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326
경북대 국문과 백두현 교수님은 최근 〈경북대신문〉에 기고한 칼럼 ‘대구 지역의 생활어, 대구 사투리의 특성’에서 “음절이 긴 말을 짧게 줄이는 발음 습관이 대구 사투리 특징”이라며 “이는 말을 자주 줄여 쓰는 지금 젊은이들의 언어 습관과도 통하는 현대적인 요소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하셨다. 대구 사람들이 말수가 적고 과묵한 편이라 ‘언어의 경제성’측면에서 말을 많이 줄여 쓴 것이라는 분석이 흥미롭다.

대구 지역의 몇몇 어휘에서 말을 줄여 쓰는 현상이 비롯되었다는 것은 선뜻 수긍하기 힘들다. 용건을 압축해서 보내야 하는 휴대전화 문자나 메신저, 채팅 등을 통한 짤막한 대화의 확산도 적잖은 기여를 했을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미지나 영상의 범람하고 문자 텍스트의 지위가 흔들리면서 기인한 바도 있으리라. “과묵한 언어행실을 미덕으로 삼던 유교전통”까지 불러들이는 건 좀 지나쳤다. 그래도 대구 사투리가 말 줄임 현상의 한 요인이 되었겠거니 넉넉히 끄덕인다. 내 무뚝뚝함을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태어난 지 다섯 달 만에 서울로 오기는 했지만 태어난 곳을 고향이라 칭한다면 대구는 내 고향이다. 나는 내 고향 사람들이 말수 줄이는 것보다는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누셨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심전심으로 지역주의의 존속에 힘을 보태기보다는 그 해체를 위해 애써주셨으면 좋겠다. ‘우리가 남이가’와 ‘미워도 다시 한번’ 이 대구시민의 미덕으로 남는다면 지역주의 완화는 요원할 게다. 나는 결국 지역주의를 극복하는 첫 걸음은 대구가 결단하는 수밖에 없다고 지역주의적(!)으로 생각한다. 나는 내 고향을 사랑하지만, 이 나라를 더 사랑한다.


070327
“형 좌익이죠?”라는 질문에 순간 화를 낼 뻔했다. 우파 편식을 염려하는 내게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기도 하거니와 별 다른 근거도 없이 뜬금없이 묻는 게 좀 당혹스러웠다. 나는 “중도 자유주의자”쯤 되는 거 같다고 해명(?)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 자신에게 화가 났다. 무의식 중에 튀어나온 “중도(中道)”라는 말 때문이다. 일전에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님은 참여정부를 중도 자유주의로 규정하신 바 있다. 아마 그걸 읽은 기억이 언뜻 나서 그렇게 밝힌 모양이다.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 뭇매를 맞고 있는 참여정부가 정체성이 없기 때문인지, 공격 받기 좋은 중도로 포지셔닝해서 그런 것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난 중도라는 말이 어색하다. 

나는 정치학적 개념에 대한 공부가 부족하고 변덕도 심해 내 성향(?)을 밝히기 힘들다. 자유주의 좌파(liberal left)라고 분류되는 존 롤즈의 사상에 많은 감화를 입었기 때문에 그 언저리에서 조금 오른쪽에 있겠거니 막연히 추측한다. 자유주의 좌파를 오른쪽으로 옮기면 자유주의 중도가 되긴 하겠지만 인간의 내면이 그렇게 두부 자르듯이 갈리는 건 아닐 테니 더 이상의 가름은 무익하다. 실상 내가 자유주의자를 자칭하더라도 자유주의는 자유지상주의자에서부터 중도 좌파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요즘 중도 노선이 유행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중도가 균형감각을 향한 노력이기보다는 제 치우침을 분칠하기 위한 용도가 강하다. 사실 그 치우침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이 땅을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 가야 하느냐하는 섬세한 논의를 위해서 건전한 이념 논쟁을 벌일 용기나 정성이 모자란 모양이다. 중도가 좌와 우의 산술평균이 아니라는 점은 자명하다. 중도를 습관처럼 입에 올리는 분들이 이것과 저것을 뛰어넘은 대안을 만들어 낸 거 같지는 않다. 중도니 상생이니 통합이니 하면서 개혁이 필요한 곳을 넘어가려 하지 않았나 엄중히 성찰해야 한다.

