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덕 변호사님은 『포기하지 않으면 불가능은 없다』이라는 책에서 당신이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사용한 t1t2 판단법을 소개하셨다. 시간적 개념, 시기적 중요성이 가치판단에 중요한 요소라는 내용이다. 는 시간(time)의 약자이고, 1, 2는 어느 한 시점을 의미한다. 그 공식은 다음과 같다.


A>B.
But A(t1) + 0(t2) < B(t1) + A(t2).
Then B(t1) > A(t1).


A와 B의 두 가지가 있을 때 A가 B보다 더 중요하고 하고 싶은 일이다. 그런데 A를 먼저 하게 되면 나중에 B를 할 수 없지만, B를 먼저 하게 되면 나중에 A도 할 수 있다고 가정하자. 이럴 경우에는 B를 먼저 선택하고 나중에 A를 하는 것이 낫다는 사고 방법이다. 어느 시점(t1)에서 A가 더 중요하게 보이지만 시간이 흐른 시점(t2)에서는 B가 더 중요한 것이었다고 느낄 수 있는데다가, A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해서 B를 희생했다면 나중에 B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가치(present value)을 애호하고, 시간에 대한 할인(time discount)을 경계하는 재무이론의 기초와는 다소 어긋나는 이야기다.


물론 “A(t1) + 0(t2) < B(t1) + A(t2)” 에는 허점이 많다. 대개의 경우 A도 t2 시점에서 0으로 수렴하기 일쑤다.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어야하지 결심한 사람은 대개 목표했던 책을 상당 부분 못 읽게 된다. 1박 2일로 술 마시며 노는 것도 젊을 때 아니면 나이 먹어서 하기는 많은 무리가 따르기도 한다. 유능해지면 질수록 그 유능함을 써먹느라 몸과 마음이 닳는 게 대부분이다. 우선 자리 좀 잡고 나서 좀 기품 있게 살아보자는 계획을 성사시키기가 까다롭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많이 보아왔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기란 참 어려운 법이다. 어쩌면 신자유주의의 물결의 가장 큰 폐해 가운데 하나가 덜 유능할 때, 적당히 무능할 때를 만끽할 여유를 앗아간다는 점인지도 모른다. 자유는 유능함과 비례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또한 A, B의 설정은 일견 공정한 출발 같아도 B가 내포한 무게가 더 묵직하기 마련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세월의 무게를 견뎌낸 만하다면 무척 가치롭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가령 연애는 나중에도 할 수 있지만 고시는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다, 나라 걱정은 나중에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고시 공부는 학생 신분 벗어나면 무척 힘들다고 생각해보자. 이처럼 B를 통해 A를 이루기 위해서는 B는 권력지향적이거나 재물지향적인 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건 비교적 또렷하다. 이를 통해 획득한 물적, 사회적 자본을 바탕으로 A를 도모할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t1t2 판단법에는 A가 더 중요하고 하고 싶은 일이라고 가정하지만 세월의 무게를 못 견뎌내는 행위는 단기적 쾌락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A를 위해서 B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B를 위해 A는 덤으로 얻고자 하는 의지가 더 강하지 않을까 싶다.


마이클 왈쩌(M. Walzer)는 ‘영역의 정의’, ‘다원적 평등’이란 개념을 들어 영역과 영역 사이에 높은 담장이 있어 하나의 가치가 그 영역 안에만 머무를 때 사회적 정의가 실현된다고 주창했다. 왈쩌는 한 영역의 가치가 다른 영역에 침투해서 침투한 영역의 가치를 왜곡시키거나 무너뜨리는 일을 ‘전제(tyranny)’라고 칭했다. 다원적 가치의 평등한 영역을 보장하고, 어떠한 사회적 가치도 지배의 수단으로 이용되지 않아야 한다는 왈쩌의 주장은 이상적이지만 충분히 음미할 만 하다. 왈쩌의 견해를 빌려 t1t2 판단법에 전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고 한다면 성격 모난 녀석의 괜한 트집이 될 공산이 크다. 고승덕 변호사님은 사람마다 다른 우선순위가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승덕 변호사님의 아름다운 공식에 약간의 첨삭을 통해 좀 더 일반화된 공식을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다.^^;


내가 어찌어찌 좀 더 정교한 공식을 만들었다고 치더라도 그게 무슨 실익이 있을까. 이론적 모델을 가지고 승부하는 학자가 아니고서야 보통 사람들의 승부는 실천에 달려 있다. 고승덕 변호사님과 내가 차이가 난다면 목표의 유무, 삶에 대한 애착의 강약이 아닌 “자신에 대한 관대도의 차이”에서 비롯될 것이다. 퇴계 선생의 『자성록』 서문에는 논어의 한 구절을 인용해서 “옛사람이 말을 함부로 하지 않은 것은 몸으로 실천함이 말에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古者言之不出, 恥躬之不逮也)”라는 말씀이 나온다. 솔직히 이 말 잘 실천하지 못했다. 그간 내 자신도 지키지 못할 말들을 많이 했다. 나는 내 자신에게 좀 더 덜 너그럽거나 아니면 그럴듯한 다짐을 남발하지 않는 게 좋겠다.


문화혁명 당시 마오쩌둥은 홍위병을 격려하며 모든 반항과 반란에는 나름대로 정당한 이유가 있다는 ‘조반유리(造反有理)’라는 말을 남겼다. 수정주의자들에 반항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뜻인 이 말을 조금 바꿔 ‘성패유리(成敗有理)’라고 써본다. 성공과 패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너무 결과 위주의 사고 같지만 그렇다고 이만한 사회적 통념 혹은 상식을 부러 폄하할 까닭이 없다. 개인이나 조직의 성공사례와 실패사례에서 부지런히 보고 배워야겠다. 고승덕 변호사님의 성공에 이유가 있듯이, 나의 이룸에도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공부 좀 하자.^^;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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