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日記(06.10.23~06.10.29)

일기 2006. 10. 29. 21:07 |

061023
누리꾼들의 댓글은 날이 갈수록 저열해지는 거 같다. 일전에 나온 통계에 의하면 소수의 악플러들이 댓글을 도배한다고도 하지만 이쯤 되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도 너무 심하다. 그래도 드물게나마 재치 있고 논리적인 댓글들이 있기에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있지만 말이다. 인터넷의 넓어진 저변이 고작 감정의 배설로만 점철되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네 지식인들이나 지각 있는 학생들이 콘텐츠의 질을 높이는 쪽으로 인터넷을 선용하도록 견인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양질의 지식을 공유하려는 사람들이 더 늘어야 한다. 그러고 보니 나도 악플 비슷하게 험한 글을 쓴 적이 한 번 있었다(아마 내가 잊어버린 게 몇 번 더 있었을 게다). 최연희 의원 홈페이지에 남긴 글이 떠오른다. 2004년에 국가보안법 개폐 논쟁이 한창일 때 당시 법사위원장이던 최연희는 끈질기게 의사진행을 지연시켰다. 나는 그의 직무유기에 무척 분개했던 모양이다. 최연희라는 인간이 얼마나 시시한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성추행 사건에서 드러났지만 그런 사람의 노력(?)으로 국보법이 좀 더 연명할 수 있게 된 건 화나는 일이다.

나는 최연희씨의 홈페이지에 국보법 폐지를 결코 막지 못하리라고 썼다. 나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만이 북한의 폭압정권을 궁극적으로 이기는 길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주장했다. 최씨가 아무리 의사봉을 희롱하더라도 인권국가로 가기 위한 흐름을 막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역사의 흐름은 일개인이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구박했다. 그러자 아래에는 욕설이 섞인 댓글이 달렸다. 그 때는 시국도 시국이었고, 내 뜨거운 성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런 말을 내뱉었다. “누가 누굴 보고 개라고 그러는 건지... 고작 이런 수준의 아해들과 싸워야하니 도저히 질 수가 없구나” 한참 지나고 보니 좀 지나친 말을 한 게 아닌가 싶다. 2년 가까이 지난 옛일을 굳이 떠올리는 건 나 또한 그런 말을 하면서 마음이 편치 못했기 때문일 게다. 내가 기억하는 유일한 악플을 떠올리며 그 거칠음을 반성하면서도 그 때의 정신만은 잊지 말아야겠다. 나는 함부로 질 수도 없다.


061024
주간한국 [역사 속 여성이야기]란 연재물을 인터넷을 통해 죄다 찾아 읽었다. 처음 알게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새로 알게 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3중 장애를 딛고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줄여나갔던 헬렌 켈러, 낮은 사람보다 더 낮은 자세로 가난한 사람 가운데 더 가난한 사람을 찾았던 마더 테레사, 남성 중심의 그리스 사회에 이름을 남김으로써 차별과 억압에 맞서는 힘의 원천이 된 대시인 사포, 한나라의 착취에 고통 받던 베트남 사람들에게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해 분연히 떨치기 일어나 투쟁한 쯩자매(徵姉妹), 탁월한 인재 등용과 기민한 외교전략으로 삼국통일의 초석을 닦은 선덕여왕, 나치즘의 광기에 저항했던 백장미단 활동을 통해 독일인의 마지막 양심이 된 소피 숄, 제 몸을 버려가며 어렵사리 성사시킨 연구를 조건 없이 개방한 마리 퀴리, 일본인이면서도 조선의 황태자비로서 존엄을 잃지 않았던 이방자 여사, 일개인의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고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했던 호방했던 정치가 클레오파트라 등의 이름들이 찬란하다.

