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904
약자와 소수자는 곧잘 혼용되기도 하지만, 수적으로는 다수이면서도 의회대표성 등 대표성에서 소외되어 그 의사가 잘 대변되지 못하는 ‘약자’와 수적으로도 소수인 ‘소수자’로 구분되는 경우가 더 많다. 우리 사회의 여성과 장애인들은 각각 ‘약자’와 ‘소수자’의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법률가들은 원래 이 약자나 소수자와 친해야 한다.

우선 입법, 사법, 행정부의 삼부 중 주로 법률가들로 이루어진 사법부의 존립이유가 바로 이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 보호에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입법부나 행정부와 같이 그 구성과 존립이 다수국민의 지지 획득 여부에 달려있는 기관을 다수파기관이라 부른다. 입법부의 국회의원이나 행정부의 대통령은 선거에서 재선되기 위해 항상 다수국민이 무엇을 원하는가에 신경써야 한다. 그러나 사법부는 삼부 중 유일하게 ‘선거’를 치르지 않고 ‘임명’되는 비다수파기관이다. 따라서 다수국민의 의사에 신경 쓸 필요가 없고, 오히려 다수국민의 목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 소수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잘 조직화되지도 대표되지도 못하는 약자의 이익을 판결을 통해 획기적으로 구현해 나갈 수 있는 태생적 장점을 가진다.(하략)

- 임지봉 교수(서강대 법학과), [목요일언]약자 및 소수자의 법률가, 법률신문 2006.09.01

청와대가 전효숙 헌법재판소장을 내정하면서 “사회적 약자 보호라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할 적임자”라고 설명한 것에 8월 17일자 중앙일보 사설은 “소수자와 약자를 배려하되 우리 사회 다수의 편에 서는 균형감각을 갖춘 인물”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간 우리 법원이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한 모습을 보여준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거 같다. 여전히 정치인, 기업인들에게는 관대하고 흐릿하면서도 낮은 계층에 있는 사람에게는 엄격하고 또렷했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품을 수 있는 강점을 좀 더 긍정적으로 발현했으면 좋겠다.

아울러 앞으로 강자와 약자의 구도보다는 승자와 패자의 구도가 좀 더 진일보된 사회라고 생각한다. 강약보다 승패로 가름하는 세상은 조금은 더 기회적 평등이 확충되고, 결과적 불평등도 절제되는 세상이다. 약자와 소수자를 보호한다고 앵무새처럼 외치기보다는 선의의 경쟁을 통해 승자에게 인센티브를 주고, 패자에게는 부활전의 여지를 남겨 두는 넉넉함을 갖춰야 한다. 약자가 패자가 되고, 패자가 다시 약자가 되는 악순환을 끊어내는 건 패자 문제를 어떻게 합리적으로 조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물론 어려운 문제지만 이런 고민들이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그나마 덜 아프게 맞이할 수 있는 방책이 아닐까 싶다.


060905
전시 작전통제권(전작권) 환수를 반대하는 지식인 700여명의 공동선언이 9월 5일 오전에 발표되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 이후 지식인들이 대거 참여해 사회적 현안에 대해 공동선언문을 발표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놀라운 일 이전에 민망한 일이다. 물론 지식인들의 공동선언이 1960년 4월25일에는 서울대 교수회관에 모인 각 대학교수들이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펼침막을 앞세워야 할 의무는 없다. 그리고 지식인들의 선언이 반드시 진보나 개혁의 목소리일 필요도 없다. 보수적인 교수 사회의 풍토에 걸맞게 보수적 목소리가 더 많이 표출되는 것이 확률적으로도 자연스런 일이다. 그 자연스러움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부러 백안시할 것도 없다.

