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030
지난 토요일 추미애 전 의원님의 파워인터뷰를 시청했다. 일전에 고종석 선생님은 그를 “그는 기존 지지자들을 내침으로써 새 지지자를 얻겠다는 (결과적으로 실패한) 정치공학에 가담하지 않은 원칙주의자로 남았고, 그 결과 민주화 시동 이후 가장 뻔뻔한 정권으로부터 비껴 서 있게 됐다”고 평했다. 추 전 의원님 스스로도 “특정 지역의 뺨을 때려서 다른 지역의 표를 얻겠다는 발상이 정의롭지 않다”며 자신이 권력 따라 나가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하지만 추 전 의원님이 마냥 그리 떳떳한 것은 아닐 것이다. 지난 2004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부산신당으로 몰아세우며 현란한 호남지역주의 언사를 늘어놓았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추 전 의원님이 비록 권력의 달콤함에는 멀어져 있었을지는 몰라도 구민주당 말기의 그 역겨웠던 부패와 한계에도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늘날 민주당의 몰골이 그 시기 때보다 별반 나아진 거 같아 보이지 않는다. 기왕 민주당원으로 남겠다고 선언한 이상 통합 운운하기 전에 제 식구들의 흐트러진 행태부터 바로 잡는데 진력해줬으면 좋겠다.

장영달 열린우리당 의원님이 “열린우리당의 출범이 원죄라고 생각하는 창당 인사가 있다면 차라리 탈당하고 정계에서 은퇴하는 것이 책임 있는 자세”라고 일갈한 데 동감한다. “우리당의 위기는 17대 총선 이후 정부와 당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 국민의 신임을 잃어버린 데서 비롯된 것이지 열린우리당의 출범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분당에서 비롯된 것이 결코 아니다”는 주장이 참 반갑다. 사실 분당의 리스크가 아주 없었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제3당을 감수한 국회의원 47명의 자기희생적 결단은 국민들에게 적잖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가진 게 적어도 희망이 충만했던 지난날과 견주어 오늘날 여권에서 나오는 통합 논의는 얼마나 너저분한가. 자기희생적 감동은 보이지 않고 그토록 결별하려고 애쓴 지역주의와 결합하는 모습이 얼마나 슬픈가. 추 전 의원님을 역사의 뒤안길로 밀어내지 못하고 다시금 반동의 격랑에 휩쓸리게 한 게 열린우리당이 역사적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방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바람이 매서울 때 비로소 꼿꼿한 풀을 알아보게 된다(疾風知勁草)”고 했다. 과연 다시금 등장한 리트머스 시험지에 내 대리인들은 어떤 색깔을 보여줄까?


061031
몇 달 전 백낙청 교수님의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최장집 교수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읽고 내 사상의 지평이 넓어진 듯한 착각에 빠진 적이 있었다. 고작 책 두 권을 읽고 유식해졌다고 자화자찬에 빠질 정도로 두 분의 글은 매혹적이었고 배울 점이 많았다. 혹자들은 두 진보진영 지성 간의 논쟁이라고 싸움 구경을 유도하기도 했으나 사실 그 정도의 불꽃은 튀지 않은 거 같다. 최 교수님이 문제 분석에 탁견을 보이셨다면 백 교수님은 대안 제시에 설득력을 더했다. 문제 파악과 해법 모색을 각기 다른 분의 손을 들어주다니 내 지적 분열(?)이 우습다.^^;

통일문제와 계급문제를 어떻게 분리하고 어디에 주안점을 두어야 할지 아직 감이 잘 안 오기 때문에 그런 두루뭉술한 양시론을 펼치는지 모르겠다. 일전에 박현채 선생님께서는 1980년대 변혁운동의 두 가지 이론적 경향을 두고 "PD적 입장에 서지 않은 NL의 비계급성은 허구이며 PD 역시 민족해방의 과제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시기도 한 만큼 나의 어정쩡한 태도도 마냥 구박받을 일을 아닐 게다.^^; 아직 공부가 부족하니 이런 직관적 판단이 아닌 좀 더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논리를 구성할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겠다.