이 밖에도 마가렛 생어, 송경령, 신사임당, 하쳅수트, 예카테리나, 엘리자베스 1세, 메리 스튜어트, 에바 페론, 아가사 크리스티,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나혜석,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등의 영욕이 스쳐 지나간다. 이 가운데 내 마음을 사로잡은 여성은 레이디 고다이버다. 11세기 중엽 잉글랜드 중부의 중공업 도시 코벤트리 주민들은 영주 레오프리크 백작의 가렴주구에 시달렸다. 백작의 아내 고다이버가 남편에게 주민들의 세금을 줄여달라고 거듭 요청하자 남편은 당신이 대낮에 알몸으로 말을 타고 거리를 한 바퀴 돈다면 세금을 줄여주겠다고 제안한다. 정숙한 백작 부인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지만 고다이버는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녀의 살신성인에 감동한 주민들은 그녀가 실오라기도 걸치지 않은 채 백마에 올라 마을을 돌 때까지 아무도 거리에 나와 이를 구경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양복재단사 톰이 마을 사람들의 합의를 어기고 커튼을 슬쩍 들추어 엿보려다가 눈이 멀었다는 “엿보는 톰(peeping Tom)”이라는 권선징악적 이야기가 전한다. 이 때 고다이버의 나이 열 여섯이었다고 하는데 유관순 열사나 잔다르크가 연상된다. 이처럼 관습과 상식을 깨는 행동을 ‘고다이버이즘(godivaism)’이라고 일컫는데 유능하고 선량한 여성의 고다이버이즘을 보는 건 즐거운 일이다. 마더 테레사는 “우리가 하는 일은 넓은 바다의 물 한 방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바닷물은 그 한 방울만큼 모자랄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처럼 출중한 여성들이 자신의 가능성을 소진시키지 말고 한 움큼씩 더 발현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그런 세상에서 남성이 조금 불편해질지도 모르겠지만 그 불편함은 여성들이 누릴 편익에 비하면 적을 게 확실하다. 아! 고다이버! 매력적인 여성이여!


061025
지난 9월 처음처럼 전국 소주시장 점유율이 11.4%, 서울 시장 점유율 21.3%, 수도권 시장 점유율 18.3%을 기록하고 있다는 기사를 접했다. 내 단기 목표인 수도권 시장 20%와 전국 시장 12%의 고지가 보인다. 이런저런 술자리에서 내가 부러 처음처럼을 시킨 게 100병은 될 터이니 나도 적잖은 기여를 한 게 아닌가 자화자찬하고 있다. 참이슬 99병이 나올 때 山소주 1병을 의연하게 비웠던 나였던지라 오히려 처음처럼의 지평이 넓어지니 예전 같이 스릴을 만끽하며 시킬 일은 없어졌다. 개인적으로 처음처럼 맛이 좋다고 말하지만 내가 섬세한 미각을 가진 것도 아니고 실상 거기서 거기고, 결국 심리적 요인이 크다. 처음에는 독점은 소비자 후생을 깎아먹는다는 경제원론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처음처럼 판촉(?)에 열을 올렸는데 요즘은 거의 처음처럼 전도사가 되 버린 듯하다.

문득 <시사저널> 사태가 떠올랐다. 금창태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이 지난 6월 삼성그룹 관련 기사를 삭제하면서 시작된 사건이다. 잡지가 나온 뒤 기사가 빠진 것을 알게 된 이윤삼 국장은 항의의 표시로 사표를 내자 금 사장은 이를 즉시 수리했고 뒤이은 기자들의 항의에 무더기 징계로 대응했다. 기자가 고작 27명에 지나지 않는 <시사저널> 편집국에서 이번 사태로 경징계 이상을 받은 기자가 무려 17명에 이른다고 한다. 삼성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 것이든, 경영진이 알아서 긴 것이든 “자유만큼 책임을 생각하는 언론”이라는 모토를 가진 <시사저널>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사건이다. 아! 시사저널마저 자유를 포기한다면 이 땅은 그만큼 어두워질 게다.

