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公人)이라면

사회 2006.08.21 01:30 |
이우근 서울중앙지법원장이 법원 내부통신망에 올린 ‘부패의 향기’라는 제목의 글이 화제다. 그는 최근 신임 헌법재판관으로 법조계 후배들이 지명되자 용퇴를 결심한 뒤 법조인의 자성을 촉구하는 글로 최근 법조 비리와 관련된 자신의 속내를 밝혔다. 내부통신망에 올린 글이라 원문을 볼 수 없어서 언론매체에서 보도된 조각들만 접할 수 있지만 대강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돈, 명예, 권력, 쾌락 따위의 달콤하고 나긋한 향기로 양심을 마비시키는 부패의 유혹은 차마 거부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힘으로 이성을 제압하고 도덕성을 무력화한다”

“부패는 악취가 아니라 향기를 풍기며 다가온다. 부패의 유혹 앞에는 장사가 없다. 명철한 지식인도, 시민운동가도, 근엄한 종교인이나 법조인마저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속적이고 습성화된 부패의 경향은 타락의 사슬로 영혼을 옭아매기에 자기 정화는 그토록 어려운 법이다”

“부패와 비리를 다스리는 법조인이 스스로 비리를 저지르거나 부패에 젖어드는 일은 여간 심각한 부조리가 아니다. 법조인이라면 시대의 아픔과 이웃의 괴로움을 온몸으로 함께 나누는 사랑의 소명의식, 그리고 투철한 자유의지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손바닥 뒤집듯 쉽게 이뤄지는 자기 정화는 없다. 치열한 자성을 통해 새로운 인격으로 태어나는 출산의 고통 없이 올곧은 자정은 불가능하다”


“셰익스피어는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을 준법정신이 투철한 모범시민으로 그렸다. 그러나 샤일록은 남의 곤궁함을 존중하지도,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 관대하지도 않았다. 그는 사랑을 알지 못했다. 남을 존중하고 타인의 자유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법조인이라면 남의 비리를 벌하면서 자신의 부패에 눈감을 리 없다”


문득 이상호 기자의 “정치권력은 한철이지만, 자본권력은 장구합니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요근래 정치권력에서 자본권력으로 무게의 중심추가 옮겨가고 있다고들 말한다. 배울 만큼 배웠다는 분들이, 똑똑하다는 소리 지겹게 들었을 분들이 돈 몇 푼에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는 게 참 민망하다. 이제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가느냐 하는 시금석은 자본권력으로부터의 초연함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자본권력의 유혹은 향기는 기본이고 거기다가 부드럽고 섬세하기까지 할 것이다. 자본권력은 지난날의 정치권력처럼 폭압적이지 않고 소비자의 이익을 염두에 둔다는 점에서 진보적이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별다른 견제를 받지 못하고, 그 폐해를 인지하지 못해 농노처럼 제 자유를 헌납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건 반동적이다.


정여립은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정해진 주인이 있겠는가?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닌가(天下公物豈有定主 何事非君)?”라는 말을 했다고 전한다. 혹자는 정여립이 우리 역사상 최초의 공화주의자라고 치켜세우기도 한다. 여하간 천하가 공물이라는 발언만큼은 무척 감명 깊다. 천하는 비록 공물이지만 내 것처럼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공인들이 더 늘어야 한다. “천하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천하를 맡길 만 하다(愛以身爲天下 若可託天下)”는 노자의 가르침도 곱씹어보자.


다산 정약용 선생은 목민심서에서 “자신의 재산인 사용(私用)을 절약하는 것은 사람마다 능히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공공의 재산인 공고(公庫)를 절약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공물을 사물처럼 여길 수 있어야만 어진 목민관이다(私用之節 夫人能之 公庫之節 民鮮能之 視公如私 斯賢牧也)”라고 말씀하신다. 장자는 “천하를 천하에 감춘다(藏天下於天下)”고 했다. 그만큼 감출 것 없이 떳떳하고, 정의롭고, 명쾌하다는 이야기다. 탐욕은 품을수록 커지고 권세는 누릴수록 더 보듬고 싶어진다지만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들였던 노력했던 지난날을 차분히 돌아보는 게 어떨까.


