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日記(06.12.18~06.12.24)

일기 2006. 12. 24. 23:35 |
061218
서울 중구 관내의 동대를 관할하는 대대장님이 이임하면서 국방동원정보체계에 짤막한 작별인사를 올렸다. 삭막한 공문 수발만 하던 곳에서 사람 냄새나는 글을 읽으니 가슴이 뭉클했다. 구청에 종종 들르셨기 때문에 몇 번 뵌 적이 있는데 인사도 제대로 못 드리게 되었다. 대대장님은 My Way의 가사를 인용하셨는데 아무리 봐도 내가 알고 있는 프랭크 시내트라의 가사가 아니었다. 알고 보니 포크 가수 윤태규님의 노래였다.

아주 멀리 왔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다 볼 것 없네

정말 높이 올랐다 느꼈었는데
내려 볼 곳 없네

길 하니까 고 유재하님의 <가리워진 길>이 떠올랐다. “보일 듯 말듯 가물거리는 안개 속에 쌓인 길/ 잡힐 듯 말듯 멀어져 가는 무지개와 같은 길”을 헤맬 때 힘이 되어줄 벗을 찾는 절창이다. 김남주 시인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에서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라는 구절은 또 얼마나 다정다감한가.

돌아볼 만큼 변변한 것도 이루지 못했으면서, 내려볼 만큼 오르지도 못했으면서 나는 왜 그리 교만하고 나태했을까. 그렇다고 누군가의 길을 터준 것도 아니고 넘어진 벗을 일으켜 세우는데도 인색했다. 이래서야 시내트라의 노랫말처럼 “나는 내 방식대로 살았다(I did it my way)”고 좋아할 수 있을까.


061219
우석형님께서 “광호들은 광호가 연수끝나면 한번 모이자~ 그때 홍익이들도 불러서 광호가 술먹이는거 구경하고파”라는 글을 쓰셨기에 표현이 재미나서 여러 번 곱씹었다. 00학번 형들을 지칭하는 “광호들”과 02학번 무리를 지칭하는 “홍익이들”이라는 표현이 어색하면서도 정감이 갔다.

“-들”이라는 의존명사는 두 개 이상의 사물을 나열할 때, 그 열거한 사물 모두를 가리키거나, 그 밖에 같은 종류의 사물이 더 있음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대부분의 보통명사와 인칭대명사, 지시대명사에 어울린다. 하지만 고유명사에는 언뜻 맞지 않아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고유명사는 말 그대로 세상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을 일컫기 때문이다. 가령 “서울들”, “한강들”, “숭례문들”이라고 썼다가는 구박받기 십상이다. “경복궁들”이라고 하면 창덕궁, 창경궁이 얼마나 섭섭해하겠는가?

하지만 사람 이름 뒤에 쓰니 의미가 크게 나쁘지 않다. 허구한 날 “02학번”들이라고 쓰는 것이 식상할 때 가끔 써봄직하다. 물론 이건 어지간해서는 손윗사람이 손아랫사람에게 쓰는 게 예법에 맞을 거 같다. 가령 말단 공무원이 국무위원을 가리킨답시고 “한명숙님들”이라고 말한다면 불경스럽게 비칠 것이다. 아직 언중에게 낯선 표현이라서 그렇다. 여하간 우석형님 덕분에 한국어의 용례가 좀 더 넓어진 거 같다. 종종 써먹어 봐야겠다.


061220
문화재청에서 실시한 2006년 하반기 문화유산 사진 및 답사기 공모전에서 가작을 수상했다. 그다지 잘 쓴 글은 아니었지만 작은 상이나마 받게 되어 기쁘다. 어렸을 때부터 잡글 쓰기를 즐겼던 나는 글쓰기로 받는 상처럼 기쁜 게 없다. 나는 글짓기 대회에 응모할 때 입선 말석이나마 차지하기를 내심 기대한다. 하지만 내 글솜씨는 아직 부족해서 그 꿈을 좀처럼 잘 이루지 못한다. 이번에는 입선보다 조금 높은 가작이니 기대 이상의 성과다. 다음에는 조금 더 욕심을 내서 우수상 이상을 노려봐야겠다.