최 교수님은 NL(민족해방)-PD(민중민주)의 두 구성요소가 분리되고 PD적 문제의식이 약화 또는 소진된 것을 문제로 지적하신다. 이 대목에서 신자유주의가 절제 없이 창궐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또한 “NL은 PD적 요소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하나의 민족주의로 전락될 것이 분명하다”고 강조하시며 민족주의적 정서로 민중 문제를 무마하는 걸 경계하신다. 반면 백낙청 교수님은 BD(부르주아민주주의)라는 제3자를 제시하신다. NL, PD, BD의 3자 결합을 통한 변혁적 중도주의가 그것이다. 물론 민족통일을 중시하는 자주파인 NL, 노동자 농민의 권익을 중시하는 평등파인 PD, 개량주의 시민운동 및 온건개혁세력인 BD가 매끄럽게 융합하는 건 무척 까다로운 과제다. 신자유주의의 가속화에 대한 NL, PD와 BD는 적잖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고, 남북관계의 경색에 관해 NL과 PD, BD는 저마다 상이한 행보를 보이는 듯하다.

BD는 하나의 단일한 세력으로 보기 힘들 만큼 다채로워 정리하기가 까다로운 측면이 있다. 자칭 개혁정당이라는 열린우리당의 현란한 잡탕 퍼레이드만 봐도 그렇다. 그래서 일단 논의를 미루고 NL과 PD에 대해 살펴보자. 학생운동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나이지만 1990년대 들어 동구권 몰락과 궤를 같이해 PD계열이 쇠락하고 민족, 통일문제로 파고든 NL계열이 학생운동을 주도하게 되었음을 대강 알고 있다. NL계열이 시대정신의 일부를 부여잡은 건 환영할 일이다. 그네들의 전략적 유연성도 한 몫 했을 게다. 하지만 NL계열의 그늘은 그 빛만큼이나 짙다.

이번 북핵 사태와 관련해서 민주노동당 내에서 NL과 PD 진영 간 내홍을 살펴봤을 때 NL계열은 조금 험하게 말해 감상적인 민족주의에 지나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줬다. 아무리 민노당이 정파연합정당이라고 하지만 이쯤 되면 좀 지나친 거 같다. NL계열이 진보가 되는 인플레이션이 있다는 게 한국 정치 낙후성의 한 사례일 듯싶다. NL과 PD가 아름답게 결별하기에는 상황이 엄혹하다는 것도 한국 정치의 비극이다. 민주노동당의 이런 측면을 가열차게 비판하던 사회당이 번번이 제도권 진출에 실패한 것이 이 대목에서 아쉽다. 진보정당을 민주노동당이 과대 대표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물론 그렇게 따지면야 기존 보수정당들의 이합집산과 철새 행진이 더 짜증스럽지만.

최근 공안정국이 형성되어 매카시즘이 횡행하고 있지만, 나는 남 욕하기를 그치고 차분히 BD계열의 단점을 곱씹어 봐야겠다. BD의 강점을 일부 정치 자영업자들이 휘두르게 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3자 결합 이전에 BD 스스로 자신을 추스르는 노력이 필요하다. 수구기득권에 포획된 압도적 보수화의 물결에 맞서기 위해서는 저마다 제 약점을 고쳐나가려는 혁신이 필요하다.