하지만 요근래 자칭 원로들이 이런저런 사회적 이슈에 개입하는 모습은 대개 아름답지 못했다. 최근에 전작권 환수를 가열차게 반대하던 군 원로들의 면면이 그리 떳떳하지 못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이야기다. 이제 누군가에게 절실한 가르침을 주던 스승들마저 그 지적 권위와 도덕적 매력을 조금 덜어내려는 모습이 안타깝다(개인적으로 많은 가르침을 받았던 스승들도 있어서 이 선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혹 수백 명의 지식인들 가운데 기자회견 주도자의 친분 때문에 별 다른 고민 없이 자신의 이름을 내어준 경우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식인은 자신의 이름을 여기저기 함부로 팔아서는 곤란하다. 과거의 언행들은 지식인들에게 영원한 차꼬가 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안보 문제를 정치 문제화하고 있다는 우려에 충분히 동감한다. 그러나 전작권 문제가 너무 정치화되어 버렸다면 지식인들이 나서서 섬세한 논의를 주도해야하는 게 아닐까. “전시 작전통제권 단독 행사 추진을 통해 대북전쟁 억지력의 확실한 근간인 한미연합사 체제를 해체하는 것은 안보 악화와 함께 미국과 일본에 대한 군사적 종속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정도의 이야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적어도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혁개방 정책으로 나와 남북 간의 평화체제 구축의지를 분명히 할 때”가 좋다는 걸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라 그걸 해내가는 방안을 궁리하고 있지 않은가. 분단체제를 극복해야 한다는 민족사적 과제를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짝 답답하다.

지식인이 지식인이라고 존경받는 이유는 그 압도적 지적 능력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와 더불어 삶의 태도도 지식인을 재는 중요한 잣대다. 슬프게도 우리는 그 잣대를 좀 적용하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지식인들이 너무 많았다. 전작권 문제에 목소리를 내실 정도의 열성으로 그 옛날 후안무치하던 일당들에게 죽비소리를 내렸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근자에 수백 명의 지식인들이 비장한 결심으로 선언문을 낭독했던 적이 없었는데 왜 유독 전작권 문제에 이 분들의 안테나가 격렬하게 반응했을까. 앞으로도 우리 사회에 산적한 현안들을 그 영특한 안테나로 잘 감지해주시기 바란다. 지식인의 권위는 스스로 세우는 것이니 말이다.

율곡 선생이 선조에게 바친 응지논사소(應旨論事疏) 한 구절을 음미해본다. 선비는 밉살맞지만 그 충정은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우리네 지식인들의 입바른 소리에 귀가 따갑고 입맛이 쓰더라도 내 삶은 보다 윤택해질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상정(常情)으로 말하자면, 선비란 자는 진실로 얄미운 자입니다. 다스림을 논하라면 멀리 당(唐), 우(虞)의 고사(요순시대)를 인용하고, 임금에게 간하라면 어려운 일로 책임을 추궁하며, 벼슬로 얽어매도 머무르지 않고, 총애를 하여도 즐기지 않으며, 오직 자신의 뜻대로만 행하고자 하니 본래 쓰기 어려운 자들입니다. 또 그들 가운데에는 혹은 과격한 자도 있고 혹은 세상일에 어두운 자도 있고 또 명성을 좇는 자들도 그 대열 속에 섞여 있으니, 어찌 임금들이 미워할 만한 대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夫以世俗常情言之。則儒者。固可惡也。論治則遠引唐虞。諫君則責以難事。縻之不留。寵之不樂。惟在於欲行其志焉。固是難用。而其閒或有過激者。或有迂闊者。亦有好名者或廁乎其列。豈非世主之所可惡者乎
-『栗谷先生全書』 卷之六, 應旨論事疏


060906
실례가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오죽 감동 받았으면 같은 내무실 동기들에게 익구형의 편지를 돌려 읽게 했겠습니까.^^; 다들 진심으로 감동하며 형이 써주신 『맹자』의 글귀를 가슴 속에 새기고는 훈련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이제 막 이등병이 된 후배에게서 편지가 왔다. 정말 내 편지를 돌려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편지를 고리타분한 이야기로 팽개치지 않고 아껴줘서 고맙다. 간만에 육필로 꾹꾹 눌러쓴 편지의 『맹자』 한 구절을 다음과 같다.

하늘이 장차 어떤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려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을 괴롭히고, 그의 몸을 수고롭게 하며 그의 배를 굶주리게 만들고, 그의 생활을 궁핍하게 만들어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뜻대로 되지 않게 흔들고 어지럽게 한다. 이는 그의 마음을 분발하게 만들고 참을성을 기르게 해 지금까지 할 수 없던 일도 해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勞其心志 苦其筋骨 餓其體膚 窮乏其身 行拂亂其所爲 所以動心忍性 增益其所不能


시련을 통해 심성을 단련시킨다(動心忍性)는 말은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이다. 이건 누구보다도 내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행정법 책을 뒤적이다가 내 무식에 섬뜩해서 정신이 번쩍 들 때 그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다. 얼마나 괴롭힘을 당하고, 굶주리고, 궁핍하고, 흔들리고 어지럽힐지 모르겠으나 조금씩 나아진다는 믿음은 버리지 말자.


