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日記(06.11.13~06.11.19)

일기 2006. 11. 20. 00:30 |
061113
집 앞에서 오래간만에 성희와 미현이를 만났다. 작년까지는 동네 모임도 종종 가지고 했었는데 몇몇 친구가 외국으로 떠나는 바람에 그간 통 못 보던 친구들이었다. 셋이서 수다를 떨다 보니 미현이는 인문계생들의 알 수 없는 이야기라며 손사래를 쳤고, 나와 성희는 견해차를 적잖이 드러나며 재미난 언쟁을 벌였다. 다만 아쉬운 것은 내 요즘 지론인 요식업계 소비(더 정확히는 주세 납부)를 통한 내수경기 진작에 다들 시큰둥한 반응이었다는 것이다. 내 케인즈학파적 시각에 성희는 그렇게 총수요에 천착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응수했다. 그렇다고 성희가 통화주의자 같지는 않고 그 대신 욕망을 부추기는 사회적 가치관 자체를 문제삼는 것으로 보였다.

잠깐 사이에 오만가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성희는 농담 삼아(진담일지도) 내가 국가주의에 민족주의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타박했다. 아무래도 국부 증진을 주창한 게 그렇게 비춰진 모양이다. 공교롭게도 오늘 아침에 내가 신봉하는 서구식 자유주의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유가 공동체주의 등을 좀 끌어다 써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하긴 했다. 천민 자본주의의 횡행과 시장만능주의의 쾌속질주에 적당한 제동을 거는데 유교적 방식이 유용하게 쓰일 거 같다. 그토록 극복하고 싶었던 유교적 관습과의 화쟁(和諍)을 통해 장점을 가려 쓰는 데 인색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다.

나는 내가 민족주의자라는 소리에 일면 수긍했다. 내 민족주의는 북한을 아우르지 않으니 좀 더 자세히는 대한민국주의자쯤 되려나. 아무리 못난 나라라고 해도 제 나라가 잘 되길 바라고, 내 나라에 보탬이 되고픈 마음을 품는 거 자체는 그리 나무랄 일이 아닐 것이다. 뭐 그 정도가 지나쳐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부조리와 모순 해결에 머뭇거릴 수도 있겠다만. 나는 궁극적 소수로서의 개인이라는 명제에 거개 동감하면서도 세계시민주의에는 고개를 젓는다. 인류의 감수성이 거기까지 다다르기에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거 같다. 특히 우리의 경우 지역감정도 해결하지 못해 허덕이는 판에 더 일러 무엇하겠는가. 우리에게는 건전한 민족주의가 좀 더 많이 필요하다. 민족주의 자체가 악이라고 한다면 세상 모든 주의주장은 거의 다 악일 게다.

잠깐 대화였지만 성희에게 많이 배워야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대학생활 내내 사회과학 공부를 많이 해서 그런가 나의 수박 겉핥기식 잡설과는 다른 무언가가 느껴졌다. 언제 만나 서로의 썰(?)들을 풀어 보면 무척 재미날 거 같다. 친구의 내공 앞에 괄목상대를 하는 건 가슴 뛰는 일이다.


061114
우군에게

아이 참 유한계급, 고학력 룸펜 이런 말들은 좀 아껴서 하는 게 어떻겠니. 일개 학생에 지나지 않는 우리가 그런 허울까지 뒤집어 써야할 거 같지는 않다. 그건 너무 지나친 자조가 아닐까 싶다. 아무리 자기 경계로 삼는다고 해도 말이지. 솔직히 나는 유한계급이 되어서 내가 하고 싶은 공부만 해도 먹고 사는데 지장 없기를 늘 꿈꾸지만 그게 내가 유한계급이라는 결정적 증거가 될 거 같지는 않다. 그 욕망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그걸 줄이는 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영역일 뿐 사회적 강제나 주변 눈치 때문에 그것이 교정되는 건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 각설하고.

국가주의는 국가폭력이나 광신적 애국주의 등의 부정적 함의가 많이 남아 있으니 차치하고라도 과연 한반도에서 민족주의를 손쉽게 고리타분한 것으로 치부할 수 있느냐의 문제의식은 좀 있어. 하긴 여하간 단일민족(물론 믿지 않지만)에 가깝다고 여겨지는 우리의 경우 민족주의는 주로 남북관계 등에서 쓰이고, 국가주의는 국익 논쟁 같은데 쓰이는 거 같다만 둘을 엄격히 가르는 것도 실익이 적을 수는 있겠다.

