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春秋)와 한국사

문화 2007. 2. 8. 12:28 |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서평으로 올린 글을 문체를 바꿔 수정했습니다)

 

<춘추(春秋)>는 주(周)나라의 제후국인 노(魯)나라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기록한 편년체 역사서다. 은공(隱公) 원년(BC 722년)에서 애공(哀公) 27년(BC 468)에 이르는 255년의 사실을 엮었다. 쇠락한 주 왕실로 말미암아 “옳지 못한 설(說)과 포악한 행동이 행해지고,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고, 자식으로서 아버지를 죽이는 자가 있어 공자가 이런 세태를 두려워해 <춘추>를 지었다”고 맹자는 말하고 있다. 붓으로 기록함으로써 나쁜 것을 단죄하는 것을 ‘필주(筆誅)’라고 하는데 이러한 춘추필법은 동양 정신의 고갱이가 되어 오늘도 전한다. 이 땅의 언론인들이 춘추필법을 잘 구사하는지는 의문이지만.


후한시대 역사가 반고(班固)는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서 춘추의 경우 그 전(傳)이 총 23가(家) 948편에 달한다고 정리했다. 경(經)이 공자가 편찬한 춘추 본문이라면, 전(傳)은 좌구명 등이 경에다가 해석, 부연 설명을 덧붙인 것을 가리킨다. 23개의 학파에서 춘추 해석서를 948편이나 내놓았다니 춘추의 인기를 실감하게 만든다. 후대 사람들은 성인(聖人)의 경(經)과 현인(賢人)의 전(傳)이 합작한 것이라고 좋게 표현했지만 사실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 우리가 춘추 본문이라고 부르는 것은 1만 6천여 자로 분량이 매우 적고, 그 내용도 소략하다. “So what?”이라는 질문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올법하다. 결국 너도나도 춘추 해설서를 써냈다.


이 수많은 해설서들이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공정하게 경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치열한 다툼 끝에 세 종류가 명맥을 유지했다. 그 영광의 얼굴들이 바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과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이다. 세 경전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다가 삼국시대 이후에 춘추좌씨전(이하 좌전)이 춘추학을 제패한다. 삼국지에서 촉한의 관우가 좌전을 좋아해 전장에서도 좌전을 끼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진 고사다. 또한 촉한의 맹광(孟光)은 공양전을 선호해 좌전에 뛰어났던 내민(來敏)과 함께 두 책의 우열을 놓고 티격태격했다는 기록도 보인다(좌구명 著, 신동준 譯, 『춘추좌전』 1권(한길사, 2006), 20~22쪽 참조).


그런데 우리나라는 오로지 좌전이 독점적 지위를 누렸다. 우리나라에서 춘추학의 발달이 더뎠던 것은 이러한 독점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좌전을 넘어서는 해설서를 만들어보겠다는 의욕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정약용의 춘추고징(春秋考徵) 정도가 예외인 듯싶다. 이러한 무관심은 광복 이후에도 다를 바 없어 2005년 자유문고에서 곡양전과 곡량전의 역주본을 내놓은 것이 유일하다. 송대(宋代)에 성립된 개념으로 유교에서 가장 중요한 경서를 고른 13경(十三經)은 시경, 서경, 주역, 주례, 예기, 의례, 논어, 효경, 이아(爾雅), 맹자와 더불어 춘추 3전을 일컫는다. 중국 사람들의 선정이기는 하지만 좌전 편향의 우리 풍토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물론 좌전이 역사적 사실 해설과 실증적 탐구에 열중해서 높은 인기를 얻게 되었음은 인정해야 한다(좌전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내가 공양전과 곡량전 걱정을 한다니 참 우습다.^^;). 여하간 춘추를 놓고 벌어진 현란한 논쟁을 바라보며 춘추시대 여러 나라의 역사서 가운데 유일하게 전해져 내려오는 노나라의 역사를 경전으로 승격시켜 아낄 줄 알았던 중국인들의 문화의식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역사가 간략하다고 한탄하기 전에 유득공이 <발해고(渤海考)>를 엮는 심정으로 매달렸다면 어떠했을까. 만약 춘추를 익히는 정성의 반의반만이라도 삼국사기를 위시한 우리 사서들에 대한 주해를 달았다면 어찌 동방에 경전 몇 개쯤 나오지 않았으랴!


