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409
내가 몸담고 있는 경영B반 웹진에서 한미 FTA 특집호에 도전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내가 5년 만에 신문 스크랩을 하고 있을 정도로 꽤 만만찮은 이슈라는 생각에서다. 웹진이 시사교양을 다루는 매체는 아니지만 한 번쯤 생각을 품어볼만 하다는 생각에 용기를 냈다. 어차피 나온 의견들을 정리하는 수준 밖에 만들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 핑계로 우리끼리 공부나 좀 해보자는 꿍꿍이였다. 나는 회의 시간을 이용해 그룹 스터디식으로 학습한 다음에 좌담회 형식의 결산을 해보자는 계획을 내놓았다.

홍익이가 “준비하는 과정에서 웹지너 절반 탈퇴, 출판 후 독자층 절반 이탈 예상”이라는 재미난 댓글을 달아줬다. 일전에 김선주 선생님은 <담론이 사라진 시대>라는 칼럼에서 “이렇게 공적인 글쓰기가 어려운 시대는 없었던 것 같다”고 푸념하신 바 있다. 내 또래의 친구들이 시사적인 문제에 대한 허심탄회하게 논의하기란 참 드물다. 중국의 후스(胡適)가 “더 많은 문제를 연구하고 더 적게 주의를 논하자(多硏究些問題 少談些主義)”라고 주창했듯이 내 둘레의 사람들과 문제의식을 공유하길 바란다. 도반(道伴)이 그리 까마득한 경지는 아닐 게다.


070410
마켓 셰어는 참이슬이 높지만 로열티는 처음처럼이 높다는 기사를 재미나게 읽었다(“친구같은 술 `참이슬` vs 순해서 좋다 `처음처럼`” 한국경제. 2007. 04. 01. 참조)”. 내 눈길은 끈 것은 한국갤럽이 자체 개발한 미래 경쟁력 진단 지수인 G-CBPI(Gallup Consumer Brand Preference Index)이다. G-CBPI는 특정 브랜드에 대한 소비자의 호감도를 나타내는 지수다. 현재의 브랜드 위치를 파악하고 미래의 성과를 예측하는 지표로 활용할 수 있다. ㄱ브랜드를 가장 구매하고 싶다는 소비자가 50%고, ㄱ브랜드를 가장 구매하고 싶지 않다는 소비자가 20%면 G-CBPI는 50-20=30이 되는 간단한 계산이지만 발상이 흥미롭다.

참이슬의 G-CBPI는 50.6, 처음처럼은 26.3이라는 조사 결과는 처음처럼이 지금보다 시장 점유율을 더 높일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2004년 마케팅 강의 발표 주제로 “교촌치킨 vs BBQ”를 준비했던 기억이 난다. 팀원들 사이에도 교촌치킨파와 BBQ파가 나뉘어 티격태격했던 추억이 새록하다. 나는 발표 유인물을 작성하며 독일의 경제학자 헤르만 지몬의 말씀을 맨 끄트머리에 넣었다. “치열한 경쟁만이 최고의 노력으로 이끌어간다. 메르체데스 벤츠는 BMW와 아우디가 있음을 기뻐해야 한다. 물론 그 반대도 옳다”는 경구를 찾았다며 좋아했지만 발표 점수는 신통치 않았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천사 미하일은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를 돌보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사랑으로써 살아간다는 것을 깨달아 다시 천국으로 돌아갔다. 천국 입장권을 놓고 누가 내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한참 머뭇거리며 사랑과 경쟁으로 산다고 답할 것이다. 그래도 이과적으로(!) 각종 영양분과 물이라고 답한 내 동생보다는 좀 덜 무뚝뚝하다.^^; 정정당당하게 경쟁하고 패자를 보듬는 연대의식을 발현하는 일이 양립불가능한 문제는 아니다.


070411
미국의 경제학자 이스털린(Easterlin)은 경제 성장과 인간의 행복감 사이의 상관관계를 탐구한 선구적 학자다. 그는 소득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같은 나라, 같은 지역의 소득수준이 낮은 사람들보다 행복감도 커진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런데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에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의 비율이 별 차이가 없다는 점이 발견됐다. 또 한 나라 안에서 가난하던 시절과 부유한 시절을 비교해도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의 비율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 나라의 높은 경제 성장과 물질적 풍요가 그 나라 국민 전체를 더 행복하게 한다는 보장이 없는 셈이다. 이처럼 일정한 생활수준에 다다르면 경제 성장은 개인의 행복, 사회적 후생 증가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현상을 “이스털린의 역설”이라 일컫는다.

