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日記(06.12.11~06.12.17)

일기 2006. 12. 18. 00:20 |
061211
서울행정법원 행정6부(박상훈 부장판사)는 2003학년도 수능시험에서 휴대전화를 이용한 부정행위를 한 사실이 뒤늦게 적발돼 올해 초 수능 성적 무효통지를 받은 ㄱ씨가 낸 행정처분 무효확인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형벌과 행정처분은 주체와 효력, 목적을 달리한다”며 “수능성적을 무효로 하는 행위는 구 고등교육법에 따른 하나의 완결된 최종적인 공권력의 행사이자 준법률적 행정행위”라고 밝혔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부정행위 수험생이 합격한 후 장기간 세월이 흘렀다거나 대학입학 이후 우수한 성적을 나타내고 있다는 등의 이유로 구제된다면 경쟁의 원리가 심각하게 왜곡될 뿐 아니라 부정행위가 만연될 우려가 크다”고 판시하는 대목이다. 어려운 경제사정을 고려해 기업인들의 부정을 선처해주자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경쟁의 원리”가 만만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황금률이 아니길 바란다.

ㄱ씨는 항소를 하겠다고 하지만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대법원 확정판결에서 다른 판결이 나올 거 같지는 않다. ㄱ씨가 수시전형으로 합격했다고 하지만 수능이 최소자격요건으로 반영 되었다면 면책되기는 어려울 거 같다. 여하간 국법은 누구나 경외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아니 오히려 사회경제적 상류층이 좀 더 두려워해야 한다. 사회경제적 상류층의 품위 유지를 이유로 하나둘 법망을 빠져나간다면 법의 권위는 추락한다.

16대 국회의원 시절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옥외광고물 업자들로부터 1억 8천700만 원을 받은 혐의로 복역중인 ‘영화인 강신성일 구명을 위한 탄원서’ 서명운동을 고깝게 보는 내가 나쁜 놈일까. 왜 이 땅의 관용은 위에서만 맴돌까.


061212
청부중민(淸富重民)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봤다. 박세일 교수님의 부민덕국(富民德國, 부유한 국민이 사는 덕 있는 나라)에서 영감을 얻었다. 시혜적 평등이 아닌 합법적 분배의 대상인 청부(淸富)와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잘 살게 될 수록 인간다움을 고양할 수 있는 중민(重民)의 결합을 지향하겠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잘 살면서 따뜻하기까지 한 나라의 다른 표현이다.

본래 부국안민(富國安民)이라고 쓰던 것을 청부안민(淸富安民)으로 바꾸어 쓰다가 중민(重民)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어 다시 바꿨다. “세상에 버릴 사람은 없다(天下無棄人)”는 내 모토와 맞아 떨어지는 느낌도 있고 말이다. 삼봉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에서 “위정자들의 모든 행위는 백성을 위하고(爲民), 백성을 사랑하고(愛民), 백성을 소중하게 여기며(重民), 백성을 편안하게(安民)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서술하는 대목에 그 용례가 보인다.

비록 모자란 머리지만 청부중민(淸富重民)에 바탕을 둔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을 모색해보자.


061213
꼭 1년 전 오늘 나는 익구닷컴에 <사립학교법 통과를 환영한다>라는 글을 썼다. 그런데 이 법이 제대로 시행되기도 전에 사법개혁안과 함께 정치적 흥정의 대상으로 전락할 위험에 처했다. 무기력한 집권여당이 또 다시 원칙을 저버린다면 이 땅의 공공성은 재차 시련을 맞이할 것이다.

한국해양대 김용일 교수님은 프레시안 기고문에서 “학교법인 이사장과 친인척 관계에 있는 자의 학교장 임명을 금지하고 있는 현행법 제54조의 제3항”이 개정 사학법의 핵심이라고 말씀하신다. 집권여당이 “설립자나 법인 측에서 더 '치명적'이라고 여긴 친인척 학교장 임명금지 등에서 이미 "자발적인 양보"”한 셈이라는 말씀이 이채롭다.

김 교수님 지적대로 개방형 이사제의 숫자에만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개정 사학법의 본래 취지인 교육 공공성과 사학 민주화에 대한 성찰이 부족한 듯싶다. 첨언하자면 종교계 사학관계자 분들은 이번 만큼은 자숙하시길 바란다. 한 해 전에도 말했지만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이 눈물을 흘리시고,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이 콧등이 시큰해지실 일이 없기를.