061101
아침부터 “좌익이 판치는 세상”, “다시는 재야를 뽑지 말아야...”라는 소리를 들었다. 사무실에서야 귀머거리 겸 벙어리로 지내기로 철칙을 세운 터라 그러려니 늘 듣던 소리지만 오늘따라 살짝 귀에 거슬렸다. 몇몇 어른들이 공부도 안한 운동권을 질책할 때 나는 공부를 할 수 없었던 그 시절을 가늠해본다. 386세대의 오만과 독선을 지적할 때 나는 그렇게 해서라도 불의와 너그럽던 세태와 결별하려 했던 이들을 후하게 평가한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 놓으니까 내 봇짐 내놓으라는 게 대중의 마음이라고 야속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 권좌에 오른 386들은 마땅히 그런 요구에 부응할 책무가 있다. 관자에는 “반드시 백성을 먼저 부유하게 만들고 나서 이를 다스린다(必先富民, 硏後治之)”는 구절이 나온다. 국민이 스스로 자꾸 궁핍하다고 여기게 만드는 정부나 국회는 제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모델과는 다른 방식으로 국민들이 호의호식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일전에 백낙청 교수님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지속불가능한 발전의 유공자”라고 지적하셨다. ‘산업화세력 대 민주화세력’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민주화세력도 경제발전에 기여했다는 주장이 신선하다. 산업화세력의 경제발전 방식은 결국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지속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한국사회의 건강성을 살린 민주화세력이 크게 공헌했다는 견해에 상당 부분 동감한다. 실상 박정희의 절제를 기대하는 것보다 민주화세력의 견제가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이었음을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실물경제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일은 여간 수고로운 게 아니지만 386세대가 이 부분만 좀 더 보강한다면 시대정신을 다시금 부여잡을 수 있을 것이다. 여하간 좌익이 판치는 세상(?)에서도 이렇게 행복하게 잘만 사는 나로서는 어르신들도 조금 마음을 열었으면 좋겠다는 외람된 생각을 품어봤다. 박정희에 보여준 너그러움의 절반을 386세대로 표상되는 민주화 세력에게 보여줬으면 좋겠다. 그것은 은연중에 그네들에게 진 빚을 보답하는 작은 정성이기도 하다. 향수 속에 빠져 살기보다는 오늘날 만개한 가능성에 희망을 투자해주시는 게 더 밝고 재미날 것이다. 또 그것이 남이 아닌 자신의 머리로 궁리하는 길이다. 그러고보니 나는 얼마나 내 머리를 써서 살고 있는 걸까?


061102
본래 이번 한 주는 한자공부에 올인하고자 했다. 올인이 단순히 시간을 많이 투하한다는 의미라면 나는 올인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 개념이 효율성(Efficiency)과 효과성(Effectiveness)을 포함한다면 좀 복잡해진다. 효율성이란 투입에 대한 산출의 비율을 말한다. 1시간 공부해서 200자 외우는 것보다 300자 외우는 게 더 효율적이다. 효과성이란 미리 설정해 놓은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하느냐는 것이다. 산출물이 목표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어떤 파급효과를 가져다주는지를 파악하는 개념이다. 간단히 목표 달성률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싶다. 효율성과 효과성이 함께 발현되면야 좋겠지만, 효율적으로 정책을 수행했음에도 효과가 낮은 경우가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가령 혼잡통행료 징수로 늘 막히던 A도로가 한산해졌다고 가정하자. 세수 증대도 되니 일견 효율성이 높아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로 말미암아 차들이 우회하여 B도로에 교통량이 집중된다면 교통량의 적절한 분산이라는 정책 목표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해 효과성은 낮을 수 있는 것이다.

여하간 내 한자 공부는 효율성이 너무 낮다. 시험 유형에 최적화하여 공부를 해도 모자랄 판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심화학습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취미생활 겸해서 공부하는 것이라고 해도 기왕 시작한 거 자격증 획득을 주목표로 해야 하는데 합격가능성이 흐릿해서 그런지 오히려 샛길로 빠지는 재미가 쏠쏠하다. 미국의 경제학자 하비 라이벤스타인이 도입한 X-효율성 이론에 따르면 조직 운영의 효율성이나 개인의 열성이 경제적 성과의 차이에 더 크게 작용한다고 말한다. 흥이 나서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하면 X-효율성이 높고, 억지로 눈치 보며 일하면 X-비효율성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라도 수험 공부의 취지를 벗어나 시험에 안 나올 부분에 천착한다면 X-효율성의 요건을 가지고도 X-비효율성을 발생시키는 기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가령 고사성어 공부를 하는데 호기심을 못 이기고 고사성어의 출전을 찾아 헤매는 내 행태가 바로 기형적인(?) X-비효율성이다. 물론 효율성은 떨어져도 한자 공부의 깊이와 폭을 넓힌다는 점에서 효과성은 제법 신장했다고 변명할 수 있겠다. 그러나 목표가 한자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가 아닌 합격에 있다면 효과성도 ‘영 아니올시다’다.^^;