왈쩌(M. Walzer)는 경제 영역의 고유 가치인 부는 경제 영역에, 정치 영역의 고유 가치인 권력은 정치 영역에 머물 때 사회적 평등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즉 하나의 가치가 그 영역 안에서 머무를 때 다원적 평등이라는 정의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왈쩌가 가장 우려한 것은 경제 영역에 머물러야 할 돈이 다른 영역을 장악하는 현상이다. 양식 있는 저널리즘이 자본에 포섭되는 광경을 보는 건 그래서 더 아프다. 왈쩌는 사회적 가치가 독점되는 현상을 전제(tyranny)라고 부르며 이를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자꾸만 늘어가는 이 땅에서 곱씹어볼 대목이 많다. 우리네 천민 자본주의는 그칠 줄 몰라서 탈이다.

나는 처음처럼을 지지하듯 시사저널 편집국을 지지한다. 독점은 대개의 경우 악이다. 앞으로도 사회적 가치의 ‘부당한’ 혹은  ‘압도적’  독점에 반대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다.


061026
10.25 재보선에서 전패한 열린우리당이 재창당을 운운하고 있다. 조선일보 사설의 “무슨 殘黨잔당 비슷한 분위기”라는 말도 아프지 않다. 당최 한국 정당사에 집권여당이 이렇게 국민들에게 버림받은 사례가 있을까. 아니 세계 다른 나라에서 이런 사례가 있을까 싶다. 불과 3년 전 “100년 동안 집권할 정당을 만들자”고 외치던 이들이 실패를 자인하고 있다. 그간 입만 열면 반성한다고 했으니 더 이상 반성거리를 찾기도 힘들겠다. 기껏 내어놓는 해결책이 한나라당 집권을 저지하기 위한 오만가지 잡탕 연대다. 딴에는 민주개혁통합이니 중도실용통합이니 평화번영세력이니 하지만 결국 지금 누리고 있는 권력의 달콤함을 연장하기 위한 술수에 지나지 않는다. 정당정치를 개혁하고, 지역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당이 이념과 정책을 포기하고 다시금 구태로 투항하는 모습이 씁쓸하다.

혹시 열린우리당 관계자들과 참여정부 인사들은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너희들이 하는 일은 다 싫다, 설령 좋은 일이라도 다른 사람이 대신 했으면 좋겠다는 인식이 퍼진 것은 죄 이상의 벌을 받는 것이라 항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가 권력의 상층부에서 당신네들이 누렸을 자유와 혜택을 생각하면 그 리스크는 마땅히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고 작금의 마녀사냥이 마냥 옳다는 것은 아니다. 정서적 반발도 유권자의 권리지만 그것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카타르시스만 생산한다면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그다지 보탬이 될 거 같지 않다. 때 되면 이합집산을 일삼는 낙후된 한국 정당정치를 목도하는 건 여러모로 짜증스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유권자들이 마냥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 이 사회의 주인들은 자신의 대리인을 고를 때 좀 더 냉철한 이성의 체와 섬세한 윤리의 체를 이용해야 한다. 민주공화국 수준은 국민 수준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일전에 진중권 선생님은 “우리 사회의 희망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지켜야 원칙을 지키며,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키는 그 사람들에게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현실 정치는 희망의 질만큼이나 양이 중요하다. 어느 정도의 승리지상주의는 수권정당에게는 필요악이다. 이는 자신들이 품은 희망을 실현할 힘을 일정 기간 부여받기 위한 치열한 경쟁의 원천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최소한의 의리와 명분도 없이 그간 품었던 희망마저 헝클어뜨리는 형국이다. 열린우리당의 퇴장이 어떤 식이 될지는 가늠하기 힘들지만 그들이 내걸었던 헌걸 찬 창당 초심에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이 정당에 꿈을 투자했던 지지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적어도 옛 지지자들이나마 열린우리당의 조종(弔鐘)이 마음 짠해지게 만들어 줘야 하지 않을까. 3년 전 열린우리당의 등장을 그 누구보다 반겼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드리는 마지막 고언이다.

머잖아 어떤 배반과 반동이 횡행할지 몰라도 가슴 한 구석에 훈훈한 추억이 남는다면 좀 더 잘 버텨낼 수 있을 텐데.