여하간 내가 말한 민족주의는 거창한 것이라기보다는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추진하는 우리 고전 번역 사업이라든가, 한국사를 읽고 공유한다든가 이런데 치중되어 있음을 밝힌다. 좀 더 정확하고 아름다운 모국어를 구사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것도 내 민족주의적 근성(?)의 발로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여기다가 대한민국의 의사결정이 분단체제 때문에 많이 제약된다는 구조적 문제에 대한 인식도 추가할 수 있겠지만 내게는 이 부분은 좀 부차적이라서 말이지. 민족주의의 집단주의적 속성을 나도 익히 알고 늘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지만, 개인의 삶이 온전히 제 자신의 것이라고 보기 힘든 거 같다. 자유주의밖에 몰랐던 내가 공동체주의 주장에도 귀 기울이는 징조라고 생각해주렴.^^;

너는 내가 국가적 해법에 치중하고 있다고 비판했어. 무척 타당한 지적이야. 하지만 나는 현시점의 과제가 사회적 대타협이라고 생각해. 가령 노사간의 대타협, 사회 복지 수준을 둘러싼 대타협, 연금 개혁을 위한 대타협 이런 것들 말이지. 그래서 갈등비용과 거래비용을 줄이고, 예측가능한 사회를 구축하는 게 선진 민주주의 수립 혹은 민주주의의 공고화라고 여기고 있어.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념과 정책에 따른 정당정치를 흠모하고 있기도 하고 말이지. 우리 사회가 어떤 식으로 나아가야할지에 대한 백가쟁명 백화제방도 좋지만 최소한의 합의를 일구어내는 게 요긴하다고 생각해. 개인적으로는 그 사회적 타협의 내용에 자유주의적 요소가 많이 포함되었으면 좋겠고 말이지. 치열하게 토론하되 깔끔하게 승복하는 문화가 좀 필요하지 않을까. 물론 우리 사회의 압도적 보수 우경화의 물결 때문에 소수파의 견해가 거의 반영되지 않을 우려가 있지만 그 우려는 또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보고 말이지.

나 또한 우리 사회처럼 행복마저 “유니폼”이 되는 사회가 곤혹스럽다. 고정적이고 획일화된 아름다움을 극복하는 건 내가 고등학교 철부지 시절부터 세웠던 꿈이고 말이지.^^; 개개인이 개성적이고 창의적이며 자유로울 수 있는 사회는 어떻게 꾸려나가야 하는 건지 참 어려운 문제다. 나는 ‘차이’가 폭압적 ‘차별’의 징검다리가 되는 것은 단호히 반대할 뿐 그 밖에는 개입하지 않는 매우 소극적 입장인 거 같다만. 일찍이 고종석 선생님은 “변방을 넓혀 중앙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지. 네 말에서 그걸 읽었어. 어쩌면 “모두가 궁극적 소수 곧 개인인 세상”을 말하려고 한 건 아니었을까? 어떤 주의주장의 신봉자 이전의 개인, 어떤 학연혈연지연 이전의 개인 이런 것들 말이지. 물론 그런 다채로운 정체성이 만개하는 세상이 좋다, 아니 옳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드리워진 집단의 표지를 손쉽게 벗겨내지는 못할 거 같다. 조금 과장 섞어 말하면 내가 민주노동당 지지자를 복선 없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듯이, 네가 경영학도의 언동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거 같다.

예나 지금이나 진정한 횡설수설의 제왕은 바로 내가 아니겠니.^^; 정제되지 않은 헛소리지만 일단 생각나는 대로 늘어놓아 봤어. 네 숱한 지적대로 나도 미끈한 말보다는 시시한 실천을 좀 더 모색해볼게. 아마 네게 좀 더 많은 구박과 자극을 받아야할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대화가 차이점을 더 드러낼지 오히려 더 좁힐지는 모르겠지만 나 또한 “to be continued!”를 외칠 친구가 있어서 기쁘다.^-^


061115
손학규 전 경기도 지사님이 13일 성명을 통해 “한나라당이 ‘부자비호정당’이라는 소리를 듣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한나라당의 대책이 서민이 아닌 부자들에게 이득이 될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경고하며 부동산 대책에 대한 적극적인 견해를 밝힌 것은 신선하다. 종합부동산세가 “과세대상이 전체 가구의 2%를 약간 넘는 정도이므로 지금 조정이 시급한 것이 아니다”고 말하고, “한나라당의 주택정책은 무주택자와 1가구 1주택자를 대변하는 방향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외치는 게 이채롭다.