<동궐(東闕)을 꿈꾸다>는 창덕궁 자유관람을 다녀와서 쓴 답사기다. 나는 이 글 말미에 동궐로의 복원을 주장했다.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전락할 때 왕이 거처하던 창덕궁과 구별하기 위해 창덕궁과 창경궁 사이에 담장이 놓이게 되었다. 이제 창덕궁과 창경궁을 갈라놓은 그 담장을 걷어내고 온전한 동궐로 재탄생한다면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이름을 더 드높이리라 믿는다. 광화문 복원이 완료되면 20년 간의 경복궁 복원 계획이 일단락되는 만큼 그 다음에는 동궐로 눈을 돌려봤으면 좋겠다. 동궐을 다 둘러보려면 반나절은 족히 걸린다. 서울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거 같다.


061221
“대부분의 경우 낙관은 삶에 대한 무책임과 무지의 속편함이다”라는 mannerist님의 말씀에 가슴이 뜨끔했다. “정말 끔찍한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는 확률론적 논거보다 내가 더 강하게 기대고 있는 것은 인간 이성과 감정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품을 수밖에 없는 어떤 믿음 때문이다. 인간에게 반드시 있으리라 믿고 싶은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 같은 것 말이다.

내가 낙관주의자를 자처하고 다니는 건 사소한 현상에만 분노하면서 정작 본질은 놓치지 말자는 다짐의 일환이기도 하다. 지엽적인 것에 호들갑을 잘 떠는 내 자신을 구박하며, 좀 더 길고 넓게 보고 대응하자는 꿍꿍이에서 나온 레토릭이다. 쓸데없이 비탄에 잘 잠기는 내 고질병을 치유하기 위한 의도적 노력의 산물로 그런 용어를 부러 차용했다. 내 낙관주의가 책임성을 확보하고 무지를 부끄러워하기 위해 늘 노력해야겠다.

장자에 나오는 목계(木鷄)의 자세를 배우기로 했다. 싸움닭을 훈련시키라는 왕명을 받은 기성자는 왕의 독촉에도 불구하고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고 미룬다. 40일째 되는 날 왕이 또 묻자 기성자는 그제야 “이제 거의 되었습니다. 다른 닭이 울어도 아무런 태도의 변화가 없으니 멀리서 보면 마치 나무로 만든 닭처럼 보입니다. 그 덕이 온전해졌습니다(幾矣. 鷄雖有鳴者, 已無變矣. 望之似木鷄矣. 其德全矣)”라고 말한다. 오대산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은 목계는 “재능이 있어도 무심(無心)으로 살아 사람들을 감화시키기 때문”에 이기는 법이 없다고 설명하신다.

실천에는 게으르지만 지키지도 못할 목표를 만드는 데는 재빠른 나는 새해 표어를 “의연하게 또 의연하게”로 잠정 결정했다. 아마 매우 유효적절한 목표가 되지 않을까 자화자찬하고 있다.^^; 제 기운만 믿고 성내지 않는 나무닭과 같이, 그림자에게 달려들지 않는 나무닭과 같이, 눈을 흘기며 조소를 보내지 않는 나무닭과 같이 세밑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해야겠다. 의연하게 또 의연하게!


061222
며칠 전 사학법 재개정을 주장하며 목사 수십 명이 단체 삭발식을 감행해 화제다. 나는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이근복 목사님께서 이에 반대하며 “예수께서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을 찾아온 성탄절을 앞두고 교회가 어렵게 사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모습을 보여 부끄럽기 짝이 없다”는 참회가 참 고맙다. 정말 다른 때도 아니고 성탄절 즈음해서 좀 너무한다 싶다.