특히 심각한(!) 문제는 한자 공부 이외의 영역에도 손을 뻗친다는 데 있다.^^; 가령 博而不精(박이부정)이라는 한자성어를 접했다고 하자. 여러 방면으로 널리 아나 정통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독서에 있어서 정독(精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양주동 선생님의 수필 『면학의 서』에는 다독(多讀)이냐 정독(精讀)을 논하며 “'박이정(博而精)' 석 자를 표어(標語)로 삼아야 하겠다”는 대목이 나온다. “'박(博)'과 '정(精)'은 차라리 변증법적(辨證法的)으로 통일되어야 할 것―아니, 우리는 양자(兩者)의 개념(槪念)을 궁극적(窮極的)으로 초극(超克)하여야 할 것”이라는 대목에 맞장구를 치다가 양주동 선생님의 다른 수필을 찾아보며 양주동 문체의 맛에 흠뻑 빠져버린다. 문득 고등학교 시절 읽었던 수필 가운데 인상 깊었던 김소운 선생님의 『피딴문답』을 찾아본다. 썩지도 않고 병아리가 되지도 않고 피딴으로 화생(化生)함의 교훈을 다시금 곱씹다가 정신이 번쩍 든다. 博而不精을 익히다가 30분이 지나버렸다. 맙소사!


061103
11월 3일은 1929년 광주지역 학생들의 시위를 시작으로 전국의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한 지 77년이 되는 날이다. 올해부터는 ‘학생의 날’에서 ‘학생독립운동 기념일’로 명칭도 바뀌고 국가기념일로 제정됐다. 이로써 학생독립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밝히고, 제대로 기념할 수 있어서 반갑다. 문득 고등학교 교지편집부 시절 학교 축제 기간에 학생의 날의 의의 등을 묻는 앙케트를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때만 해도 유명무실한 날에 불과했는데 올해 명칭 변경과 국가기념일 제정을 계기로 이 날의 정신을 되새기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난 3월 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님이 발의한 학생인권법 개정안에는 체벌 금지, 두발 자유화 법제화를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법안을 면밀히 검토해보지는 않았지만 학생들의 권익을 보다 향상시키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개별 학교와 선생님들의 재량을 줄이는 게 마냥 옳은 일은 아니지만 학생과 학부모가 동감하는 수준의 내용이라면 법제화를 통해 학생들의 권익 보호에 이바지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요즘 아침 전철을 타면 머리가 긴 중고등학생을 많이 볼 수 있다. 모범생 원리주의자(?)였던 나는 학창시절 내내 거의 2주에 한번 꼴로 머리를 잘랐다. 중고등학교 시절 동안 단 한번도 지각을 안 하고, 단 한번도 두발검사에 걸리지 않는 게 모범생 원리주의자로서의 내 화려한(?) 이력이다. 다만 어이없게도 평소에 안하던 손톱 검사를 하는 바람에 허를 찔려서 용의 검사 무적발 신화는 깨졌지만 말이다.^^; 여하간 나는 지금도 머리 기르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조금 길렀다 싶어도 싹둑싹둑 잘라버린다. 나처럼 머리 모습에는 무심한 녀석에게 머리를 기르라고 강요한다면 그것도 참 고역일 게다. 여하간 두발 자유화를 실시하는 학교가 늘어간다는 건 우리 사회의 미시적 진보의 하나로 받아들여도 좋을 거 같다. 개인의 자유 영역이 늘어나는 것이 진보의 요체가 아닌가. 머리카락 길이와 학업성취도의 상관관계를 증명하려는 시도는 별로 있지도 않았지만 시도한다고 해도 실패할 것이 분명하다. 혹시 두발 자유화로 인해 외모만 신경 쓰다가 학업을 소홀히 할까 염려하기 전에 자유에 대한 책임의식을 키우지 못한 우리 교육의 초라한 몰골을 돌아봐야 한다.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라고 했으니 제발 강제 이발만은 하지 말자.

