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에서 실시한 2006년 하반기 문화유산 사진 및 답사기 공모전에서 가작을 수상했습니다. 그다지 잘 쓴 글은 아니었지만 작은 상이나마 받게 되어 기쁘네요. 잡글 쓰기를 즐기는 저는 글쓰기로 받는 상처럼 기쁜 게 없습니다. 당초 노렸던 입선 말석보다는 좋은 성과가 나와서 세밑에 제 자신을 위한 작은 선물이 될 거 같아요. 부끄럽지만 졸문을 올립니다.


<동궐(東闕)을 꿈꾸다>

  안거(安居)나 피정(避靜)을 좀 떠나고 싶었다. 영국의 시인이자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바쁜 꿀벌은 슬퍼할 겨를이 없다”고 말했지만 꿀벌도 가끔 슬플 때가 있는 법이다. 나의 우울증이 헤픈 자기연민에 그치는 것이 아닌 뼈를 깎는 자기성찰을 위한 매운 의지이길 바라며 창덕궁을 찾았다. 이태 전 창덕궁을 찾았을 때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듯이 나는 모종의 세속적 꿍꿍이를 품었다.


  창덕궁은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는 이유로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세계문화유산 지정에 따른 책임은 막중하다. 이 문화유산은 비단 우리 후손들 것만이 아니라 전세계가 공유해야할 자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의 위기유산(Danger Heritage) 제도는 지정 등록이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알리는 좋은 징표다. 우리 궁궐 환경의 문제를 꼽아보라면 역시 주차장이다. 규모가 큰 경복궁 동편 주차장이나, 지하주차장과 노상주차장이 사이좋게(?) 들어서 있는 종묘만큼 심하지는 않지만 창덕궁 주차장도 그리 아름답지는 못하다. 금호문 밖으로 난 주차장은 창덕궁의 문화적 저력과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다.


  일전에 자금성 답사를 다녀왔을 때 놀란 점은 궁궐 안에 주차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천안문(天安門)보다 훨씬 앞에 있는 정양문(正陽門)에서부터 걸어가며 중국인들의 자부심의 근원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궁궐도 정문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문화를 정착시켰으면 좋겠다. 나의 이런 생각이 답사객들을 불편하게 할 소지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궁궐에 바짝 붙어서 궁역을 잠식하는 지금의 주차장 구조는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돈화문(敦化門) 앞 도로를 질주하는 차들을 바라보며 씁쓸했다. 국민들의 문화적 안목이 높아진 만큼 요구수준은 날로 높아가고 있다. 그 다양한 요구를 문화재 당국이 재빨리 수락하기 어렵다는 고충을 십분 이해한다. 그만큼 묵직한 기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시고 좀 더 애써주셨으면 좋겠다.


  27년만의 자유관람을 하려니 가슴이 설렌다. 최근 들어 창덕궁 관람영역을 넓히려는 많은 노력이 있었다. 2004년부터는 시행한 옥류천 특별관람은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자아내던 후원 지역을 개방함으로써 문화적 수요를 충족시킨 긍정적 의미가 컸다. 미공개 지역에 대한 개방에 이은 자유관람 제도의 신설로 관람의 질을 높인 것도 환영할 일이다. 문화유산 보호라는 측면에서 안내원의 지도 아래 짜여진 제한관람을 당장 없애는 것이 곤란한 만큼 자유관람을 통해 다른 각도의 답사를 즐길 수 있어 반갑다. 창덕궁은 날로 넓어지고 깊어지고 있다. 서울에 살면서도 창덕궁에 가보지 않은 분들이 창덕궁을 찾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서울에 남아 있는 옛 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돌다리인 금천교(錦川橋)에는 언제나 묵직한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그래 너만은 제 자리를 지켜주었구나’ 싶어 돌짐승들을 자꾸 어루만진다. 인정전(仁政殿) 답도(踏道)는 중국의 그것에 비해 규모가 초라해서 아쉬울 때도 있지만 만만하고 살갑다. 하지만 인정전 박석(薄石)만 보면 마음이 아프다. 나는 경복궁이나 종묘의 박석을 볼 때마다 ‘최소의 인공미라고 해야 할지 최대의 자연미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며 호들갑을 떤다. 고유섭 선생은 한국미의 특질을 “무기교의 기교”라고 평했는데 박석이 그 결정판 가운데 하나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나 못하는 일이 없다(無爲無不爲)”는 도가의 정신이 유교적 건물의 정수에서 만난다. 밉살맞은 일제는 이 박석을 걷어내고 잔디를 깔았다. 최근에 다시 복원했다고 하지만 너무 반듯반듯해 정이 안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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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전 드므와 박석>
드므란 ‘입이 넓은 큰 그릇’이란 뜻의 순우리말로서 여기다 물을 담아 두어 화마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궁궐 전각 곳곳에서 이 드므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창덕궁 박석은 좀 모자라지만 종묘나 경복궁의 박석은 참 매혹적이다. 돌을 너무 잘 다듬으면 햇빛이 반사되어 눈부시기 때문에 부러 울퉁불퉁하게 둔 것이라고 한다. 또한 미끄럼 방지 기능까지 있다니 혜안이 놀랍다.