조선 말기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와 더불어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 8,000여명의 순교는 오늘날 가톨릭이 손꼽히는 종교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주기철 목사님의 신사 참배 거부하며 순교하신 것 역시 개신교가 남부끄럽지 않는 힘이 되고 있다. 순교의 각오로 사학법 재개정 투쟁에 나설 것을 촉구하겠다는 목사님들이 그리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 까닭은 단지 내 성격이 모나서 그런 건 아닌 거 같다. 종교지도자들에게 있으리라 믿어지는 그 무엇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이 방면으로 좀 찾아보고 읽어봤지만 나는 현행 사학법이 신앙과 선교의 자유를 얼마나 심대하게 침해하는지 그 연관관계를 도저히 밝혀내지 못하겠다. 현행 사학법 시행령은 개방형 이사의 자격과 추천방법을 학교 정관에 위임하고 있는 만큼 개방형 이사의 자격을 학교를 운영하는 종교재단의 종교인으로 정할 수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도 선교활동이 어려워진다고 분개하시니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 사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절대 약자인 학생들을 상대로 선교의 자유를 들먹거리는 것 자체가 좀 민망한 일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20조 1항은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고, 2항은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나는 이 헌법 애호가 굉장히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첨언하자면 저는 이러한 대한민국 헌법정신에 비추어 종교인에 대한 근로소득세 부과를 오래 전부터 주장하고 있다.

우리나라 소득세법은 면세 대상자에 대한 열거주의를 택하고 있다. 여기에 종교인은 따로 규정이 없다. 마찬가지로 규정이 없는 작가나 예술가들은 모두 소득세를 납부하고 있다. 국교가 있는 외국인의 종교인들도 소득세는 내고 있는 걸로 아는데 헌법에 복수종교와 정교분리를 규정한 나라에서 종교인들의 과세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납득하기 힘들다. 명백하게 헌법과 소득세법을 위반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일말의 반성은 없으면서 개정 사학법이 위헌이라며 목청을 높이시는 분들이 많이 안타깝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또 험한 말들을 쏟아 냈구나 반성하며 <평화의 기도>를 암송한다.

미움이 있는 곳에 평화를,
무례함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기를,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기를,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 성 프란체스코, <평화의 기도> 中


061223
결국 술자리에서 그 분의 흉을 보고 말았다. 나는 국민일보 백화종 주필의 칼럼 <의절 할 수도 없는 사이라면>라는 칼럼을 떠올리며 의절(義絶)이란 섬뜩한 용어까지 꺼냈다. 그 분은 바로 김근태 의원님이다. 내가 감히 김근태 의원님에게 섭섭한 내색을 한다는 건 참 무례하고 어이없는 일이다. 나에게 김근태 의원님은 정치인 이상의 정치인이었으며, 지도자들의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지난 수 년 간 그가 좀 더 존경을 받고, 좀 더 사랑 받기를 갈망했던 나로서는 매우 고통스런 마음이다. 그러나 나는 비판을 거둘 수 없다. 그가 다름 아니라 김근태이기 때문이다.


061224
미국에서는 몇 해 전부터 성탄절을 앞둔 인사말이 종래의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에서 ‘해피 홀리데이(Happy Holidays)’로 바뀌고 있다고 한다. 다양한 종교를 가진 많은 민족들로 구성된 미국에서 특정 종교의 교주 이름을 사용하는 인사말을 피하려고 하는 미국인들의 노력에 공감한다. 미국처럼 개신교가 큰 영향을 미치는 나라에서도 이런 자성이 일고 있는데 정작 우리는 그런 시도조차 안 하는 거 같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는 사립학교법 재개정을 미적거리는 열린우리당 비대위원들을 상대로 “세계 어느 나라에서 종교가 등을 돌리게 만들어 놓고 집권한 적이 있는가”라고 경고했다. 송 교수님은 그런 경고를 날리기 전에 민주주의가 발달한 어느 나라에서 종교가 세속권력을 탐하는지 부터 연구해서 발표해주시길 바란다. 여하간 성탄절 연휴에 가장 낮은 이들과 벗했던 예수님의 그 마음가짐을 흠모하고 배우고 싶다. 한 편으로 단재 선생의 탄식도 잊지 말아야겠다. 모두들 Happy Holidays!!!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利害) 이전에 진리를 생각하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主義)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主義)가 되지 않고 주의(主義)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主義)를 위한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적 특색이다.  
- 단재 신채호, <浪客의 新年漫筆> 中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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