061027
훈석이에게

간만에 찾아간 네 블로그에서 지난 지방선거 끝나고 쓴 글을 발견했다. 너는 한나라당이 “국내 유일의 보수정당”이 되었다고 정리했어. 열린우리당은 “포지셔닝 실패”로 말미암아 “60%에 해당하는 보수표를 전부 한나라에 넘겨 주었다”고 평했고. 나는 포지셔닝의 패착이라는 진단에 거개 동감한다. 사실 열린우리당이 내건 정치개혁이나 지역주의 타파 같은 구호에서 특별히 어떤 이념적 함의를 읽기는 힘드니까. 다만 4대 개혁입법 등을 통해 개혁적 색채를 생색이나마 내려고 부단 애썼음을 알 수 있지. 그나마 가장 빼어난 보수정당이 될만했던 우리당은 의회권력을 쟁취하고서도 오락가락 행보를 선보이며 숱한 이들의 실망을 자아냈어. 나는 지금 우리당의 실덕을 변명하려는 게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나라당에게 보수정당이라는 칭호를 선사해도 될 지에 대해서는 조심스럽다.

이 땅에 보수를 참칭하는 세력의 상당수가 기실 제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세련된 논리를 개발하는데 열중해왔다면, 한나라당의 수준은 아직 거기서 머무르고 있지 않을까. 제 것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지키는’ 보수에 이 정당은 얼마나 모자란가. 또한 한나라당의 철벽(?) 지지율의 상당수가 내부 혁신에 기반한 것이라기보다는 지역주의 정서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도 지적해야 하지 않을까. 2002년, 2006년 지방선거 광역의원 정당 비례대표 득표율을 살펴보면 한나라당은 2002년 52.1%, 2006년 53.8% 득표로 1.7%P 증가에 그쳤다고 해. 2006년 우리당과 민주당의 득표율을 합치면 2002년 집권당이었던 민주당이 얻은 29.1%보다 2.4%P 높은 31.5%가 되고.

뭐 단정하기는 힘들지만 지금 한나라당이 누리는 위세가 우리당과 민주당이 분할로 인한 어부지리임은 간단한 산수로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는 거 같다. 다만 이렇게 충분히 예측 가능한 분당의 리스크를 감수하는 용기를 가지고 우리당 창당에 나선 인물들이 창당 초심을 지켜내지 못한 건 안타까운 일이지. 나는 이 대목에서 퇴행적 지역연합이 다시 꿈틀거릴까봐 불안하다. 다시금 지역에 기반한 정치가 횡행할 때 우리당이 꾸었던 아름다운 꿈이 무참하게 사그라지는 걸 보는 건 참 아플 거 같다. 우리당의 지도자들이 제 지지자들보다 끈기가 부족했다는 게 심원한 비극의 시작이 아니었나 싶어.^^;

나는 마지막으로 이 땅의 주인들에게 실낱같은 희망을 걸어본다. 하지만 고문기술자 정 아무개를 70% 이상의 지지율로 국회의원으로 당선시켜놓고도 민망함을 모르는 유권자들이 늘어갈 때, 부인의 공천헌금 수수가 드러나자 의원직 사퇴를 운운하던 김 아무개가 슬그머니 국정감사에 참여하고 있는 걸 너그럽게 넘어가는 유권자들이 늘어갈 때 국민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욕하는 정치꾼들에게 다시금 모욕을 당할 게 틀림없다. 한참을 에둘러서 말했지만 “국내 유일의 보수정당”이라는 네 표현은 좀 지나쳤다. 보수라는 칭호는 그렇게 함부로 써서는 안 되는 거 같다. 언제쯤 진짜 보수에게 나라살림을 맡겨놓고 흐뭇하게 지켜볼 수 있을까. 유학생활 건승을 빈다.


