벌하면서 자신의 부패에 눈감을 리 없다”


문득 이상호 기자의 “정치권력은 한철이지만, 자본권력은 장구합니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요근래 정치권력에서 자본권력으로 무게의 중심추가 옮겨가고 있다고들 말한다. 배울 만큼 배웠다는 분들이, 똑똑하다는 소리 지겹게 들었을 분들이 돈 몇 푼에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는 게 참 민망하다. 이제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가느냐 하는 시금석은 자본권력으로부터의 초연함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자본권력의 유혹은 향기는 기본이고 거기다가 부드럽고 섬세하기까지 할 것이다. 자본권력은 지난날의 정치권력처럼 폭압적이지 않고 소비자의 이익을 염두에 둔다는 점에서 진보적이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별다른 견제를 받지 못하고, 그 폐해를 인지하지 못해 농노처럼 제 자유를 헌납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건 반동적이다.


정여립은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정해진 주인이 있겠는가?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닌가(天下公物豈有定主 何事非君)?”라는 말을 했다고 전한다. 혹자는 정여립이 우리 역사상 최초의 공화주의자라고 치켜세우기도 한다. 여하간 천하가 공물이라는 발언만큼은 무척 감명 깊다. 천하는 비록 공물이지만 내 것처럼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공인들이 더 늘어야 한다. “천하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천하를 맡길 만 하다(愛以身爲天下 若可託天下)”는 노자의 가르침도 곱씹어보자.


다산 정약용 선생은 목민심서에서 “자신의 재산인 사용(私用)을 절약하는 것은 사람마다 능히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공공의 재산인 공고(公庫)를 절약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공물을 사물처럼 여길 수 있어야만 어진 목민관이다(私用之節 夫人能之 公庫之節 民鮮能之 視公如私 斯賢牧也)”라고 말씀하신다. 장자는 “천하를 천하에 감춘다(藏天下於天下)”고 했다. 그만큼 감출 것 없이 떳떳하고, 정의롭고, 명쾌하다는 이야기다. 탐욕은 품을수록 커지고 권세는 누릴수록 더 보듬고 싶어진다지만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들였던 노력했던 지난날을 차분히 돌아보는 게 어떨까.


내가 고작 이 따위로 살라고 그렇게 뼈 빠지게 공부했는지 아느냐고 스스로에게 준엄하게 꾸짖어 본다면 달콤함과 향긋함에 몸과 마음을 함부로 팔지 않으리라. 우리가 공인(公人)이라고 기리는 건 단지 빼어난 재주와 명석한 머리만을 찬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능력이 자신만의 것이 아님을 아는 베푸는 마음가짐과 함께 이익을 만날 때 의로움을 생각하는 기품 있는 정신을 겸비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부귀영화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는 사람, 제 자신의 원칙을 저버리는 것을 죽음보다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우리를 위해 봉사하고, 우리를 대표하고, 우리를 다스린다면 얼마나 기쁠까. 물론 대다수 분들이 묵묵히 그 가시밭길을 가고 있음을 잘 알면서 괜히 해보는 앓는 소리다.^^; - [小鮮]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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