  임금이 평소에 국사를 논의하던 편전(便殿)인 선정전(宣政殿)을 늘 멀리서만 지켜봤는데 가까이서 가볼 수 있게 개방해놓아서 기꺼웠다. 현존하는 궁궐 전각 중에서 유일한 푸른색의 유리기와라는 각별함 때문에 많은 이들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다. 청기와는 회색조의 일반 기와보다 세 배 정도 비싸다고 하는데 조선 초기에는 몇몇 사찰에 청기와를 썼고, 궁궐 건물로는 경복궁의 근정전과 사정전만이 청기와를 이었다고 한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지만 자금성의 황금기와나 천단의 청기와보다 더 매력적이고 질리지 않는다. 청와대의 청기와도 그 나름대로 공력을 들인 것일 텐데 선정전의 기와를 상대하지는 못할 듯싶다. 나는 옛사람의 솜씨보다 못하다는 것을 타박하려는 게 아니다. 고금의 기술은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옛것을 아끼면서 새로운 미적 감각을 얼마든지 구현해낼 수 있으리라. 햇살에 비친 청기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내 회의와 낙심을 다독인다.


  선정전 오른쪽으로 내전의 중심이 되는 희정당(熙政堂)과 대조전(大造殿)이 있다. 왕의 침전이 딸린 편전인 희정당과 왕과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건물이 너무 꽉 들어차 있다는 느낌을 받기 십상인데 이 건물은 본래 이 자리에 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두 건물 다 화재로 소실된 것을 경복궁의 강녕전과 교태전 등을 헐어 새로 지은 것이다. 대대적으로 중건된 이후 법궁의 지위를 회복한 경복궁에 대한 훼손의 일환인 셈이다. 철저히 파괴되어 터만 남은 경희궁, 창경원으로 격하되기까지 했던 창경궁만큼은 아니지만 일제 강점기의 창덕궁은 일제의 전시장이자 연회장이 되었고, 수많은 전각들이 훼절되었다. 이래저래 잘리고 상처 입은 우리 궁궐을 바라보며 일제의 만행만 곱씹기보다는 우리 스스로의 부박함을 반성해야겠다.


  새 모양으로 생긴 대조전 일곽의 처마 빗물받이가 익살맞다며 연신 사진을 찍고 집에 와서 찾아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내가 마냥 좋다며 흐뭇한 미소를 보내던 빗물받이가 있던 곳은 대조전 부속건물인 흥복헌(興福軒)이었다. 1910년 8월 22일 흥복헌에서는 한일합병을 결의하는 조선왕조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린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옥새를 치마 속에 감추며 버텼다는 순정효황후의 통분이 서린 곳을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데만 급급하지 않았나 반성한다. 어디 가면 뭐가 있더라며 피상적으로 듣는 것에 만족했던 게 민망하다. 어디에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적극적으로 헤집고 오늘날 그 의미를 복원하려는 노력을 해봐야겠다. 그게 진짜 공부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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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복헌 처마의 빗물받이>
나는 흥복헌에서 역사의 입체적, 총체적 이해를 깨우쳤는지도 모른다.