내가 고작 이 따위로 살라고 그렇게 뼈 빠지게 공부했는지 아느냐고 스스로에게 준엄하게 꾸짖어 본다면 달콤함과 향긋함에 몸과 마음을 함부로 팔지 않으리라. 우리가 공인(公人)이라고 기리는 건 단지 빼어난 재주와 명석한 머리만을 찬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능력이 자신만의 것이 아님을 아는 베푸는 마음가짐과 함께 이익을 만날 때 의로움을 생각하는 기품 있는 정신을 겸비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부귀영화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는 사람, 제 자신의 원칙을 저버리는 것을 죽음보다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우리를 위해 봉사하고, 우리를 대표하고, 우리를 다스린다면 얼마나 기쁠까. 물론 대다수 분들이 묵묵히 그 가시밭길을 가고 있음을 잘 알면서 괜히 해보는 앓는 소리다.^^; - [小鮮]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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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annerist 2006.08.22 01:36 Address Modify/Delete Reply

    >>소비자의 이익을 염두에 둔다는 점에서 진보적

    이 상황은 안정적인 이윤이 확보될 때, 그리고 '소비자'들이 적당히 기름기 돌아 가수요를 소화할 여력이 있을 때만 가능한 상황임. 두루뭉실한 말은 고개를 끄덕이게 하지만 동시에 추악한 진실을 은폐하는 기능을 지님.

    동시에, 자본권력 역시 '폭압적'임. "대놓고"하지 않는다의 차이일 뿐임. 비근한 예로, 삼성 SDS에서 노조 조직하려 한 모 씨의 집안이 어떻게 결단났는지 뒷조사 해보기를 권함. 제대로 된 자본주의가 아니어서 그런다고 발론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한국아닌 다른곳의 자본가들이 '소비자의 이익'을 염두에 두어서 그런 개지랄 안 떠는 게 아님. 그딴 짓 하면 법 혹은 제도에 걸려 험한 꼴 볼 여지가 크므로 안하는 것이라 보는게 정확함.

    그런 점에서, 고전 인용에 신중을 기할 것을 충고함. 정확한 '고유대명사'와 '상황'을 제거하고 원어와 함께 가져다 붙이는 '옛 어른들의 말씀'은 마음에 청아한 향기를 품게 할 지는 모르지만 '좋은게 좋은'말로 정확한 상황 묘사를 흐트러뜨리기딱 좋음.

    돈 몇푼에 흐트러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돈 몇푼에 99%의 인간들이 흐트러지는 것 자체를 인정할 필요가 있음. 99%의 속물들에게 1%가 되기를 강요하는 것보다 뻘짓하는 99%가 엄한 생각 못하도록 정수리 위에 데모클리테스의 칼을 한 자루씩 매달아 놓는 게, '진보'라는 말에 조금이라도 더 가깝다 생각함.



    p. s. 정확함을 잃었을때, 아는 건 병이 됨.

  2. 익구 2006.08.22 17:03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제 잡글에 꼼꼼한 댓글을 달아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설령 제가 놓친 부분이 있다면 그건 죄다 제가 무식하기 때문이겠지요. 저는 기본적으로 자본권력은 정치권력보다 더 진화한 형태라고 봅니다. 저는 그 진화의 긍정적인 측면에 주안점을 두고 있어요. 상품시장과 정치시장이라고 거칠게 구분할 때 상품시장이 소비자의 욕구와 선호에 더 기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자본권력의 장점이라고 봅니다.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에서 이루지 못했던 일들을 자본권력이 성사시킨 예가 적잖다고 보고요. 적어도 자본권력이라면 여권 받겠다는 국민을 꼭두새벽부터 줄서게 하거나, 누구나 알아들어야 할 판결문에다가 가장 난해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식의 오류를 많이 줄일 수 있으리라 봅니다. 정치권력이 (여전한 위세를 떨치고 있긴 하지만) 오늘날의 처지로 전락한 것은 자업자득입니다. 경영행정이니 고위공무원단 제도니 어쩌니 하는 것도 다 스스로 불러들인 것이겠지요. 자본권력 ‘역시’ 폭압적이라기보다는 자본권력이 절대권력으로 부상하게 될 때 생기는 문제라고 봐야할 거 같아요. 민주적 권위를 시의적절하게 행사하는 정치권력을 생각해낼 수 있듯이, 사회적 후생을 증진시키는 자본권력 또한 얼마든지 구현할 수 있습니다. 요는 절대권력의 부정적 속성을 자본권력이 가지지 않게 하는 게 중요하다는 거죠.