061214
불교뉴라이트연합이 출범한다고 한다. 하시는 말씀들을 들어보니 “불교정신을 기반으로 국가 정체성과 헌법정신을 수호하고 한반도 비핵화 실현을 위해 2000만 불자의 역량을 총결집할 것”이라며 “호국불교의 정신을 되살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재확립하고 선진 대한민국의 건설과 평화통일에 일조하겠다”고 밝혔다.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일지 모르겠으나 부처님을 팔아먹는 행위는 하지 말기를 바란다.

불교하면 무소유의 정신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 스님께서 친히 시장경제를 사수하시겠다니 그 정성에 마음이 짠해진다. 다만 시장경제가 먼저 뿌리 내려야할 곳은 따로 있다. 불교문화재에 대한 소유권을 독점하려는 불교계의 과도한 주장부터 자제해야 하지 않을까? 불교문화재 보존수리에 들어간 혈세는 당연한 것인가? 호국불교를 언급하기 전에 세금정산부터 철저히 하자. 자기 소유에만 애틋한 불자만큼 볼썽사나운 것도 없다.


061215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님이 쓰신 <헐어 짓는 광화문>라는 경향신문 칼럼을 몇 번을 다시 읽었다. 내가 오독하지 않았나 염려스러워서다. 김 교수님은 벨기에 겐트 시의 시청 건물이나 이스탄불의 소피아 사원의 예를 들어 역사 원리주의, 정통주의에 대한 강박증을 비판하셨다. 김 교수님은 참여정부가 “과거사 바로 잡기로 그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확립”하는데 열중했으며, “섬세한 조절을 통한 현실 개조의 노력보다는 명분에서 나오는 추상적 거대 계획을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며 비판적인 시선을 보낸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 스타일을 집약하여 보여주는 것이 최근의 역사와 건축을 아우르는 광화문 복원 계획”이라는 말씀에서 고개가 갸우뚱거린다. “복원된 광화문이 이 정부의 정치 스타일을 상징적으로 집약한 마지막 기념비가 될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로 맺는 칼럼을 읽고 좀 혼란스러웠다. 내가 듣기로 총 244억원이 투입되는 광화문 복원사업은 1990년에 20년 계획으로 시작된 경복궁 복원사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사업이다. 일제가 원체 철저히 훼손해서 20년 동안 복원해도 본 모습의 절반도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참여정부가 모종의 정치적 술수를 부려 광화문 복원에 나선 것이 아니라 당초 짜여진 계획대로 시행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광화문 복원에 의문이 있으시면 문화재 당국에 먼저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을까? 20년 동안의 복원 프로젝트의 허실을 지적해주셔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갑자기 대정부 비판을 하셔서 조금 뜬금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홍찬식 동아일보 논설위원님은 <광화문 복원>이란 칼럼 말미에 “이 시대를 대표할 ‘새 광화문’을 지을 역량이 정부에 있을까”라며 황당한 결말을 맺고 있는데 그와 비슷한 느낌이라면 내 오독이 너무 심한 걸까. 물론 광화문 자체보다는 광화문에 매달린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현판에 더 관심이 큰 것으로 보이는 홍 논설위원님의 글과 김 교수님의 글을 비교하는 건 너무 지나치다. 하지만 광화문 복원과 참여정부의 정치 스타일을 연계시킨 건 상관관계가 떨어진다는 것이 개인적 소견이다. 인기 없는 정부라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안 믿는다지만 적어도 지식인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말해야하지 않을까.

