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남건을 기억하라!

문화 2006. 12. 3. 22:09 |

드라마 <대조영>에서 빛나는 열연을 보였던 연개소문이 타계했다. 나는 연개소문에 대한 신채호 선생님의 긍정적 평가에 상당 부분 수긍하면서도 연개소문 정권의 한계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귀족연립체제의 모순을 극복하는 제도개혁이 아니라 사적 권력기반을 강화하는데 치중했다. 시스템의 개편에 집중하지 않고 1인 개혁에만 몰두함으로써 자신의 사후에 불거질 혼란에 대한 면밀한 준비가 없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연개소문이 임종을 앞두고 아들들에게 “너희 형제들은 물고기와 물(魚水)처럼 화합해 벼슬자리를 다투지 말라”고도 유언했다고 하지만 실효성 있는 방책은 마련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665년 연개소문 사후에 벌어진 그의 자식들 간의 골육상잔은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지한 리더십이 얼마나 허약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결국 연개소문이 죽은 지 3년 만에 고구려는 멸망했다. 연개소문은 자신이 그토록 지켜내려 애썼던 고구려의 존속을 위해 자신의 자식들에 대한 단속이 있었어야 했는데 그도 부정(父情)은 버릴 수 없었나 보다. 그렇다고 고구려 멸망의 책임을 연개소문과 그 모자란 아들들에게만 전가하는 것도 너무 과하다. 큰집이 무너지는 것을 나무 기둥 하나로 떠받치지 못하듯 이미 기울어지는 대세를 혼자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음을 비유하는 말인 ‘일목난지(一木難支)’가 떠오른다. 최고 권력자들의 다툼이 아무리 심했던들 3년여만에 나라가 망한 것은 잇따른 전쟁으로 말미암은 고구려의 내상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당나라 수도였던 낙양 교외 북망산 일대에서 발견된 천남생묘지명 등을 살펴보면 연남생 이하 4대가 당나라에서 누린 부귀영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남생은 동생들과의 권력쟁탈전에서 패하자 당군의 앞잡이가 되는 반역을 저질렀다. 묘지명에는 마지막까지 항전한 남건은 본래 처형될 계획이었으나 남생이 간청해 유배형에 그쳤다고 쓰여 있다. 조국을 배신한 남생의 마지막 형제애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그 역겨움이 쉽사리 가시지는 않는다. 남생은 물론 항복한 보장왕과 항복 의사를 전한 연개소문의 셋째 아들 연남산, 성문을 열어 당군을 맞이했던 승려 신성은 모두 당나라의 벼슬을 했지만 오직 남건만이 검주로 유배를 떠났다. 그나마 유일하게 고구려 패망의 책임을 진 인물이 남건이다.


비록 연남건이 권력다툼으로 침략의 빌미를 제공하고, 당나라의 싸움에서 번번이 패전했다고는 하지만 그가 있어 고구려의 최후가 부끄럽지 않았다. 그가 계백장군 같은 무공을 선보인 것도 아니며, 검모잠처럼 고구려 부흥운동에 뛰어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제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망국의 충절로 따지자면 마의태자 정도의 대우는 받음직하다. 그는 적어도 좌초될 위험에 빠진 배를 버리지 않고 지킬 줄 알았던 선장이었다. 그의 고집이 무고한 고구려 백성들의 피를 더 흘리게 했을 지는 모르겠으나 뒷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래도 참 고맙다. “질 줄 알면서도 싸워야 할 때가 있다”는 바이런의 말을 되뇌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 고구려사를 그리워할 때 연남건의 이름도 함께 기억했으면 좋겠다.


나는 역사를 핑계로 패배의 유미주의(唯美主義)를 찬양하려는 게 아니다. 그러나 패배가 임박한 순간에 제 자리를 늦게까지 지키는 사람에게 애틋한 감정이 생기는 건 막을 길이 없다. 어려울 때일수록 우직하게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좀 더 늘기를 바란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차마 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우리 사회의 신뢰성도 그만큼 고양될 것이다. “아무리 패배의 상처가 쓰라리더라도 패배 역시 승리만큼이나 인간의 영혼을 새롭게 하고 영광을 가져오는데 이바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no matter how hard the loss, defeat might serve as well as victory to shape the soul and let the glory out)”라고 말하는 미국 민주당 앨 고어 후보의 2000년 대선 패배 연설문 한 대목을 꺼내본다. 아름다운 패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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