소설가 공지영님은 어느 인터뷰에서 캐피어 좌파를 언급하며 “캐비어를 먹는 사람은 꼭 우파여야 하나요?”고 되물었다. 나는 그 지적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 사회에는 좀 더 많은 좌파가 필요하다는 지당하신 말씀만 읊조리고 싶지는 않다. 나는 보다 구체적으로 좌파도 캐비어를 맛나게 먹을 수 있기를 바란다. 혹자는 좌파와 캐비어는 네모난 원처럼 모순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캐비어 먹는 좌파가 늘어날 때 좌파에 관심을 쏟는 이들이 더 늘어날 거 같다. 스스로 우파로 여기는 사람의 상당수가 캐비어를 탐낸다면 너무 지나친 발언일까?

나는 좌파에게 내 자신도 지키지 못할 과도한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을 멀리할 것이다. 좌파도 똑같은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좌파이면서도 캐비어를 먹을 위치가 되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이 고민을 좀 더 확장해봐야겠다. 극우파를 정규분포의 끄트머리로 내모는 일과 병행해서 말이다.


070328
동아대 석당학술원 산하 고려사역주사업단이 전 30권으로 기획된 고려사 완역본 중 1차분으로 열전(列傳)편을 9권으로 완간했다는 소식을 이제야 확인했다. 곧 나올 세가(世家)편에서는 신돈의 자손이라며 격하돼 반역열전에 실린 우왕과 창왕을 세가에 복권해 싣기로 했다. 반가운 일이다. 고려사 말기의 왜곡된 사적을 주석으로나마 교정하는 노력까지 기울여 주셨으면 좋겠다. 조선왕조실록처럼 국역 고려사 홈페이지도 머잖아 개설돼 고려사도 손쉽게 검색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한국고전번역원을 설립하는 법안이 국회에서 계류 중이라고 한다. 예산 부족이라는 핑계 때문이다. 지난 10년간 번역된 모든 한국 고전의 75%가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나온 셈이다. 우리 고전을 한글로 옮기는 사업을 민간단체가 도맡아 해왔다니 부끄럽다. 고전번역원이 설립될 경우 현재 민추 지원 예산에 20억원 정도의 예산이 추가로 소요된다고 하는데 이 돈이 없어서 못하고 있다니 개탄스럽다.

고전을 국역해 일반인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 학술문화 민주화의 일환이라는 주장에 적잖이 동감한다. 뒷 세대 번역가들은 점점 한문을 모국어처럼 읽기 힘들다고 한다. 한문을 모국어처럼 읽을 수 있는 세대가 모두 돌아가시면 영영 물어볼 곳도 없어지는 셈이다. 민추는 고전번역원에 발전적으로 흡수되려는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이네들의 노고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열악한 처우를 조속히 개선하고 고전 국역에 가속도를 붙일 필요가 있다. “빨리 빨리”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다.


070329
신라 제42대 흥덕왕이 후사 없이 붕어하자 사촌 동생인 김균정과 오촌 조카인 김제륭은 왕위를 놓고 다툰다. 균정이 전사하자 그의 아들 김우징은 김양 등과 더불어 청해진으로 도망가 장보고에게 의탁한다. 제륭을 도와 왕(희강왕)으로 옹립한 김명은 이홍, 배훤백 등과 함께 다시 난을 일으켜 스스로 왕(민애왕)이 된다. 때를 노리던 김우징 일파는 장보고의 힘을 빌어 민애왕을 공격한다. 민애왕이 병사들에게 시해되고 승리를 거두자 김양은 그 옛날 균정과 제륭의 전투 때 자신의 다리를 쏘아 맞혔던 배훤백을 부른다.

<삼국사기> 김양 열전에는 김양이 배훤백에게 “개는 제각기 주인 아닌 사람에게 짓는 법이다. 너는 너의 주인을 위해 나를 쏘았으니 의사(義士)다. 내가 원망하지 않을 것이니 너는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삼국지>에도 보인다. 조조가 원소에게 대승을 거두고 성을 접수하자 조조의 신하들이 원소와 내통한 문서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조조는 “원소가 한창 강성하였을 때는 나 스스로도 생존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소.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했겠는가?”라며 서신들을 불태우게 했다.

김양과 조조의 행동이 승자의 여유라고 폄하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고사가 애틋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이런 도량은커녕 악어의 눈물조차 흘릴 줄 모르는 승자들이 너무 많다는 못마땅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070330
<‘인생은 무의미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글>

중국 북송(北宋)의 유학자 주돈이의 <태극도설>은 우주의 생성과 인간의 근원을 논한 글이라고 해. 성리학의 입문서라는 <근사록>이나 퇴계 선생의 <성학십도>의 첫 머리는 태극도설에서 시작하니 세계를 인식하는 데 중요한 길잡이로 삼은 텍스트지. 그런데 “무극이 곧 태극(無極而太極)”이라는 구절의 해석을 놓고 서로 다른 주장이 펼쳐지고 있어. 무극으로부터 태극이 나온다고 해석해 무에서 유가 생긴다는 뜻으로 보는 도가적 해석이 있고, 무극과 태극을 한 실재의 두 가지 방면으로 보아 인식을 초월했다는 점에서 무극이라 이름 짓지만 태극은 실재한다는 주자의 해석으로 갈리고 있어.

