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925
젊은 시절 부대를 이탈해 18년간 도피생활을 하다 뒤늦게 자수해 20년 만에 군 복무를 마친 한 늙은 군인의 사연이 화제다. 이〇환 씨는 탈영 18년 만인 지난 7월 수도방위사령부 헌병단에 자수했다. 탈영병의 경우 만 40살이 넘으면 재판을 받아 보충역에 편입되지만 이 씨는 해당되지 않아 만 39살인 이 씨는 5개월이 모자라 탈영 당시 계급인 상병으로 복귀했다. 이 씨는 3군사령부 심의를 거쳐 약 1달간 재복무 끝에 지난 8일 상병으로 조기 전역했다. 늙은 사병을 위해 ‘현역복무 부적합’을 건의한 군부대측의 자애로움을 칭찬하려니 서글퍼졌다. 군사법원법상 탈영병에 대한 공소시효는 7년이다. 국방부는 탈영병에 대한 처벌 근거를 두려고 3년마다 복귀명령을 내려서 공소시효가 지나더라도 군 형법 제47조 ‘명령위반’을 근거로 탈영병들을 처벌할 수 있게 만든다고 한다.

군법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공소시효를 연장시키는 편법을 쓰면서까지 탈영병을 거두려는 의지가 단호해 보인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국법의 지엄함은 모름지기 이래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설마 군법도 사병에게는 매섭고 간부에게는 부드럽지 않으리라 믿는다. 문득 전국민을 상대로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고도 편안한 노후를 보내는 전두환을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요즘 유행하는 행정대집행은 전 씨 자택이 시급하지 않을까.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문 위의 ‘정의의 여신상’은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한 손에는 법전을 들고 있다. 사진으로만 봤으니 눈을 감고 있는지 여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설령 눈을 감고 있다고 해도 실눈을 뜨고 있는 게 아닌가 헷갈리니 눈을 가리는 띠를 두르게 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해서 공평무사함을 더 강조하는 게 무슨 쓸모가 있겠냐 만은.

처벌 위주의 법 집행이 만능은 아니지만 불법에 ‘선택적’으로 너그러운 것만큼 볼썽 사나운 것도 없다. 어느 책의 제목대로 법도 때로는 눈물을 흘렸으면 좋겠다. 그 눈물이 가진 것이 몸 뿐이라 몸으로 때우고 있는 힘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면 더욱 좋겠다. 여하간 이〇환 씨의 건투를 빈다.


060926
예비군 향방작계 훈련 지원을 위해 야근을 했다. 교육장인 근처 중학교까지 이런저런 물품을 나르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구청 강당에서 훈련이 있었으면 대기 시간에 책이라도 보는 건데 운동장에 나와 있으니 책도 보지 못하고 산보하며 일감을 기다렸다. 덕분에(?) 훈련을 위해 지원 오신 어느 동대장님과 어느 예비역과의 언쟁을 목격할 수 있었다. 동대장이 사단장이 순시할지도 모르니 자세를 똑바로 하고 시청각자료를 볼 것을 요구하자 그 예비역은 우리가 그런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런 훈련을 하는 건 아니라고 반박했다. 그것은 훈련의 취지와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자꾸 강조하는 것이 탐탁지 않다고 말했다.

나는 예비군의 발언이 거개 옳다고 생각했다. 동대장의 반박은 그리 설득력 있지 않았다. 일방적인 당위의 나열에 불과했고 좋은 게 좋은 거 수준에 그쳤다. 더군다나 더 이상의 토론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예비군이 모든 논의를 중지하고 교육을 실시할 것을 요구했음에도 언쟁을 그치지 않았다. 물론 동대장은 나이 지긋한 어른이지만 예비역을 고객으로 생각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의 훈계는 좀 넘쳤다. 초등학교 시절 장학사가 온다고 하면 나무로 된 교실바닥을 왁스칠하느라 소동을 피웠던 그 때의 사고방식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수많은 사람이 앉았다 나간 자리는 조금 헝클어질 수밖에 없는데도 혹여 높은 분들이 올까봐 다시금 줄을 맞추고 있는 내 자신이 좀 우스웠다.

그래도 이날 훈련 교관으로 온 중대장님은 참 인상 깊었다. 미안하다고 살갑게 말하며 부탁을 하고, 고생한다며 따뜻하게 말을 건네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물론 그 중대장님이 외부 사람에게는 친절하게 대하고 자신이 거느리는 사람들에게는 엄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리 나쁜 양식은 아니지만 그 간격이 너무 넓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군 간부들이 사병들을 좀 더 애호했으면 좋겠다. 남의 집 귀한 자식을 맡아 쓰는 권한을 부여받았으면 소중하게 다루는 것이 순리다. 묵자가 말했던 너와 나의 구별이 없는 절대적 사랑인 ‘겸애(兼愛)’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그저 적절한 수준의 ‘별애(別愛)’를 바라는 게 지나친 요구이며 간섭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어두운 밤이라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분명 후덕한 얼굴이었을 것이다. 이런 군인이 좀 더 많이 그리고 빨리 늘어났으면 좋겠다. 국방력이 강화되고 있는 소리가 들리게.