061028
열린우리당의 황혼에 대한 분석이 어지럽게 나오고 있는 요 며칠간 그간 부러 외면하던 보수와 진보에 대한 담론들을 찾아 읽어봤다. 훈석이와의 온라인 상에서의 논쟁을 통해 나는 “보수적 유권자”의 상당수는 수구기득권에 포섭된,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해 지배계급의 이익에 찬동하는 이들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고 우겼다. 나는 친구보다 보수라는 개념을 조금 더 엄격히 적용했다. 이 땅의 자칭 보수들은 공동체의식이나 사회적 책임 의식도 박약하고, 자유와 인권에 대한 애호도 철저하지 못하다. 더군다나 일본 우익처럼 군사적 자주권을 주장하는 것도 아닐뿐더러.^^; 자기가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지도 잘 모르면서 남에 대한 험담이나 늘어놓으며 약자에게 매서운 주먹을 휘두르는 이들에게 “보수”라는 칭호를 선사해도 될지 주저된다. 나는 한나라당에게 보수라는 칭호를 주기를 주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유권자들에게 보수라는 칭호를 빼앗기기가 싫다고 말했다. 나는 친구가 “보수”라는 말을 조금 아끼고 누군가에게 건넬 때 머뭇거렸으면 좋겠다고 투정 부렸다.

역사는 그래도 조금씩 진보한다고 믿는 사람에게 종종 찾아오는 역사의 돌아감은 고통스럽다. 결국에는 좀 더 인간적인 사회, 좀 더 인간성이 고양되는 사회로 나아갈 것을 믿지만 그 에둘러서 가는 시기를 감내하기는 여간 따갑다. 그것은 사람의 삶이 단 한번뿐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평생 씨만 뿌리고 수확의 즐거움은 거두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해야 한다면 얼마나 서러운 일인가. 아무리 점진적인 개혁이 좋지만 적어도 한 시대에게 파종의 의무만 부여하는 사회는 옳지 않다. 그런 누군가의 희생을 먹고 자라는 진보는 그리 튼실하지 못할 것이라는 게 내 지론이다. 시대정신은 파종의 의무에 그쳐서는 곤란하다.

‘부패하나 유능한 보수, 깨끗하나 무능한 진보’라는 말은 어폐가 심하다. 우리 사회는 부패하면서 무능하기까지 한 보수에게 시달려 왔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보다는 인간의 경험과 지혜가 축적된 역사에서 배우려는 보수는 점진적인 방법론으로 말미암아 덜 개혁적으로 비춰지기 쉽다. 그러나 진정한 보수주의는 변해서 안 될 것을 지키면서 필요한 변화에 인색하지 않아야 한다. 다만 그 속도가 조금 느릴지 모르겠으나 갈등비용을 상쇄해나간다는 점에서 더 현실적합적인 개혁이 될 여지도 충만하다. 박호성 서강대 교수님 말씀대로 개혁은 진보적 개혁과 보수적 개혁으로 나눌 수 있다. 보수적 개혁정권인 참여정부나 이를 물어뜯는 세력 모두 그다지 보수 개혁에 유능하지 못했다.

진보가 제시한 어젠다에 반대하기 급급한 보수, 시장만능 외에는 다른 대안을 부지런히 검토하지 않는 보수, 평등이란 요소를 자본주의적 토대에 결합시키려는 가능성을 모색하지 않는 보수,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처한 제약을 생각하고 그네들의 자유를 신장시킬 방안을 고심하지 않는 보수라면 무능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싸다. 수구기득권 세력과 유사 파시즘 세력이 보수를 참칭하며 활보하는 걸 헤프게 받아들이는 보수는 제 고매한 이상을 내던진 굴종에 지나지 않는다.

어제 칭다오맥주와 이과두주를 먹길 잘했다. 덕분에 스트레스가 좀 풀린 거 같다.^^;


061029
한국어문회에서 주관한 한자능력검정시험 1급 시험이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지난 7월 고배를 마시며 한 번만 더 도전해보겠다고 했는데 벌써 덜컥 시험이 다가왔다. 공부량이 방대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배울 거리도 적잖은지라 집중하지 못했다. 시험에 대한 예의가 있다면 그건 바로 벼락치기인지도 모른다.^^; 앞으로 남은 닷새가 지나면 당분간 한자 공부를 할 짬이 나지 않을 것이다. 한자를 벼락치기한다는 게 좀 억지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예의는 다하는 것, 그것이 나다운 것일 게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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