물론 나도 이게 뭔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잠깐 맛보는 이기론(理氣論)도 여기서 출발하는 것이니 손쉽게 이해하려는 건 과욕인지도 모르겠어. 아무튼 무에서 유가 나왔다는 주장과 무와 유가 한 실재의 다른 모습이라는 주장 가운데 무엇이 더 설득력 있는지 잘 모르겠어. 어쩌면 어느 하나를 믿어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도 들고.^^; 여하간 인생의 본질이 무의미한가라는 질문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듯싶다. 인류의 운명이 특수한 역사적 법칙이나 진화적 법칙에 의해 필연적으로 전개된다는 역사결정론인 역사주의를 어떻게 받아들이는 가도 결부시켜 생각해볼 수 있겠지.

한 인간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다 정확히 말해 부여된 사명이나 해야 할 임무 같은 게 있을까를 섣불리 말하기는 어려운 문제다. 이건 인간 본성이 선하냐 악하냐 묻는 것만큼 인간의 인식능력을 벗어나는 영역일 공산이 크니까. 나처럼 인생은 한 번 뿐이라고 믿는 사람은 어떤 거창한 대의명분의 병졸로서 내 삶이 소비되는 것도 원치 않고, 그렇다고 아무런 의미 없이 태어났으니 엉성하게 살다가 가는 것도 바라지 않아. “인간다움”에 대한 개념 정의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최소주의로 합의한 인간성을 고양하는 게 내 삶의 부가가치라고 믿고 있어.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인생은 한 번 뿐이고, 인간은 앞으로도 불완전하다는 가정 위에 내린 결론이지.

여전히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나는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이 확산되는데 미력이나마 보태고 싶어. 좀 더 구체적으로는 사회, 경제, 문화적 독점을 해체하는 것을 탐구하고 있고. 이러한 고심들이 내 삶이 너무 덧없고 맥없게 끝나지 않는 의지가지가 되어줬으면 좋겠어. 나는 이처럼 인생의 의미 유무보다는 무의미한 삶을 사는 개인을 줄이는 일에 더 관심이 간단다. 이 정도의 의미나마 부여하지 않는다면 세속에 살기가 너무 팍팍하지 않을까? 이 의미를 구현하기 위해서라도 대충 살지 말아야 하는데 노는 걸 너무 좋아해서 큰일이야.^^;


070331
97학번부터 07학번이 만나는 뜻깊은 자리에 미력이나 보탤 수 있고, 함께 즐길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난 행사장 입구에서 06, 07학번을 대상으로 후래자 삼배(後來者 三盃)를 실시했다. 말 그대로 늦게 온 벌로 석 잔을 마시는 걸 뜻한다. 경주 안압지에서 발굴된 14면체 주사위에도 ‘연거푸 술 세 잔 마시기(三盞一去)’가 있기도 하다. 어려운 걸음 해주시는 선배님들보다 미리 와서 자리를 채워주길 바라는 마음에 악역을 자처했다.

나는 행사장에 비치된 방명록에다 도덕경 58장의 광이불요(光而不耀)를 눌러 썼다. 다양한 풀이가 있을 수 있지만 “빛나되 눈부시지 않기를”이라는 해석이 가장 마음에 든다. 우리의 빛남이 서로의 빛남을 간직하며 밤하늘의 별처럼 따로 또 같이 광휘를 뿜어내기를 바란다. 이 귀중한 자리의 실마리를 제공해주신 재현형님, 인호형님 고맙습니다. 2차까지 함께 해주신 영빈형님과 주원형님께도 감사 인사 드려야겠다.


070401
꿈결같은 밤이 지나갔다. 시인 최영미님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시구가 떠올랐다. 한바탕 잔치가 끝난 뒤의 허무감이 잘 묻어나는 대목이라서 잘 어울리는 듯싶다. 물론 이 시는 그런 용도(?)로만 인용되기에는 더 묵직한 시다. 마치 오늘날의 386세대에게 쏟아지는 환멸을 예견이나 하듯이 담담하게 투덜거리는 이 시를 얼마나 되뇌었는지 모르겠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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