    물론 몇몇 대기업들의 횡포는 자본권력의 장점을 상당 부분 상쇄시킵니다. 가령 일전에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이 강정구 교수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의 취업에 불이익을 주겠다는 요지의 말을 한 건 굉장히 섬뜩했지요.ㅡ.ㅡ 아울러 형 말씀대로 법과 제도에 의한 통제가 필요합니다. 저는 다만 몇몇 대기업이 초법적 존재로서 군림하는 게 당연시되는 의식이 확산되는 것이 염려스러워요. 저는 이 땅에 제대로 된 자본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했다고 발뺌하기보다는 우리가 만들어낸 자본주의 사회가 여기까지라는 인식이 더 강해요. 그렇다고 포기하자는 말이 아니라 개선의 여지가 충만한 만큼 그 한계를 좀 더 넓히는 데 주력해야겠고요. 몇몇 대기업에 압도적인 힘이 주어지는 자본권력밖에 만들지 못한 것도 특별히 누굴 탓할 것도 없다고 봅니다. “자본권력은 에버랜드 무료 입장권으로, 명품 핸드백과 같은 부드러운 편의성으로 다가왔다”는 이상호 기자의 말이 그래서 더 두렵네요.

    저는 돈 몇 푼에 흐트러지지 않는 분들이 1% 정도 될 거라고 생각지는 않아요. 그보다 더 될 거라고 봐요. 특히 공인의 경우 그 비율은 응당 더 높아야 한다고 봅니다. 망가지는 사람들을 주로 보다 보니 얼마 안 된다고 여겨지는 거 같아요. 물론 그래봤자 안 망가지는 사람이 소수파일지는 모르겠지만요. 형께서는 극소수라는 의미로 1%라고 하신 것이겠지만... 그런 분들이 진짜로 1%라면 5%로 늘길 바라고, 5%라면 10%로 늘길 바라고, 10%라면 20%로 늘길 바라요. 그렇게 의미 있는 숫자로 늘려나가는 것도 근원적인 방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형께서 다소 위악적으로 99%의 속물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별로 관심도 없고 바쁘다는 이유로 부패와 비리 문제에 별다른 견해가 없는 분들을 속물이라고 단정하기는 힘들 거 같아요. 진중권 선생님이 “관심이 없는 사람을 다 친북으로 몰아버린다면 대한민국 98% 이상은 다 친북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신 말씀처럼 부러 속물의 개체수를 늘릴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문득 홍세화 선생님께서 한국 사회가 ‘나눔’을 북돋우면서 ‘분배’에 인색하다고 질타하신 기억이 나네요. 저 또한 개인의 선의나 의식 개혁보다 사회전체적 합의나 제도 개선을 통한 문제 해결의 중요성에 동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안에서 대다수 속물 여러분들의 심성이나 태도 문제를 제도를 통해 규제하기는 좀 어려울 듯해요. 기껏해야 불법, 탈법을 통해 이득을 도모한 경우에나 처벌하고 말겠죠. 아니, 이 마저만 잘 해낸다면 여한이 없겠어요.^^; 아무래도 진보라고 통칭되는 행위는 의식보다는 제도 개혁을 통해 실현되는 경우가 많은 거 같아요. 일전에 형께서 ‘자본론’은 철저한 시스템 비판이라고 말씀하셨던 것도 생각나고요. 하지만 자꾸 자신이 없어져요. 가령 소선구제와 단순다수대표제의 폐해가 드러나고 있다고 해서 선거 제도를 좀 바꾼다고 가정해봅니다. 과연 진보정당 진출이 활발해져서 보수독점의 정치지형이 좀 완화될 수 있을지, 첨예한 지역갈등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지 흐릿해요(일단 맡겨봐야 안다는 의미에서라도 선거 제도 개혁은 필요합니다). 요즘 부쩍 마음의 문제, 인심의 문제를 자주 떠올리게 됩니다. 저는 인간 개조를 믿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지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 연민의 확산은 진보에 보탬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 뿐이에요.

