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312
천하에는 하나의 재능도 없는 사람은 없으니 만약 많은 사람을 모아 각각 그의 장기를 써서 재능을 서로 통용하게 한다면, 세상에는 버려진 사람이 없을 것이고 사람은 재능을 버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天下無無一能之人。若聚十百人而各用其長。便爲通才。如此則世無棄人。人無棄才矣。

- 정조대왕, 『홍재전서(弘齋全書)』卷百七十二 日得錄十二 人物[二]

“세상에 버릴 사람은 없다(天下無棄人)”에서 따온 무기(無棄)라는 내가 지어 쓴 호(號)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자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옛 글에서 무기(無棄)의 용례는 대부분 지도자가 아랫사람의 장점을 잘 취합하고 함부로 사람을 내치지 않아야 함을 강조할 때 쓰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버릴 사람이 없다”로 풀이해도 될 것을 “세상에 버릴 사람은 없다”라고 한 것도 시빗거리다. 내가 사람을 부려 쓸 수 있는 위치에 서고 싶다는 욕망이 조사 ‘-은’에 담겨 있는 건 아니었을까? 경계할 일이다.

묵자는 “남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愛人若愛其身)”며, “천하에 남이란 없다(天下無人)”고 설파했다. 묵자의 겸애(兼愛)까지 나아가지 못한 건 실천하지 못할 것을 염려해서다. 天下無人보다 天下無棄人이 보다 실천가능하다는 핑계를 대본다. 내 게으름을 현실주의를 방패막이 삼아 보호하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여하간 부족한대로 무기(無棄)에라도 충실해보자.


070313
이명박 전 서울시장님의 출판기념회에 1만여명(혹은 2만명)의 인파가 운집했다. 한나라당이 장악한 서울시의회는 관례적으로 오후 2시에 해오던 개회식을 오전 10시로 앞당겨 출판기념회 참석을 위해 개회시간을 바꾼 것이 아니냐는 빈축을 사기도 했다. 지방에서 관광버스까지 대절해 참석한 것을 보고 동원 정치의 의혹을 제기하는 게 부질없을 정도로 열성적 지지자들의 향연이었다.

이 전 시장님은 연설에서 “투자는 성장을 가져오고 성장은 더 나은 복지와 분배의 기반을 마련한다”며, “발전이 바로 통합”이며 “모두가 다 잘 살면 국민 통합을 저절로 이루어지게 된다”고 역설하셨다. “불균형은 발전을 통해 적극적으로 해소해야”하며 “성장과 발전이 생산적 사회 통합을 이뤄낼 것”이며 “결국 통일도 경제”라는 주장이 흥미롭다. 대한민국 747을 향한 도전을 시작하자며 ‘7% 성장, 4만불 시대, 7대 경제대국’을 목표를 제시한 것도 실현 여부와 관계없이 명료해서 알아듣기 쉬웠다.

책 홍보 영상물에 전날의 자기 약속을 잊지 않고 실천한다(久要不忘平生之言)는 논어 한 구절이 인용되었다. 공자가 인간완성의 조건으로 견리사의(見利思義), 견위수명(見危授命)과 함께 제시한 말씀이다. 책임 윤리가 부족한 지도자들이 넘치는데 약속의 실현을 거듭 다짐하는 건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내가 본 출판기념회 가운데 가장 성대히 치러진 이날 행사를 보면서 도덕경 한 구절을 건네고 싶어졌다. 하여간 이 모난 성격이란.

부귀하면서 교만하면 스스로 허물을 남긴다(富貴而驕 自遺其咎).


070314
어제 강남역 회동을 기다리다 강남 교보문고를 잠시 들렀다. 김원중 건양대 교수님이 진수의 삼국지를 완역해 네 권으로 펴낸 것을 발견했다. 삼국지연의에 비하면 재미도 덜하고 가독성도 떨어지지만 삼국지 마니아들을 설레게 하고 삼국지 읽기의 지평을 넓힌다는 점에서 가슴 깊이 환영한다. 11만원짜리 전질이지만 도서 구매 목록에 올려놓고 두고두고 나를 괴롭힐 녀석들이다. 사실 삼국지가 열악한 편집 체계에도 불구하고 명맥을 유지한 것은 배송지(裵松之)가 단 주석의 힘이다. 배송지주는 원문에 맞먹는 분량이라고 하는데 이번 완역본에도 배송지주는 발췌해서 실려 아쉬움을 남긴다.