060907
어제 공인회계사(CPA) 합격자 발표가 났다. 아는 후배 하나가 붙었다며 환희에 찬 문자를 보내왔다. 나는 2차 시험에 합격해도 3차 면접이 있는지 알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라고 했는데 알고 보니 CPA는 면접이 없는 관계로 최종 합격발표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달콤한 축하 인사를 건넬 걸 그랬다.^^;

고시 공부는 공휴일궤(功虧一簣)라는 말을 늘 의식해야 하는 거 같다.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 산을 높이 쌓지 못했다는 뜻으로, 힘들게 벌인 일을 마지막까지 견지하지 못해서 실패했다는 말이다. 『서경』에 "높이가 아홉 길이나 되는 산을 쌓다가 마지막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 다 쌓지 못하고 실패했다(爲山九仞 功虧一簣)"라는 말이나, 『논어』에서 "비유하자면 산을 쌓는데 한 삼태기가 모자라 이루지 못했다(譬如爲山, 未成一簣)"라는 구절이 늘 고시생을 괴롭고 두렵게 만든다.

그래도 아홉 길이나 되는 성과물이라도 남겼으면 위안이라도 삼아볼 수 있겠지만 맹자는 더 무시무시한 말씀을 하신다. "뜻 있는 일을 하는 것은 마치 우물을 파는 것과 같다. 우물을 아홉 길이나 팠어도 샘에 이르지 못하고 그만두면 그것은 우물을 버리는 일이다(有爲者辟若掘井, 掘井而不及泉, 猶爲棄井也)"라니 조금 지나친 말씀 같다. 우물에 대한 비유보다는 산에 대한 비유가 좀 더 인간적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극초보 고시생 생활을 하다 보니 조바심이 적절한 수준에서 관리되지 않고 너무 증폭된다. 간단한 정보 검색을 해봐도 공부할 양이 참 많다는 것을 느낀다. 이걸 다 언제 익혀 자유자재로 구사할까 염려스럽다. 나는 세속과 떨어지기 힘든 인간이라 고시 생활이 다소 불리하다고 자평하고 있다. 우등생은 아니었고 그저 제 때 수업이나 챙겨듣는 모범생에 불과한 내 한계가 얼마나 드러날지도 궁금하다. 그러나 논술식 서술형 문제는 그래도 내가 자신 있어 하는 분야다. 통합력, 분석력, 정리력을 동원한 글쓰기를 배워보고 싶다.

더군다나 CPA처럼 내가 자신 없는 과목들만 있는 것도 아니며, 사법고시처럼 시험과목이 많은 것도 아니며, 외무고시나 입법고시처럼 사람을 무지 조금 뽑아 머리털을 쥐어 뜯게 하는 시험도 아니지 않은가. 내가 대학원 진학을 포기한 것은 학문을 할 자신과 역량이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문의 꿈을 포기한 마당에 제 아무리 까다로운 시험이라고 하더라도 못 이겨낼 건 없으리라.


* 簣 - (竹+貴)

060908
최형사(이하 최): 문목사... 당신은 내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소. 당신은 왜 이렇게까지 힘든 길을 걸어가는 것이오.
문목사(이하 문): 허허... 별거 있나? 올바르게 살려는 것이지...
최: ......
문: 내가 아는 것... 내가 올바르다고 믿고 있는 것. 그것을 실천하려는 것이지.
최: ......
문: 이 땅에서 태어나서, 그저... 내 아는 만큼 올바르게 살려는 것이지.
최: 그저... 착하게 살면 되는 거 아니겠소... 그게 올바른 게 아니오... 당신이 목사면... 목사답게... 착하게 살면 되는 것 아니겠소...
문: 허허... 착하게 사는 거 좋지... 그런데... 착하게 사는 거랑... 올바르게 사는 거랑은 다른 것 같아... 남들이 하자는대로... 그게 틀린 것 같아도... 그저 반대하지 않고... 하자는 대로 하면 착하다는 말을 듣게 되지...
착하게 사는 것은 생각보다 쉽네... 올바르게 사는 것이 어렵지...