이날 훈련을 위해 인근 동대에서 지원을 온 어느 상근병은 스물 한 살이었는데 그 ‘어림’이 부러웠다. 나는 내 젊음을 알차게 쓰지도 못하면서 남의 어림을 탐내는 못난 녀석이다. 여하간 예비군들의 짜증 섞인 투정과 함께 훈련을 무탈하게 마쳤다. 허겁지겁 물품들을 나르니 온 몸이 흠뻑 젖었다. 새벽 1시에 집에 돌아와 달콤한 포도 한 송이를 먹으니 피로가 풀린다. 반듯반듯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 때문에 좀 우울한 하루였다.


060927
나와 바라보는 바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서 내년 대선에 대한 체념 같은 것을 발견하는 것은 곤혹스러운 일이다. 물론 노무현 대통령이 한나라당과 정책적 차이가 없다면서 대연정을 제의하였을 때 나도 크게 놀랐고 무척 상처받았다. 어렵게 일궈놓은 한국 정당 민주주의를 송두리째 헝클어 놓았다는 점에서 노 대통령이 변명할 구석은 별로 없어 보인다. 하지만 참여정부와 집권여당의 실정에 이제 사회 개혁에 대한 열망을 내동댕이치고, 정치, 사회에 대한 무관심으로 응수하는 건 그리 바람직하지 못한 처사다. 한 사람, 한 시대정신에게서 실망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신의 세속 초월(?)의 이유로 삼기에는 궁색하다.

나는 부러 체념과 환멸을 나타내는 분들이 엄살을 피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분들이 “잘 살면서 따뜻하기까지 한 나라”에 대한 꿈을 함부로 포기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청부안민(淸富安民)의 꿈은 독점불가능하지 않는가. 또한 그들이 공박하는 노 대통령보다 더 흐트러진 언행을 일삼는 이들의 손에 국사를 죄다 도맡는 것을 배 아파서 못 보시리라 생각한다. 온건 보수 노선, 개혁적 자유주의 노선이 통째로 폐기될 까닭이 없다. 케인즈를 빌려 수요가 공급을 창출할 것이라고 한다면 너무 낙관적인 견해일까. 나는 아직 젊은 데 벌써 내가 지향하는 바를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려니 섭섭해서 하는 말이다. 이런 걸 미련이라고 하는 걸까? 헛된 집착인가.


060928
최장집 고려대 교수는 경향신문 창간 60주년 특집 인터뷰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국민에게 책임 지는 방법은 새로운 정책을 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노정부는 갈등적인 이슈에 더 이상 손대지 말고 비갈등적인 이슈만 건드려야”하며, “합의가 충분히 돼 있고, 일상적으로 가게 돼 있는 국가, 내지 정부의 관리 수준의 것”에 그쳐야 한다는 것이다. 최장집 교수님 지적대로 “대통령이 신뢰 못 받는 상황에서 추진하니까 국민의 반대가 더 많아지고 있”다. 노무현이 미워서 그가 하는 일이 죄다 싫은 사람들이 집권 초기에 비해 많이 늘었다. 참여정부가 갈등이 큰 사회적 현안을 해결할 동력을 상실했음은 비교적 또렷해 보인다. 부단한 현상 유지마저 버거워 보인다.

얼마 되지 않은 기회였지만 사태를 호전시킬 계기는 종종 있었다. 하지만 결국 허송세월 해버렸다. 최 교수님은 “민주화를 지지했던 광범한 사회세력이 사실상 정치적 탄핵을 받은 정부와 함께 몰락해서는 안 된다”며 노 대통령과의 결별을 주장하신다. 어지간한 잘못은 참여정부에게 전가하며 신자유주의 반대와 정당체제 구축 같은 원론적인 대안들만 제시하시는 최 교수님의 한계가 엿보이지만 그 쓴소리를 죄다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다. 여하간 묵직한 희망을 안고 출발했던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은 줄곧 지지자들을 배신해왔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적 냉소의 이유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설혹 냉소를 품더라도 그 냉소는 짧을수록 좋다. 노 대통령이 얼마나 더 초라해질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가 소나기를 맞으며 물러갈 때 함께 비를 맞아주는 사람들이 몇 명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행동이 옳아서가 아니라 드물기 때문이다.


060929
어제는 광호형님이 주최하신 04학번 이상 고학번 모임(05학번이 참석했지만), 오늘은 경영 飛반 웹진 회식에 다녀왔다. 둘 다 9시가 넘어서 찾아간 거라 여러모로 아쉬웠지만 공부한다면서 이틀 연속 술자리에 참석한 것도 그리 떳떳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역시 너무 사무치게 즐거웠다. 정말 앞으로는 이런 모임에 나갈 때 더 밀도 있게 혼신의 힘을 다해 만끽해야겠다. 이틀 연속으로 나온 이야기가 선후배간의 관계가 많이 소원해졌다는 것이다. 앞사람이 뒷사람을 핀잔하는 거야 늘 있는 일이지만 날이 갈수록 조바심도 나고 아쉽기도 하다. 내가 반 활동을 진작부터 했다면 이 문제에 좀 더 천착했을 텐데 이방인 처지를 면하는데 급급해서 미처 돌보지 못했다.