“보수당이란 게 원래 기득권층을 대변하고 분배보다는 성장위주의 정책을 펴며 중산층 이상의 국민에 정책을 맞추는 당인데 서민을 위한 정책을 펴고 싶다면 당을 바꾸거나 신당을 만드세요”는 어느 누리꾼의 지적도 통쾌하지만 손 전 지사님의 그런 발언은 일단 반길만한 일이다. 득표지향적인 catch-all party의 장점은 이렇게 균형감각을 발휘하려고 한다는 점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랜 기간 진보와 보수의 정당정치가 발전한 서구사회에서는 중앙으로 수렴하는 경향을 보이는 거 같다. 우리는 매우 작은 차이를 침소봉대하는 보수 양당이 티격태격하며 이념과 정책에 따른 고정 지지계층이 있다기보다는 지역주의에 좌지우지 되는 경향이 높다.

지난 7일 치러진 미국 중간선거에서 공화당 우세지역에서 승리한 민주당 의원 상당수가 보수 성향 민주당원을 뜻하는 ‘네오뎀(neo-Dem)’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 정치판에는 유사 네오뎀들이 너무 많아서 문제다. 특히 열린우리당에는 한나라당 성향 우리당원, 민주당 성향 우리당원이 넘쳐나는 것 같다. 네오뎀은 제 지지자들의 의견을 수렴할줄 안다는 미덕이 있지만 우리당 내 유사 네오뎀들은 제 안위에 더 관심이 많은 거 같다. 1968년 미국독립당을 창당했던 조지 월러스는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에는 1달러는커녕 25센트 정도의 차이도 없다”고 말했다고 하지만 나는 그 25센트 차이가 참 부럽다. 우리네 거대 양당은 10센트의 차이를 선거 때 2달러로 불리는 몹쓸 버릇만 가득하다.^^; 이념과 정책에 따른 정당정치를 구현한다는 것이 반드시 10센트의 차이가 50센트로 벌어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작은 차이도 내실 있게 경쟁한다면 얼마든지 긍정적으로 발현될 수 있을 것이다.


061116
60여만 명이 결전을 치른 수능 날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99년 11월 17일 내가 쓴 일기를 보니 수험생 형, 누나들의 건투를 빌며 내가 올린 진언(?)에는 “학창시절의 그 마음, 꿈과 이상을 사회에서 헌신짝처럼 내던지지 말고 지켜나가고 소중히 하기를” 운운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 때 멋 모르고 올렸던 그 말이 이제는 고스란히 내 차지가 되었다.^^; 여하간 한 무더기의 싱싱한 가능성들이 세상을 향해 날갯짓을 하려고 하고 있다. 후생가외(後生可畏)라고는 하지만 뒷사람에게 자꾸 따라 잡히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고 보니 5년 전 사상 초유의 점수 대폭락 사태를 빚었던 충격의 2002 수능이 떠오른다. 이제 제법 시일이 흘러서 그 때를 별다른 통각 없이도 곱씹어 볼 수 있다. 또렷한 기억은 아니지만 나도 원점수가 30~40점 정도 떨어졌는데 깊은 내공(?)을 자랑하던 언어영역이 100점에서 0.2점 모자란 건 충격적인 사실이었다(당시에는 120점 만점). 100점도 되지 않는 점수로도 상위 3%로 1등급을 받을 수 있었으니 당시 시험 난이도가 얼마나 매서웠는지를 알 수 있다. 언어영역에서 원점수 기준 120점 만점을 받은 수험생이 한 명도 없었고 118점이 최고점이었다는 궁색한 변명을 해본다. 언어의 제왕(?) 소리를 종종 들었던 녀석으로서 110점 정도는 욕심을 냈어야 했는데 여러모로 아쉽다. 다시 보라고 하면 절대 그 점수 못 맞겠지만.^^; 모의고사 두 번 중에 한 번은 72점 만점을 받던 사회탐구 영역은 67점으로 무려 5점이나 감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위 1%가 나왔다.