    제 글은 어디까지나 공인들이 누리는 자유와 권리만큼의 책임과 의무를 다해달라는 상투적인 소재에 불과한데 논쟁거리가 좀 있다니 반갑네요. 여하간 저는 여전히 공인들에게 (어떤 형식의) 권력과 유혹에 자기 영혼을 함부로 팔지 말라는 제 볼멘소리가 유의미하다고 봅니다. 끝으로 제가 선현의 말을 글의 맥락에 좀 맞다 싶으면 가열차게 인용하는 까닭은 제 오랜 습관이니 너그러이 생각해주세요. 은연 중에 옛 사람들의 문집이나 상소 스타일의 글을 흉내 내고 있지 뭐예요.^^; 권위에의 호소를 꾀한다기보다 이런 사안에서 옛 사람들 혹은 오늘의 위인들은 어떤 해법을 제시했는가를 곱씹는 재미가 쏠쏠해서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의도보다는 “좋은 걸 좀 배워보자”는 의도가 더 강한 것도 헤아려주세요. 아참 그리고 기왕이면 출전이나 원문을 붙이려고 애쓰는 건 제 결벽증이나 가엾게 여겨주세요. 우리 선조들의 경우 데이터베이스화가 잘 된 몇몇 사서나 문집 정도를 제외하고는 원문 찾는 것도 어렵다고요. 푸하하

    추신 - “데모클리테스의 칼”이 뭔지 잘 모르겠어요.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건가요? 취약한 분야인지라...^^;

  3. 서민 2006.08.24 09:57 Address Modify/Delete Reply

    으음...전 고전을 통 모르는지라 인용조차 못하는데.... 부럽습니다. 정여립은 그냥 이름만 알았는데, 저런 말도 했군요.

  4. 익구 2006.08.24 18:42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정여립의 이 말은 조선왕조실록(선조수정실록 23권 22년 10월 1일)과 기축기사(己丑記事)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정여립이 봉건왕조시대에 동성 내의 왕위계승이 절대적인 원칙이 아니라는 뜻으로 천하는 공물이라는 표현을 썼다면... 저는 그냥 공인들에게 공인의식이랄까, 공익을 사유화해서는 안 된다는 정도의 의미로 전후맥락 생략하고 인용해봤어요. 어쩌면 공인의식처럼 공물의식(?)도 꽤 필요한 덕목이 될 수 있을 거 같아서요.^-^

  5. mannerist 2006.08.27 13:41 Address Modify/Delete Reply

    상기 글의 문제점

    1. 충분한 논거 없이 극단적으로 정치 권력이 자본 권력에 열등하다는 점을 강조했음. 정확히 따지면 정치 권력의 단점을 자본 권력의 장점과 대비시킨것으로, 서로 다른 방면에 장점과 단점을 지닌 두 가지 - 본인 생각으로는 두 가지를 나누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정치 방면의 상대적 무능을 강조하여 자본 방면의 전횡을 은폐하려는 시도에 낚였다고 생각함. '권력'이라 지칭히자 읺고 '방면'이라고 한 것에 주목 - 를 정밀한 검증 과정 없이 단순비교시킨데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 잊어버린 모양인데, 민주주의 체제의 정치권력 역시 '자신의 권역 안에 든 다수의 권익 보호'가 그 근본 바탕임. 자본권력의 소비자의 이익 염두를 장점으로 꼽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소비자란 '구매력을 지닌'이라는 제한을 두었다는 점에서 아무 제한 없이 '1인 1표'로 대표되는 모든 이들의 주권을 상정하고 이를 보호할 것을 그 기초로 삼는 민주주의 체제의 정치 권력보다 '제한'을 두었다는 점에서 퇴보하였다고 지적한다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궁금함.