우리나라 과거시험에서 좌전을 단골 시험 문제로 출제한 것은 익히 전해진 사실이다. 서로 춘추대의(春秋大義)를 주창하며 자신의 일을 합리화했다. 주나라 왕실 기록도 아니고 제후국 가운데 강성했던 나라도 아닌 약체 중의 약체인 노나라의 역사를 배우려고 우리 선조들이 하얗게 지새운 밤이 그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조선 때  진사시험에서 1등을 차지한 김 아무개의 답안 가운데 “주몽이 고구려를 열고 동명이 업적을 이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조선 중기의 학자 김정국(金正國)은 “우리나라 사람의 본국 사적(史籍)에 자세하지 못함이 이와 같으니 가소롭구나”라고 비꼰다(김영인. “짜증나는 역사” 데일리안. 2005. 03. 07. 참조). 일부 학자들은 고구려 시조 동명왕과 별개로 부여의 시조도 동명왕이라고 주장한다. 즉 본래 부여의 시조를 동명왕이라 칭하는데 삼국사기 등에서 고구려의 시조도 동명왕이라 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한(東漢)의 사상가 왕충(王充)이 쓴 <논형(論衡)>에 나오는 부여의 건국신화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거의 같다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 ‘고구려 건국세력이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부여의 동명신화를 차용해 주몽신화를 만들었다’는 설이 나온다. 또 ‘동쪽의 밝음’을 뜻하는 동명이라는 한자가 특정한 왕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태양을 숭배하는 민족의 공통 분모로서 보통명사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정장열. “드라마 ‘주몽’ 놓고 고구려사 논란” 주간조선. 2006. 06. 27. 참조). 부여족 갈래인 백제가 건국 직후 건립한 동명묘(東明廟)는 주몽을 위한 것이 아닌 부여의 시조를 받드는 사당이었다는 견해까지 있다. 여하간 “주몽이 고구려를 열고 동명이 업적을 이었다”는 표현은 말이 안 된다. 주몽과 동명왕을 동일 인물로 묘사한 삼국사기만 읽었어도 이런 실수를 하지 않았으리라. 최근 벌어지는 논쟁을 받아 들여 “동명이 부여를 열고 주몽이 업적을 이었다”라고 한다면 모를까.


우리 역사를 가벼이 여긴 것은 비단 일개 유생에 그치지 않는다. 비극적이지만 거의 모든 식자층이 그랬다. 이황이 남긴 도서는 모두 1,700여 권인데 주자의 저작과 경전 등 중국서적이 159종이었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경국대전 등 조선의 역사, 지리 등 관련 서적은 그의 1/3 수준인 55종이었다. 그의 여러 가지 저술도 주자 성리학 등 중국에 관한 것들이었다고 한다(오인환, 『조선왕조에서 배우는 위기관리의 리더십』(열린책들, 2003), 171쪽 참조). 이이는 <기자실기(箕子實記)>를 지어 중국에서도 전설상 인물인 기자가 조선으로 왔다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을 체계적(!)으로 서술했다. 이러한 모화사상은 17세기 이후 형성된 조선 중화주의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이이 著, 안외순 譯, 『동호문답』(책세상, 2005), 114쪽 참조).


세종대왕은 북송 때 사마광이 지은 자치통감(資治通鑒)을 무척 애독했다고 한다. 이를 인쇄하고 반포하기 위해 새로운 제조법으로 종이를 만들고 새 활자를 주조하는 정성을 들여 백성들에게 보급할 <자치통감훈의>을 편찬했다. 물론 세종대왕이 <고려사>, <고려사절요>의 내용 보강에도 관심을 보인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중국 역사에 대한 흠모에 비하면 부족한 게 사실이다. 대학자와 호학군주조차 제 나라 것을 경시했는데 대다수 지식인들이 자신의 역사에 얼마나 무심했을지 안 봐도 뻔하다. 선현들이 우리 역사에 해설을 붙이기 위해 노력했다면 오늘날 후손들에게 더 풍성한 기록을 물려주실 수 있었으리라.


중국 대륙을 차지했던 북방 유목민족들이 하나둘 중국화(中國化)하는 와중에도 한국은 아름다운 예외였다. 거의 모든 지배계급이 중국화를 위해 안간힘을 썼는데도 끝내 중국과는 별개의 주체성을 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경이롭다(한국하이에크 소사이어티, 『자유주의만이 살길이다』(평민사, 2006) 中 강위석, <공자와 자유>편 참조).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는 “민심이란 본질적으로 민중의 무의식이 투사된 개념이다”고 설파한 바 있는데 어쩌면 그 설명이 들어맞을지도 모른다(정혜신. “정신분석학으로 본 노 대통령” 한겨레. 2005. 08. 30.) 지배층의 중국화 열망을 막아낸 것은 힘없는 백성의 보이지 않는 저항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제 자발적 복종의 시대는 지났다. 민초들의 정신을 이어 받아 이 땅에 켜켜이 쌓인 지혜를 정리하고 공유하는 건 우리의 몫이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같은 빼어난 기록문화가 조선 이전의 역사에서도 많이 볼 수 있었으면 좋을 텐데 아쉽다. 사기열전의 그 화려한 기록들을 보면서 군침을 흘렸듯이 춘추를 질리지도 않고 잘 우려먹는 중국인들의 은근함에 새삼 부끄럽다. 한문으로 쓰인 우리 고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게 돈 안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강남의 어지간한 아파트 한 채 값 정도인 20~30억 원이 당장 없어서 고전 국역 사업에 인색한 현실이 서글프다. 중국의 고구려사 침탈에는 분개하기는 쉽지만, 청나라 건륭제 때 문헌 3458종 7만9582권의 사고전서(四庫全書)를 발간한 그 치열함을 배우기는 어렵다. 아무쪼록 고전 국역 작업에 대한 투자가 문화강국의 주춧돌이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좀 더 늘었으면 좋겠다. 다가 올 한중일 역사 전쟁에 의연히 맞설 수 있는 방책은 가까운 곳에 있다. - [無棄]

Posted by 익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