  후원으로 발길을 돌려 주합루(宙合樓)를 올려다보니 적서의 구별 없이 실력을 키웠던 가능성의 광휘(光輝)를 받는 듯 힘이 솟는다. 보기 드문 6각 지붕에 2층 처마를 한 존덕정(尊德亭)은 아기자기한 맛이 일품이다. 한 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고 기교가 많이 들어간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이 두 곳은 정조대왕의 꿈이 깃든 곳이라 더 애틋하다. 숨이 찰 때까지 옥류천(玉流川)까지 소요(逍遙)하고 만보(漫步)했다. 발 운동으로 뇌의 혈류량이 증가하면 뇌도 함께 활성화되어서 좋은 생각도 많이 하게 되는 거 같다. 낙엽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운치를 더한다. 나는 산책을 즐긴 칸트와 루소를 흉내내 생각거리를 찾다가 “민족”이라는 화두를 꺼내 들어봤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상상의 공동체 Imagined Communities』에서 민족은 근대 자본주의가 발달 하면서 생겨난 개념이며, 사람들에 의해 상상되어진 공동체라고 주장한다. 민족은 특정한 역사적 문화적 경험에 의해서 구성되고 상상되어진다는 주장이 파격적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경청하지만 “민족은 공동의 언어·혈연·문화공동체라는 객관적 요소에 민족의식이라는 주관적 요소가 더해져 공고해진 실체”라는 신용하 교수의 반박이 더 맞는 거 같다. 우리가 일제 강점기 같은 공격적 민주주의의 폭력과 차별에 반대하는 것을 허상과 싸우는 것이라고 손쉽게 말해서는 곤란하다. 자중자애(自重自愛)라는 말처럼 스스로 무겁게 여기고 사랑하는 자만이 남의 존경과 신뢰를 받게 되어 있다. 우리는 얼마든지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남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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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류천 바위>
옥류천 바위에는 흐르는 물에 왕이 술잔을 띄워 보내면 잔이 닿은 신하는 시를 읊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런데 그 길이가 짧아서 시 한 수 읊을 짬이 별로 없었을 거 같다. 아마 글재주가 특출 나지 않고서는 영락없이 벌주를 마셔야 했으리라.



  후원의 정자들은 규모가 소박한 편인데 이는 자연 경관을 해치지 않으면서 최소한의 인공미를 가미하려는 우리 전통 조경의 산물이다. 부러 투정을 부려보자면 후원의 우수성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지나쳐 절대화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미적 가치를 너무 보편적 영역으로 확장하는 건 무모한 시도인 거 같다. 저마다 독특하게 뿜어내는 향기 그 자체를 완상할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목재가 덜 들어가는 익공양식이 널리 유행한 것은 웅장한 건축물을 일부러 안 지은 것이 아니라 양질의 목재가 부족해 정말 못 지었을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저런 어려움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빚어낸 정성을 기리는 게 진정 문화를 애호하는 이의 겸허하게 열린 자세일 것이다. 비록 도자의 발색(發色)이 고르지 못했다는 흠이 있지만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은 아무리 흠뻑 빠져도 지나치지 않는다.

  경복궁을 설계한 정도전은 “검소하되 누추한 데 이르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한 데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고 말했다. 유교적 이상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검박함을 추구한 왕실의 정신이 지나쳤는지 조선의 백성들은 늘 빈궁하고 고달팠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중국이 사치로 망한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나라는 반드시 검소함으로 인해 쇠퇴할 것이다”고 일갈했다. 우리의 풍속이 정녕 검소함을 좋아하여 그런 것이 아니라 재물을 사용할 기술을 알지 못한데 불과하다는 그의 지적이 매섭다. 그런데 오늘날 상황은 급변하여 모든 것이 숫자로만 표현되는 세상이 되었다. “이쯤 되면 넉넉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용기다. 후원에서 그걸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유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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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심정과 빙옥지>
청심정(淸心亭)은 창덕궁 후원 중에서도 꽤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이번에 처음 찾아가 봤다. 청심정 앞에 돌로 만든 조그만 연못인 빙옥지(氷玉池)와 청심정을 향해 앉아있는 앙증맞은 거북이가 있다. 우리나라 돌조각은 무섭게 만든다고 해도 어찌나 살벌한 기운이 안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자연미를 한껏 살린 빙옥지 끝마무리가 인상적이다.



  어느덧 해거름이 내렸다. 창덕궁을 맨 마지막으로 나서며 동궐(東闕)의 온전한 복원을 희망했다.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전락할 때 왕이 거처하던 창덕궁과 구별하기 위해 창덕궁과 창경궁 사이에 담장이 놓이게 되었다. 이제 창덕궁과 창경궁을 갈라놓은 그 담장을 걷어내야 한다. 그리하여 동궐로 재탄생한다면 우리는 이 세계문화유산을 더욱 가치롭게 가꾸는 모범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창덕궁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애련정(愛蓮亭)의 모티브가 된 애련설(愛蓮說) 한 구절을 습관처럼 읊조려본다. “연꽃이 흙탕물에서 자라되 진흙에 물들지 않고, 맑은 잔물결에 씻었으되 요염하지 않은 것을 나는 홀로 사랑한다.” 자신이 지탱할 만큼의 빗방울을 머금고 나면 미련 없이 비워내는 연꽃잎처럼 살아야겠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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