    2. 난 이우근씨의 저 글이 재미있는 것이, 권력 있고 명예 있는 사람들이 거의 처음으로 '쇳가루의 유혹'이 얼마나 강한 건지 까놓고 말한 데 있다고 봄. 공직 윤리 백만번 외쳐봐야 별 소용 없다고 생각함. 지독히 경제/경영쪽으로, '합리적인 인간'을 기초로 이야기해보자면 이야기해서 뇌물 받아쳐먹고 까발려졌을때 감수할 risk보다 뇌물 받았을때의 편익이 더 큰 지금 상태에서는 저 사람들의 윤리 강화에 백번천번 외쳐봤자 아무 소용 없음. 여기에 대고 "공인이라면!!"일갈하는 것은 허리 꼿꼿한 사대부들의 서슬퍼런 외침으로 시원하고 통쾌한 느낌이 있긴 하지만 현실적 효용은 제로에 가까움. 구한말 저 시대 파악 못하는 사대부들이 결국 조선과 대한제국에 어떤 작용을 했는지 그닥 주어섬길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함. 문제는 개인 윤리의 각성이 아니라 까만 돈 받으면 인생 조져버리는 시스템 구축이 필요함.

    3. 데모클리테스의 칼 - 어딘가의 왕 데모클리테스의 의자 위에는 그의 정수리를 겨냥하여 가느다란 실에 매달린 칼 한 자루가 데롱데롱 붙어있다고 함. 언제 끊어질지도 모르는. 안정적인 것처럼 보이는 삶에서도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삶의 위험에 항상 긴장을 늦추지 말고 자기 자신을 예민하게 다질 필요가 있음을 지칭함. 그런 검은 유혹의 그림자만 비쳐도 그 가느다란 실이 툭. 끊어져버릴 정도는 되야 한다 생각함.

    4. 다시 한 번. 저기 서민님의 감탄에서도 알 수 있듯, 대부분 익구공의 글에서 나타나는 "고전 인용"은 상기 글에서 나타나는 기본적 인식의 문제점을 가리우고 '야 이양반 대단히 유식하구나. 이런 양반이 하는 말이라면 맞겠지'로 그다지 근거가 튼실하지 못한 찬사만을 가져다 붙이기에 딱 좋음. 개인윤리 각성이 절대로 해결책이 될 수 없는 상황과 시대에 이백년 전의 이야기를 근사한 문구만 가져다 붙이는 것은 겉멋 부리는 데 지나지 않다고 생각함.

  6. 익구 2006.08.27 17:55 Address Modify/Delete Reply

    1. 제 생각에도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의 구분이 적절한 대립축으로 보이지는 않아요. 다만 이우근님이나 이상호님의 글에서 자본권력을 경계하려는 노력을 읽고 그 방면으로 생각해본 것이죠. 어쩌다가 보니 그런 구분을 해버렸지만 이것도 제 거칢의 소산이겠지요. 차라리 공공영역과 민간영역 등으로 가름해보면 어떨까 싶네요. 제 표현이 부족해서 그렇지만 저는 공공영역의 단점을 보완하는 민간영역의 장점이 부각되고 있는 요즘의 상황이 그리 부정적으로 볼 것은 없다는 정도의 입장이지요. 저는 앞서 말씀 드렸듯이 어떤 유형의 권력이든 그것이 절대화되었을 때의 폐해를 경계하자에 방점을 두고 있을 따름입니다. 아참 그리고 ‘구매력을 지닌’ 소비자라는 제한을 말씀하셨는데 그 구매력에는 잠재적 구매력도 얼마든지 포함될 수 있을 거 같아요. 설령 그것이 포함되지 않더라도 시장세분화를 통한 소비자 욕구 충족을 가진 자들만의 잔치라며 퇴보라고 볼 것까지는 없을 거 같아요. 아울러 민주주의가 1표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정치적 의사결정에서 일반 시민 참여가 여전히 어렵고 까다롭다는 점에서 제한 없는 나은 양태라고 하는 것도 신중한 입장입니다. 또 1인 1표제라 제한이 없다는 점을 충분히 긍정적으로 보더라도, 이념과 정책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은 한국 정당정치의 낙후성은 기권층과 정치 무관심층을 양산함으로써 다른 의미의 ‘제한’을 가하고 있다고 지적해볼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1인 1표제’와 ‘1원(1불) 1표제’ 가운데 1인 1표제의 우월성을 철석같이 믿고 자라온 저이지만 이제 그 믿음이 심대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아 정말 저는 무지 많이 회의하는 의회민주주의자가 되고 있어요. 꺼이꺼이^^;