여하간 나는 이미 수시모집으로 대학교를 조건부 합격한 상태여서 종합등급 2등급 이상만 획득하면 최종 합격이라 부담이 훨씬 덜했는데도 역시 수능은 수능이었다. 사실 나는 모의고사에서 특별히 우수한 편은 아니었다. 모든 걸 잘해야 하는 현행 수능체제에서 나는 수리영역과 과학탐구영역에서 이런저런 누수가 많았다. 내가 정작 좋아하는 국어와 사회 공부를 제쳐놓고 늘상 수학과 과학 공부에 매달렸던 건 서글픈 일이다. 우스운 건 난 아직도 매우 적게 공부한 국어와 사회가 기억에 가장 많이 남는다. 2002 대입부터 전격 확대된 수시모집 제도가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지금 이 학교, 이 학과에 있지 못하고 새로운 삶을 꾸려나갔을 게다. 제도가 어수선할 때 강한 내 면모가 드러난다고나 할까.^^;

수능 점수가 예측 가능한 수준을 넘게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2002 수능부터 총점기준 누가성적분포표(전국 석차)를 공개하지 않게 되자 고3 교실은 적잖이 혼란스러웠다. 나는 이런 분위기를 알면서도 98년 입시 개혁안 때 이미 공언된 총점제 폐지 등의 틀을 원칙적으로 찬성한다고 밝혔고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많은 지탄을 받았다. 물론 내가 정시모집에서 제 위치를 명확히 몰라 애끊는 심정까지 겪어보지 못했기에 내 주장의 설득력이 많이 떨어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총점석차에 의한 대학 서열화를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굽히지 않았고 참 많이 상처도 받았던 거 같다. 여하간 요즘은 선택과목도 다양해지고 영역별 점수 반영이 활발해져서 나 때보다는 많이 안정화된 거 같다. 이렇게 정책이 자리 잡는 건 좋은 일이지만 안착 비용을 줄이기 위한 노력이 더 필요하다. 더군다나 교육정책 같은 민감한 사항에서는 더욱 세심해야 한다.

여하간 수험생 여러분 고생 많았습니다. 수능 시험장에서 기도하는 절실한 마음으로 산다면 뭔들 못하겠습니까.^-^


061117
차기 총장 예비선거에서 부적격자로 지목돼 탈락한 어윤대 고려대 총장님에 대한 설왕설래가 한창이다. “교수들이 변화를 싫어하고 안정만을 추구하는 측면이 있다”는 어 총장님의 인터뷰에 교수의회에서 권고문을 내고 교수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발언을 삼갈 것을 권고하기까지 했다. 중간에 와전된 내용들도 적잖겠지만 이제 결과가 나온 이상 관련 당사자들이 깨끗하게 승복하는 게 도리다. 어 총장님이 연임에 실패했다고 해서 교육 효율성 제고와 교수사회 혁신 과제가 통째로 폐기되는 건 아닐 것이며, 연임에 성공했다고 해서 학교를 기업과 동일선상에 놓고 보는 사고방식의 단점이 줄어드는 건 아닐 것이다. 어 총장님 스스로 50%의 리스크를 안고 도전한 연임이라고 하신 만큼, high risk, high return이라는 경영학도의 자세를 보여주시길 바란다.

경향신문 사설의 지적대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CEO라는 말이 가치중립적으로 쓰이지 않고 있는 것 같다. CEO가 “모든 조직의 책임자들이 반드시 구현해야 할 지고지선의 가치이자 전범(典範)”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과문한 내가 듣기에 완벽한 리더십 모델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다만 CEO형 지도자가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을 상당 부분 반영하고 있다면 무게중심이 그 쪽으로 쏠리는 것을 부러 백안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CEO를 기업식 경영방식을 구사하는 리더십으로 좁게 정의하더라도 구체적 실천방안은 여러 갈래로 나뉠 수 있는 만큼 섬세하게 접근해봐야겠다. 경영, 경제 전공자나 기업에 몸 담았던 이들이 너도 나도 CEO형 지도자를 자처하는 게 민망해서 하는 소리다. 내가 경영학도인 만큼 좀 위악적으로 말해보자면 우수마발이 CEO를 외치는 형국이다. 우리 사회가 너무 획일적이다 보니 리더십마저 유행에 민감한 게 아닐까 싶다.^^;

끝으로 어윤대 총장님 그간 참 고생 많으셨습니다. 유종의 미 거두시리라 믿습니다. 고맙습니다.