여하간 나는 3년 뒤 콘크리트를 벗고 국내산 육송(陸松)으로 새로 지어질 새 광화문을 환영한다. ‘광화(光化)’는 서경의 ‘광피사표 화급만방(光被四表 化及萬方)’에서 따왔다고 한다. 빛이 사방을 덮고 가르침이 만방에 미친다는 본래 뜻처럼 이 땅의 오욕을 딛고 다시금 문화적 찬란함을 드높이는 계기가 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부디 잘 만들어져서 김 교수님과 홍 논설위원님 등의 의구심도 말끔히 해소해드리길 바란다. 아 정말 점점 이러다가 문화재청에 취직할지도 모르겠다.^^;


061216
나는 왜 영어를 이리 못할까? 아니 왜 잘 하려는 의지도 크지 않고,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에 대해 당시 어린이가 구사할 수 있는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찬탄한 이후 나는 언어에 있어서는 국수주의자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중학교 때 정규 교과목으로 영어가 등장하자 나는 보란 듯이 공부를 게을리 했다. 영어 공부를 안 하고는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는 대한민국 교육체계상 어찌어찌 근근히 따라가기는 했지만 늘 떠밀리는 공부만 했던 거 같다.

어쩌면 영어공용화 논의에 내가 격렬하게 반발하는 것도 그 논리적 근거를 따지기 이전에 생존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계화 시대를 슬기롭게 헤쳐나가기 위해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한다. 영어를 공용화 수준에 가깝게 잘하지 않으면 먹고살기 힘든 세상은 내가 바라는 바람직한 세계화의 모습은 아니다. 티베트족이 중국어가 아닌 티베트어를 잘 간직해나가는 것, 캐나다의 퀘벡주가 프랑스어를 고수하고 있는 것이 진정한 세계화가 아닐까? 아 정말 배부른 소리다.^^; 그래도 세계화가 표준화에서 그쳐야지 획일화까지 나아가지 말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유효하다.

최근 영어 공부를 하면서 내 무식함이 가장 크게 만개하고 있는 영역을 헤집는 재미가 쏠쏠하다. 대학 입학한지 5년이 지나서야 토익 점수에 신경 쓰기 시작한 내 무신경에 스스로 놀랄 정도다. 나는 무슨 배짱으로 토익을 무시하고, 영어를 멀리하며 살았던 것일까. 물론 나는 그 대신 무언가를 배웠고 익혔다. 하지만 이런 것과는 무관하게 내가 평균 수준 이상의 토익 점수를 따지 못한다면 내 인생 자체가 불성실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될 공산이 크다. 토익 점수가 나를 말하는 지표가 될 수는 없겠지만 나란 녀석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라도 공부를 해둘 필요가 있겠다.


061217
동생과 함께 토익 시험을 치렀다. 지난달 토익 시험에 이어 3주만에 보는 시험이라 많은 준비를 하지는 못했다. 너무 단기간에 점수 올리기를 집착하다 지난달에는 시간 안배에 실패해서 독해 지문 하나를 거의 읽지 못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내년에도 매회 꾸준히 응시해서 주어진 시간에 내 모자란 지식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담대함을 길러야겠다.

동생에게 시험을 잘 마쳤냐고 넌지시 물으니 시간이 모자라지 않았다며 당당했다. 토익 시험 처녀 응시자의 풍채(?)가 아니어서 놀랐다. Part 1, 2에서 나오는 Directions 시간에 그걸 따라서 듣고 읽는 여유까지 부린 동생을 구박하며 앞으로는 그 시간을 아껴 다른 문제를 풀라고 조언할 수밖에 없는 매정한 내 모습이 미웠다.^^;

통화바스켓 제도를 흉내내서 앞으로 동생 토익 점수와 내 점수를 합산해서 내보는 것도 재미날 거 같다. 통화바스켓은 자국과 교역비중이 큰 복수국가의 통화를 선택하여 통화군(basket)을 구성하고, 바스켓을 구성하는 통화들의 가치가 변동할 경우 각각 교역가중치에 따라 자국통화의 환율에 이를 반영하는 환율 제도를 말한다. 고정환율제에서 변동환율제로 가기 전의 과도기적인 환율 제도로 우리나라도 1980~1990년에 복수 통화바스켓 제도를 시행했었다.

나는 이 복잡한 환율 제도를 차용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구성통화의 꾸러미 개념을 빌려 둘을 합산하는 것을 목표 삼고 싶다. 이번 시험에서 나랑 동생의 토익 점수가 합쳐서 1200점을 넘어봤으면 좋겠다. 중장기적 목표로 익구-윤미 토익 바스켓의 총점은 1600점(가령 820점과 780점)이다. 원수 같은 영어지만 이걸 핑계로 동생과의 우애를 다지면서 분명한 목표를 향해 서로 격려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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