학생독립운동 기념일의 주고객(?)은 아니지만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는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말씀을 곱씹으며 더 열심히 배우고 익히는 학생, 시시한 실천을 게을리 하지 않는 학생이 되기를 다짐해본다.


061104
한국어문회에서 주관하는 한자능력검정시험 1급을 쳤다. 이번에는 시험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무던 애를 썼다. 가채점 결과 35개~40개 정도 틀린 걸로 예상된다. 200문제 가운데 80% 이상을 득점해야 하는 만큼 아슬아슬한 상황이다. 내 목표(?)였던 161개 맞아 합격하기에 거의 근접하긴 했다.^^; 이번에도 화려한 오답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胡蝶(호접)을 “호랑나비”로 풀이했는데 그냥 나비라고 써야 하는 건지 솔직히 몰랐다. “나비 접”자에 이미 나비의 뜻이 다 들어 있어서 무언가 수식어를 넣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갔다. 장자의 호접몽이 호랑나비가 아닌 그냥 나비였다는 걸 잘 알면서 헛갈렸다. 푸하하~ 내가 채점위원이라면 안쓰러워하며 가위표를 할 거 같다.^^; 엎어진 수레바퀴라는 뜻으로, 앞서 가던 사람이 실패한 자취를 이르는 말인 복철(覆轍)은 앞사람의 교훈으로 풀이했다. 실패라는 말을 안 써서 틀렸다고 해도 변명할 거리는 없다. 매우 적은 분량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인 호리(毫釐)는 정말 처음 보는 단어라 그냥 비워두려다가 작은 곳을 다스림이라는 나도 믿지 않는 답을 써넣었다.^^;

한자어 쓰기 문제는 내 나름대로 가장 정성을 들인 분야라 생각보다 틀린 게 적었다. 疏忽(소홀), 期數(기수), 煩雜(번잡) 정도만 확실히 틀렸고, 태반은 아직 가부를 모르겠다. “이 한자들의 태반은 신조 한자어의 약어이다”라는 부분인데 반수 이상이라는 뜻의 “태반(太半)”과 거의 절반이라는 뜻의 “태반(殆半)” 가운데 나는 전자인 太半을 썼는데 문맥을 볼 때 크게 틀린 거 같지는 않지만 어문회 시험은 문제와 답안을 공개하지 않으니 알 길이 없다. 어려운 문제가 많은 동음이의어 문제는 잔실수가 많았다. 公募(공모), 장사(壯士), 葬事(장사) 같이 아깝게 틀린 문제가 많았다. 한자어 쓰기 문제는 연습을 많이 했다 보니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응용할 생각은 안 하고 머리가 하얘지는 부작용이 나오지 뭔가.^^; 유의어 쓰기 문제도 역시 신유형의 향연이었는데 “銓( )”이라는 문제에서 “저울질할 전”이라는 단어 때문에 저울의 뜻을 가진 “秤”이라고 썼는데 “저울대 형”인 “衡”이 훨씬 더 잘 어울린다. 입시 전형 등에서 쓰이는 전형은 됨됨이나 재능 따위를 가려 뽑는다는 뜻이니 이 정답에 기꺼이 승복한다. 彌縫策(미봉책)의 유의어인 姑息策(고식책)은 “姑”가 도무지 생각이 안나 “枯”라고 썼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인가 고식지계에 대한 시험문제가 나왔을 때 틀린 경험이 있는데 이번에도 또 틀렸다.^^; 姑에 시어미라는 뜻 말고 잠시, 조금동안이라는 뜻이 있었음을 이제야 알았다.