나는 왜 소규모라 선후배 관계도 돈독하고 오랜 기간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동아리나 학회 대신 반 활동에 집중한 까닭은 무엇일까. 무정형의 어수선함과 다양성의 복잡다단이 좋았다. 오만사람이 모여 티격태격하면서 가까웠다 멀어졌다 하는 가운데 인연을 가꾸어나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 재미를 후배들에게 강권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나보다 더 영민한 후배들은 제 나름대로의 최적의 의사결정을 내리고 있을 것이다. 후배의 가치판단을 대신해줘야겠다는 건 실현불가능한 과욕이다. “사람의 걱정은 다른 사람의 스승 되기를 좋아하는데 있다(人之患在好爲人師)”는 맹자의 말씀으로 경계해야겠다. 좋은 선배 되기가 침 힘들다. 세상에는 별 거 아닌 거 같아 보이는 일도 조금만 들여다보면 엄청난 공력이 들어간다는 걸 알 수 있다.


060930
이틀 전 읽었던 최장집 교수님의 경향신문 인터뷰에 대한 이런저런 비판들을 챙겨 봤다. 김창호 국정홍보처장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진보의 위기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기 보다는 위기의 책임을 참여정부에게 전가하는 방식으로 핵심을 비껴가 버렸”다고 주장했다. 나는 김 처장의 말에 상당 부분 동감했지만 더 이상 언급은 하지 않을 생각이다. “특정 정권을 평가할 때 말이나 레토릭 보다는 구체적 레코드를(기록) 통해 평가해야”한다는 최 교수님의 말씀을 가슴 아프게 새기고 싶기 때문이다.

다만 더 이상 일을 벌이지 말라는 최 교수님의 말씀은 좀 넘쳤다고 지적해야겠다. 국민의 인기가 없다는 이유로 국정을 포기하라는 논리는 인기가 많다는 핑계로 마녀사냥을 즐기는 어느 신문이 활약할 논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여하간 내가 보기에 기품 있는 보수주의자 정도의 논리를 설파하시는 최 교수님이 진보 진영의 거두로 불리는 건 좀 민망한 일이다. 일찍이 강준만 선생님이 지적하신 ‘이념의 인플레이션’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나는 최 교수님도 자신에게 지워진 그 레토릭을 차분히 검토해보셨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김 처장의 글 가운데 신자유주의에 대한 논설은 특별히 인용한다.

요즘 진보진영은 ‘신자유주의’를 어떤 사물을 악마화 · 물신화시키는 주술로 사용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런 식으로 모든 정책을 비판하고 환원한다면 세계화와 개방의 높은 파고를 대응하려는 이 세상의 모든 정책과 정부도 신자유주의가 되고 말 것입니다. 신자유주의는 구체성을 담기 힘든 철학적 개념이자 포괄적인 원칙입니다. 개별 사안마다 복합적·중층적인 요소들이 혼재되어 있는 오늘날의 정부 정책을 신자유주의라는 단 하나의 추상적인 잣대만으로 평가, 재단하고 그것으로 진보지식인들을 자처한다면 이는 지적인 나태함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런지요.

앞으로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논의는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우리 실정에 맞게 소화해내려는 노력이 반드시 反신자유주의라는 구호 아래 표출될 필요는 없다. 물론‘신자유주의-反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구분은 ‘민주-反민주’보다 좀 더 현실을 반영하고 좀 더 적확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사회통합이나 연대의 가치도 생각하는 사람은 어느 편이라고 쉽게 나눌 수 있을까. 결국 이 문제도 광범위한 중간영역을 높고 쟁투를 벌여야 할 거 같다. 다만 최 교수님의 지적대로 레토릭보다는 레코드로 선의의 경쟁을 나눴으면 좋겠다.


061001
미시경제학 공부를 하다가 일반균형분석(general equilibrium analysis)이라는 화두를 얻은 건 뜻밖의 행운이다. 단기간의 부분균형분석에 집착하지 말고, 장기간을 포함해서 서로 연관된 모든 시장들을 함께 분석하는 일반균형분석의 아이디어를 이제야 깨닫다니 내 무식을 고백하는 거 같아 부끄럽다. 한 시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다른 시장의 균형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 것으로 가정하는 부분균형분석은 복잡한 경제현실을 단순화함으로써 특정 시장에서 균형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용이하게 분석하게 만드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각 시장 사이에는 연관성이 존재할 수 있으며, 한 시장의 변화가 다른 시장의 균형에 미칠 영향을 고려할 필요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두 분석 기법 모두 저마다의 가치와 유용성이 있지만 내게는 일반균형분석의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고 제도를 고쳐나가는 시각이 좀 더 필요할 거 같다. 지금 당면한 현상 너머의 파급효과와 상호작용을 파악하려는 노력을 해봐야겠다. 그것이 좀 더 사회적 후생을 증진시키는 일일 것이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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