강풀의 만화 『26년』을 볼 때마다 마음이 짠하다. 이럴 때만 감성지수(EQ)가 이럴 때만 높아지는 거 같아서 민망하다. 문익환 목사님은 착하게 사는 게 쉽고 올바르게 사는 것이 어렵다고 말씀하신다. 한참을 고개를 끄덕인다. 아울러 "올바르게 사는 것을 애초에 그 가능성마저 빼앗겨버린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고 외치던 곽진배의 울분에 찬 목소리도 많은 공감이 간다. 올바르게 살 여지를 좀 더 늘려나가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1999년 3월 14일 민주화 운동가 계훈제 선생님의 부고를 TV뉴스를 통해 보고 어린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저렇게 야위고 가냘퍼 보이는 사람이 이런 개명천지에도 투병과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니 너무 안타까웠다. 정치적 시비나 이념적 차이를 떠나 일평생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한 사람의 그 처연함과 쓸쓸함에 많이 상심했었다. 계훈제 선생님의 만년은 내게 늘 따가운 서글픔이다.

나는 내가 호인(好人) 소리 듣기 위해 무던 애써왔던 거 같다. 남들이 좋아하는 대로 맞춰 오지는 않았지만 기왕이면 선량함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런 노력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자는 거다. 그저 착하게만 사는 건 너무 쉽고 재미없다. 그 옛날부터 내가 많이 들어왔던 "바른 생활 사나이"라는 별명에 걸맞기 위해서는 좀 더 어렵지만 가슴 뛰는 삶을 살아야할 거 같다.


060909
9월 9일 토요일에 한자교육진흥회에서 주관한 한자자격시험 1급 시험을 치렀다. 지난 7월에 장렬하게 떨어진 한국어문회의 한자능력검정시험 1급 시험 대신 본 시험이다. 기본적으로 평이한 시험이라 무난하게 합격하지 않을까 싶다. 이 여세를 몰아 어문회 1급 시험도 도전해야할지 고민 중이다. 당장 다음 주부터 올해 마지막 시험 접수를 시작하는데 말이다. 또 한자 공부에 몰두해버리면 당최 영어 공부는 언제 하느냔 말이다. 자꾸 영어 공부를 등한시하다 보니 내 목표인 "사회에서 요구하는 영어 최소수준을 살짝 넘기기"마저도 버거운데 말이다.^^;

여하간 오늘 본 시험 가운데 틀린 한자들을 복습해보면 다음과 같다. 血壓(혈압), 試寫會(시사회), 迂回(우회), 聚落(취락), 手帖(수첩), 隱蔽(은폐), 駐屯(주둔), 貯藏(저장), 普及(보급), 經驗(경험), 制約(제약), 電光石火(전광석화), 가르칠 誨(회), 시작할 肇(조), 비단 綺(기), 천둥소리 霆(정), 발끈할 勃(발), 여울 湍(단)... 회계학 문제풀이가 귀찮아서 눈으로만 풀면 막상 시험장에서는 손이 움직이지 않듯이, 한자 공부 또한 눈으로만 보면 독음이나 뜻 문제난 곧잘 맞추지만 쓰기 문제에서는 잔실수가 많다. 가령 수첩, 주둔, 저장, 경험, 제약, 전광석화 같이 내가 익히 알고 있거나 꽤 알고 지내던 단어들도 막상 시험장에서는 헛갈려서 엉뚱한 걸 써놓게 된다. 머리로는 아는데 손이 기억을 못한 것이다. 역시 공부는 머리로만 하는 게 아니라 손으로도 해야 하나 보다. 아! 써보기 싫어서 눈으로만 훑어보고 마는 내 게으름이여!


060910
일전에 유홍준 선생이 백제의 문화를 잘 나타낸 말로 손꼽았던 삼국사기의 구절이 떠오른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 15년 기사에 “봄 정월에 궁실을 새로 지었는데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았으며,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十五年 春正月 作新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는 말이 나온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라는 말을 삶의 자세로 삼아봐도 좋겠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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