처음 뵙게 된 97학번 재현형님, 상일형님과 두 번째로 뵙는 상준형님을 비롯해 07학번까지 10년의 시차를 갖고 모인 자리는 푸근했다. 97학번 선배님들 입학 10주년 기념으로 여는 홈커밍데이를 기획하며 인해전술이나 물량공세가 아닌 농익은 우애와 은근한 진정을 나누는 자리를 고심했다. 양광모 휴먼네트워크연구소 대표는 사람은 최소한 21번은 만나야 자신의 인맥으로 만들 수 있다고 귀띔하신다. 나는 비교적 붙임성이 없는 편이다. 붙임성은 처음 보는 사람과 쉽게 친해지는 접근성을 주로 의미하지만 오래도록 인연을 잘 유지해가는 지속성을 뜻하기도 한다. 접근성이든 지속성이든 내가 좀 더 노력해야할 대목이다.


070315
<“한번쯤 ‘인용을 하나도 쓰지 말고’ 글을 써 보는건 어떨까?”라는 댓글에 대한 답변>

최근에 퇴계의 <성학십도>, 율곡의 <성학집요>를 통독했는데 대유학자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책의 본문 70~80%가 남의 글 편집(짜깁기라고 하면 너무 경망스럽게 보일까봐 자제했어요)이더라고요. 물론 이렇게 신나게 우려먹는 게 유가식 글쓰기의 특징임을 감안하더라도 좀 지나치다 싶었어요. 하지만 눈을 흘기면서도 은연중에 물들어서 남의 글 갈무리하면서 제 딴에는 단장취의(斷章取義)한다며 자기만족하고 그런 건 좀 있네요. 하지만 일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저는 지식을 생산해내는 학자도 아니니 만큼 남들이 했던 이야기를 부지런히 수입해서 재조합하기도 벅찬 녀석일 뿐입니다. 저는 글의 야마(글의 논리적 구성력쯤으로 해석하면 되나요?)를 꾀할 역량이 되지도 않고요.


차마 잡글쓰기를 당장 관둘 수 없어서 이런저런 잡글을 쓰고 있을 뿐 제가 뭐 거창한 주의주장을 담는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답니다. 최근 들어 그런 목표를 가지고 써본 글도 없네요. 하긴 제 잡글이 언제부터 그런 목표의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제가 글로써 누군가를 설득해본 경험이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제 잡글에게서 남을 바꾼다는 측면에서의 생산성을 바라는 것도 과도한 바람이십니다.^^; 인용에도 여러 종류가 있을 수 있을 거 같은데 옛사람들 말씀을 즐겨 인용하는 것의 폐단 말고 어느 정도까지의 인용을 포함하신 말씀인지 좀 애매하네요. 좀 범위를 명확히 해주시면 좋겠어요. 개인적 경험과 지인들과의 대화 속에서 체득한 지식만을 늘어놓으라는 말씀은 아니실 테고 어느 정도의 가이드라인이 있을 텐데 제가 그걸 잘 잡아내지 못하겠어요.


“호사스런 취미”로 비춰질 수 있다는 염려는 참 무서운 지적 같아요. 가장 덜 호사스런 취미는 토익 문제집 풀기 정도가 있을까요? 국어 맞춤법에 신경 쓰는 사람을 호사스럽다고 구박하는 경우는 있어도 영어 공부에 애쓰는 사람을 호사스럽다고 하는 건 못 들어봤거든요. <예기>나 <여씨춘추>를 몇 시간 만에 발췌독한다고 했더니 들려오는 소리가 “호사스럽다”였어요(살림살이에 보탬이 되는 책 좀 읽으라는 간곡한 충고도 곁들여서요). 언젠가 좋아하는 시구를 암송하다가 호사스럽다는 농담 섞인 핀잔을 들었을 때는 좀 섭섭하기까지 하더라고요. 문화유산 완상이 호사스럽고, 맛집 탐방이 호사스럽고, 설레는 마음으로 부치는 전자우편이 호사스럽다면 저는 차라리 이 팍팍한 삶에 호사스러움을 건사하는 걸 권하고 싶네요. 그건 겉멋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지 싶어요.


호사스러움이라는 잣대란 게 또렷하다면 슬쩍슬쩍 피해 다니고 싶은데 그게 참 어렵네요. <실업사회>란 책의 재무제표 분석 결과를 인용하고, 최장집 교수님의 옥음을 설파하는 건 덜 호사스럽고, 맹자의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에 호들갑을 떨고 성호 이익의 “착한 사람은 박복한가(善人福薄)”란 글을 읊조리는 건 호사스러운 일일까요? 어쩌면 호사스럽다는 말은 쓸데없이 지적 낭비나 일삼고 밥벌이에 도움 안 되는 책이나 두리번거리는 (저같은) 한량을 조금 높여서 부르는 말이 아닐까 싶네요.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고 말하면 너무 직설적이니까 조금 둘러서 표현하는 배려를 마다한다면 제가 너무 나쁜 놈이 되어버리겠죠.^^; 부끄럽사옵니다.