    2. 까만 돈 받으면 인생이 회복불가능할 정도의 시스템을 얼마나 구축할 수 있을지 저는 좀 회의적입니다. 물론 늘상 보는 솜방망이 처벌이 아닌 충분히 위협적인 처벌도 필요하지만요. 개인적으로 부정하게 치부한 건 반드시 환수하는 강한 추징금 제도를 희망하고 있고요. 그렇다면 리스크가 편익을 거의 상쇄시켜버리겠죠.^^; 저는 이미 있는 법조문의 실질적인 적용을 바랄 뿐 민법과 형법, 공정거래법 등을 부러 강화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어디까지나 지은 만큼의 죄값만 치르면 되겠지요). 흔히들 공중도덕에 대한 엄한 처벌로 유명한 싱가포르의 사례가 이상적인 모델이라고 보지는 않거든요. 시스템이라는 용어 정의가 명확히 되지 않아서 발생하는 문제 같지만 시스템이 제도적 측면과 동의어로 쓰이는 것인지 다소 애매하네요. 좀 더 넓은 의미로 의식적 측면을 포함한다면 다시 논의는 원점으로 돌아가버리겠죠. 제도 측면과 의식 측면을 골고루 살피자 뭐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여하간 시스템에 의식 측면이 포함된다면 그것 또한 유의미한 해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지역감정이 제도로 손쉽게 해결이 될까요? 낮은 계급을 천시하는 문화가 법으로 누그러뜨릴 수 있을까요? 수해 골프를 치고도 죄책감이 없는 걸 수해 때 골프를 못 치게 하는 법제화로 근절이 될까요? 가령 구태와 비리를 일삼던 정치인들이 보란 듯이 다시 금배지를 다는 광경을 자주 목도하고, 대기업의 잘못된 관행을 지적해도 경제도 어려운데 괜한 시비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문제가 복합적인 만큼 해법도 다종다양하게 추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인이라면!”이는 일갈이 별무신통이라도 다른 방안들과 곁들여 추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우근님 같은 분이 조금 더 늘어나고, 기왕이면 은퇴할 때보다 현역시절에 그런 행동을 보여주는 사람이 늘어나는 건 시스템의 보조만큼이나 개인 윤리의 각성이 주요한 동인이 될 거라고 봅니다.

    3.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다고 해서 집에 있는 책을 찾아보다가 서양고사성어라는 책에서 다모클레스의 칼이라는 글을 찾았습니다.^-^ 다모클레스(Damocles)의 머리 위에 매달려 있는 칼을 놓고 형께서는 유혹의 그림자만 비쳐도 실이 툭 끊어지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해석하신 거 같네요. 하지만 저는 그 칼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이나 내면에 품고 있는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형 말씀대로 “항상 긴장을 늦추지 말고 자기 자신을 예민하게 다질 필요”가 있으니까요.

    4. 고전 인용이 겉멋이라고 보신다면 좀 억울해요.^^; 물론 전고(典故)가 잦은 글쓰기가 권위에의 호소 같고 형 말씀대로 근사한 분위기로 문제의 본질을 흐릴 수 있겠죠. 하지만 포스트모던 시대에 저자는 편집자에 불과할 수 있다는 점에 동감한다는 강준만 선생님의 말씀처럼 저도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과연 자기 이야기라고 하는 것 중에 자신의 창조적 상상력이 얼마만큼 발휘될 수 있는지 저는 자신이 없어요. 저는 지식을 생산해내는 학자도 아니니 만큼 남들이 했던 이야기를 부지런히 수입해서 재조합하기도 벅차거든요.^^; 엄밀한 학술적 영역이 아닌, 살아가는 태도나 마음가짐에 대한 글이라면야 얼마든지 무수히 많은 말씀과 사례들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다만 글쓰기에 있어 중요한 것이 논리성과 적합성이라면... 제가 개인의 취미나 스타일에 집착한 나머지 그것을 훼손할 수 있다는 염려는 고맙게 받아들일게요. 겉멋에 귀천이 있을 거 같지는 않지만 고전 인용 같은 겉멋이라면 어느 정도 권장해도 무방하다는 게 제 솔직한 심정이에요. 담백함이 지나쳐 말라 비틀어져 가는 세상에 적절한 수준의 지적 허영이 순기능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