정말 난생 처음 보는 단어가 있었는데 거동궤 서동문(車同軌 書同文)이 그것이다. 여러 지방의 수레의 너비를 같게 하고 글은 같은 글자를 쓰게 한다는 뜻으로, 천하가 통일된 상태를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좋은 거 배운 거 같다. 사자성어 문제에는 예측 못한 어려운 성어들이 많이 나왔다. 목불식정(目不識丁)과 비슷한 뜻으로 어(魚) 자와 노(魯) 자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어로불변(魚魯不辨)은 시험 시간 내내 떠오르지 않다가 시험을 마치고 근처 헌책방을 향하는 길에서 떠올랐다. 역시 산책은 두뇌 향상에 도움이 된다.^^; 소를 마주 대하고 거문고를 탄다는 뜻으로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깊은 이치를 말해 주어도 알아듣지 못하므로 아무 소용이 없다는 “대우탄금(對牛彈琴)”은 나중에 악용(?)할 소지가 있어서 너무 담아두고 있지는 말아야겠다. 눈 위에 난 기러기의 발자국이 눈이 녹으면 없어진다는 뜻으로 인생의 자취가 눈 녹듯이 사라져 무상함을 일컫는“설니홍조(雪泥鴻爪)”는 왜 이제야 알게 되었는지 아쉽다. 초로(草露)와 같은 인생을 이렇게도 근사하게 표현할 수 있구나 싶다. 여하간 이런저런 오답들이 있었지만 이 참에 많이 배웠으니 설령 159개로 떨어지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의연하게 대처하고 싶다. 물론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만.^^;

시험 마치고 헌책방 숨어있는 책에 다녀왔다가 청원이 등을 만나러 노원으로 향했다. 청원이가 하도 청해서 심야영화로 타짜를 봤다. 평경장의 명연기에 매료되었고 이제 내가 좋아하는 배우에 백윤식이라는 이름도 써넣어야 할 거 같다. 타짜가 말하고자 하는 건 결국 설니홍조(雪泥鴻爪)가 아니었을까.


061105
토요일 밤에 심야영화를 본 관계로 노원역부터 집까지 걸어가기로 결심했다. 물귀신 작전으로 청원이를 하계역까지 함께 걷게 했다. 범여권의 정계개편 이야기가 좀 나왔는데 나는 행정학의 논쟁거리 가운데 하나인 정치 행정 이원화 등에 대한 이야기로 한참을 에둘러 갔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간 뒤에 나는 여권내 통합신당파의 논리는 동서 구도 부활이 아니겠냐며 조심스레 말했다. 오늘자 프레시안에서 임경구 기자님은 “'DJ의 호남'과 '盧의 영남'이 충돌할 때”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영남 중심주의'와 '호남 우선주의' 간의 뿌리 깊은 반목을 진단했다. 나도 결국 생후 5개월 간 살았던 대구의 지세(?)에 눌려 영남 중심주의자가 되어버렸는지 모르겠지만 열린우리당의 창당 정신은 그만큼 아름다웠다. 우리당의 원내 1당은 단순히 탄핵 역풍에 그치기보다 정치개혁과 지역주의 극복을 내건 그네들의 희망에 적잖은 유권자가 꿈을 투자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당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졸지에 이상과 명분에 집착하는 고루한 집단이 되어버렸지만 3년 만에 자신들의 존립 근거를 스스로 허무는 모습은 그리 떳떳하지 못하다. 한번쯤은 당 간판을 걸고 대선이나 총선을 치러야 한다는 정치 도의는커녕 홍익이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 경영학도의 제1원칙 중의 하나”인 high risk, high return을 감내하지 못하고 칭얼거리는 꼴이다. 과연 “꼬마 우리당”으로 남아 마지막까지 국민의 엄중한 심판을 달게 받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하기야 주인들 수준이 변변치 못한데 대리인들이 빼어나길 바라는 것도 너무 지나친 욕심일수도 있겠다.

노원역에서 집까지 걸으면 보통 걸음으로 50분 정도 걸리는 듯싶다. 군자대로행(君子大路行)을 실행하기 좋게 그냥 큰길가로 직진만 하면 된다. 다음날 일정 부담이 없다면 종종 이렇게 걸어다녀 봐야겠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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