061118
선배님들과의 번개 모임 장소가 변경되어 2년 만에 강남역을 향했다. 내가 뭐 강남을 부러 꺼리는 건 아니지만 인연이 많이 닿지 않는 건 사실이다. 삼성역 코엑스몰 정도를 한 해에 두 어 번 가는 정도를 제외하고는 강남을 좀처럼 찾아가지 않는다. 그만큼 네게는 많이 낯선 동네다. 나는 최근 내수경기 진작을 위한 술 소비 등 소비 확대정책을 구사하고 있다. 그 활동 반경을 강북 동부의 중랑구, 노원구, 도봉구, 성북구, 동대문구, 성동구, 광진구, 강북구 등 8개구와 인접한 중구, 종로구 정도 잡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오면서 내가 강북 주민으로 산지도 10년이 넘었고 학교도 계속 그 반경을 넘지 않았으니 나도 모르게 강북을 편애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강남역 근처에서 즐거운 담소를 나누는 와중에도 귀갓길을 걱정해야 하듯이 강남은 내게 아직은 심리적으로도 지리적으로도 가깝지 않는 곳이다. 11시 20분쯤 먼저 자리를 나오면서 집으로 향하는 길 내내 역지사지를 생각했다. 보통 학교 근처에서 대학 모임을 가지면 나는 집이 가깝다며 부담 없이 놀았던 적이 많았는데 남쪽 동네에 사시는 분들은 그렇지 않을 수 있음을 그간 너무 잊고 있었다. 아무리 유쾌한 모임이었다고 해도 전철도 끊긴 시간 붐비는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건 꽤 고역이다. 번번이 엄청난 택시비를 감당할 여력이 학생에게 있을 리도 없다. 그런걸 내색하지 않고 마다하지 않고 모임 때면 자리를 빛내주는 분들이 있다는 건 참 고마운 일이다. 일요일 아침에 일정이 있어 부득이 자리를 떨치고 나왔지만 다음에는 강남 어딘가에서도 밤을 지새우며 놀아봐야겠다. 그렇게 한 번 정(?)을 통하면 앞으로 나의 남행이 마냥 거북하지만은 아닐 게다.

처음 뵙게 되어 기뻤던 우석형님, 납세자가 계산하자는 멋진 제안을 하셨던 인호형님께 각별히 감사 드리며, 졸지에 막내가 되어 몸둘 바를 몰랐던 나를 비롯한 홍익, 정석이에게도 고맙다. 무엇보다도 다음에는 준희형님과 많은 대화를 나눠야겠다.


061119
2006년 6월 영월댐(일명 동강댐) 건설이 백지화됐다. 생태계의 보고를 지키겠다는 환경적 가치가 설득력을 얻은 이례적인 사건이다. 그런데 환경단체 등의 보고에 따르면 댐 건설 계획 백지화 이후 동강은 오히려 더 오염되었다고 한다. 동강 러시가 벌어져 관광객들이 버린 쓰레기와 오물로 1급수 청정 하천이었던 동강의 물이 2급수로 떨어지기까지 했다. 지방자치단체도 산을 깎아내고 도로를 내며 관광 자원화에만 열중했고, 천혜의 비경이라는 찬사가 무색하게 많이 훼손된 모양이다.

최근까지도 댐 건설론자들은 동강댐 등 당초 계획되었던 댐들이 건설되어야 집중 호우 때 인명과 재산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남한강 수계에는 북한강 수계와는 달리 다목적댐이 충주댐 하나밖에 없어 물을 가둬둘 댐이 부족하다는 주장도 경청할만하다. 하지만 동강댐 등이 홍수 조절 효과가 없고, 경제성까지 별로 없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환경 문제에 대해 크게 아는 바는 없지만 앞으로 이런 식의 갈등은 재현될 소지가 많다. 일전의 천성산 터널공사 논란도 이와 비슷한 갈등이 표출되었다. 이슈가 터지면 치열하게 논쟁하다가 가까스로 봉합되면 문제의식이 소진되어 후속조치에 대한 관심이 멀어지는 악순환의 연속이다. 날마다 터지는 사건사고에 눈이 휘둥그레지기 일쑤고, 먹고살기 바쁜 보통 사람들에게 그만한 책임감을 강요하는 건 지나친 처사지만 말이다.

2004년 문화재청 국정감사 때 열린우리당 이광철 의원님이 내놓은 고려왕릉 보존관리 실태조사 보고서는 방치된 고려왕릉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올 봄에 실제 몇 군데 답사를 다녀오니 여전히 황량하고 적막한 곳이었다. 특히 고양시 공양왕릉의 경우 2001년 크게 훼손되어 도굴 된 게 아니냐며 한바탕 난리가 났는데 도굴 의혹 기사가 쏟아진 이후 관련 기사를 뒤적여 봤지만 추후에 어떤 결론이 났는지는 알 길이 없다. 문화유산 관리의 허술함보다 더 서글픈 것은 그 때 그 때 잠깐 관심을 갖다가 잊어버리는 우리들의 냄비근성이 아닐까 싶다.

“동강의 비극”은 정책 종결에 따른 사후조치 미흡이 어떤 참상을 가져다 주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동강댐을 포기하면서 지키려고 했던 가치들을 유지하기 위한 체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라도 해야할 때가 있는 법이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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