070316
『자유의 무늬』를 다시 읽다가 <특권>이라는 꼭지를 옛 친구처럼 반겼다. “예술(가)의 열외성(列外性)”을 비판하는 대목은 몇 년 전 나를 밤 새워 이 책을 읽게 만든 구절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나는 독서가의 열외성, 공부한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 많은 편이다. 내 자신이 공부와 인간적 성숙에는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는 가설을 증명하고 싶기도 하다. 마이클 폴라니의 ‘인격적 지식(Personal Knowledge)’을 지성과 덕성이 결합한 것이라 풀이한다면 이게 바로 내가 그리는 앎의 모습이다.

요 근래 내가 놀고 마시는데 탐닉하는 까닭은 내 공부가 너무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싫증이 난 건 아닌지 모르겠다. 가난하게 살 자신도 없으면서 밥벌이를 위한 공부를 멀리하는 까닭을 모르겠다. “돈과 밥의 지엄함” 앞에 무릎 꿇을 날이 머지 않았으면서 의연한 척 담담한 척 하고 있다. 사실 해법은 간단하다. 내가 조금 더 바지런해지면 내 변변치 못한 독서가 허망하지 않고, 밥벌이를 위한 공부가 지지부진하지도 않을 게다. 내 마음도 채우고, 내 배도 채우려는 욕심이 참 가당찮다.


070317
되요(X) -> 돼요(O)란다. ‘되다’에 ‘-어, -어라, -었-’ 등의 어미가 결합한 것을 줄여 쓰면 ‘돼, 돼라, 됐-’의 ‘돼-’ 형태가 되지. 예를 들어 안 됀다(X) -> 안 된다(O)/ 안 되요(X) -> 안 돼요(O)가 되는데 풀어쓸 수 있으면 ‘되’로 보고, 풀어쓸 수 없으면 ‘돼’로 보면 된단다. 여기서는 ‘되어요’가 줄어 ‘돼요’로 쓰는 게 맞지. 비슷한 원리로 자주 틀리는 표현에 뵈요(X) -> 봬요(O)가 있지. 자세한 건 한글맞춤법 제35항 [붙임2]와 관련 해설을 참조해주시길.^-^

인터넷 상의 한 줄 짜리 댓글에서 틀린 표현을 발견하고 발끈해(?) 이런 댓글을 남기는 선배를 후배들은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까? 무섭다며 피할까? 신기하다고 여길까? 쩨쩨하다고 생각할까? 가엾다고 혀를 찰까?^^; 그나저나 앞으로 나랑 잘 안 놀아 줄까봐 걱정이다. 첫인상이 중요하다는데 07학번과 만나는 초기에는 좀 평범한 컨셉으로 나갔어야 하는 건데 또 넘쳤다.


070318
드라마 <연개소문> 옛 방송을 대강 훑어보니 당나라 인물 가운데 위징(魏徵)이 돋보였다. 당나라 초기의 정치가 위징은 본래 당 고조 이연의 맏이인 태자 이건성의 측근이었다. 위징은 이건성에게 동생 이세민을 죽이라고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626년 현무문의 변으로 이세민이 집권하자 그토록 자신을 죽이려고 애쓰던 위징을 잡아들이지만, 이세민은 그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그를 중용한다.

이세민의 치세는 정관(貞觀)의 치(治)라 불리며 동아시아 통치자들에게 역할 모델이 되었다. 『정관정요(貞觀政要)』에서 위징이 가장 높은 비율로 등장할 만큼 이세민은 위징의 간언을 새겨들었다. 언젠가 반대파를 과감하게 등용한 위징 기용의 사례가 코드 인사를 비판할 때 쓰인 글을 읽은 적 있다. 국민의 정부 이래로 비판적 언론과 비판적 지식인이라는 수사를 덮어쓴 집단들이 집권세력이나 개혁진보세력의 이분법과 편협성, 파괴지향성 등을 통박하는 일들이 부쩍 늘었다.

“열린 마음으로 들으면 밝아지지만, 닫힌 마음으로 들으면 어두워진다(兼聽卽明 偏聽卽闇)”라는 위징의 명언은 대통령만 계속 듣기에는 너무 아까운 말씀이다. 비판하는데 기력을 쏟느라 늘 심각한 분들의 얼굴이 밝아졌으면 좋겠다. 일단 그 분들이 듣기 좋은 말만 가려 듣지 못하게 도와드려야겠다. 쓴소리를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기쁜 일이다. 내가 그분들을 기쁘게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자신들을 향한 비판을 기꺼워하는 언론과 지식인들이야말로 ‘비판적’이라는 왕관 혹은 방패를 쓸 자격이 있을 터이니 말이다.

Posted by 익구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