이스털린은 “소득과 욕구는 분명 나란히 증가한다. 내 해석이 맞는다면, 경제가 성장한다고 해서 사회가 부족함 없는 과잉 공급의 상태가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끊임없이 성장하는 욕구를 더욱 강하게 자극하게 될 것이고, 그런 욕구의 충족을 위해 다시금 경제적인 성장이 요구될 것이다(하랄드 빌렌브록 지음, 배인섭 옮김, 『행복경제학』, 미래의창, 2007, 28쪽)”라고 주장한다. “더 많은 돈이 지속적으로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는 잘못된 가정”을 버리라는 그의 충고 앞에 많은 걸 곱씹게 된다. 욕망의 증가 속도가 부의 증가 속도보다 더 빠르다면 우리는 연신 소금물을 들이키며 갈증을 느껴야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스털린의 역설이 성립하는 “일정한 수준의 부”가 어느 정도인지는 이견이 적잖다. 벌써부터 국민소득 2만불 시대를 넘어 3만불 시대로 가자는 구호가 나오는 것을 보면 우리의 일정 수준은 3만불로 설정해야하는 것인지 헛갈린다. 절대적 빈곤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지만, 상대적 빈곤을 다독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돈이 드는 건 아닐 것이다. 정부 정책 차원에서 국민의 행복감을 증진하는 서비스를 고안해야겠지만 개별 경제주체들도 인식의 전환을 할 필요가 있다. “60세가 되어 20세 시절보다 열 배 부자가 된 사람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누구라도 열 배 더 행복해졌다고 말하지 않는다”라는 조지 버나드 쇼의 핀잔에 자유롭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다.


070412
고3 수험시절 나를 괴롭힌 것은 늘 그랬듯이 수리탐구Ⅰ영역(수학)이었다. 영어나 과학탐구도 불안했지만 결정적 순간에는 수학이 내 발목을 잡을 것임을 오랜 경험(?) 통해 인식하고 있었다. 덕분에 수험생활 내내 내가 좋아하는 사회탐구나 언어영역 공부는 거의 못한 채 수학에 매달렸다. 내가 수학을 못했던 건 재능도 없었지만 즐기지도 않았기에 단순히 시간을 좀 더 늘린다고 단숨에 해결된 문제는 아니었다. 내 수험생활은 그리 즐겁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택한 전략은 지극히 합리적인 행동이었다. 사슬의 법칙이란 게 있다. 사슬의 강도는 가장 약한 부분에서 결정 난다는 뜻이다. 다른 부분이 아무리 굵어도 한 군데가 약하다면 사슬은 툭 끊어지게 된다. 이미 안정적인 점수를 확보한 과목에 시간을 들이기보다는 불안정하고 점수 상승의 여지가 많은 과목에 집중 투자함으로써 약한 사슬을 강화하는 건 수험생의 미덕이라고 예찬할 만하다.

행정고시 수험생들은 행정법과 경제학을 대체로 까다로워한다. 행정법의 진입장벽도 만만치 않지만 나는 결국 내 약한 사슬은 경제학이 될 것이라고 직관하고 있다. 이제 곧 경제학 공부에 들어가면 아마 지겹도록 옆에 끼고 있어야 할 듯싶다. 그러다 보면 또 다른 약한 사슬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정치는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 하지만 공부도 살아있는 생물이다. 학문도 가능성의 예술이리라.


070413
꺼지기 전 촛불마냥 대통령 4년 연임제 개헌안에 대한 막판 힘 겨루기가 한창이다. 개헌이 정치적 흥정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노무현 대통령님은 조건 없이 개헌안을 거둬야 한다. 물론 대통령이 헌법에 규정된 권한에 따라 개헌 발의 의사를 밝혔을 때부터 일관되게 토론을 거부했던 분들은 떳떳하지 못했다. 시기의 문제를 제기한 분들의 논거는 그리 튼실하지 않았다. 밉살맞은 사람이 제안한 것이니 논의조차 하기 싫다는 인상을 받았다면 내 옹졸함 때문일까? 대통령과 야당, 언론 가운데 누가 제 몫의 책무에 충실했는가.

개헌은 단순한 법률 개폐와는 차원이 다른 민주공화국 최고의 정치행위 가운데 하나다. 대통령의 개헌 발의권은 그에 걸맞게 신중하게 쓰여야 한다.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이 별로 없는 나는 정쟁이 일상화될 거라는 비판을 방어하기 힘들다. 지금의 양대 보수정당 과점 구조는 선거제도의 모순 이전에 국민들의 자발적 선택의 결과물 아닌가. 사실 대통령 단임제가 제도의 문제인지, 사람의 문제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단순히 단임제 하나에 공력을 쏟아 부을 까닭이 없다. 긴요하면서도 좀 더 손쉬운 제도 개혁으로 선거제도 개편을 들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정치적 대표성을 높이는 건 보다 근본적인 개혁이 될 것이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 만료일이 거의 일치하는 지금이 원포인트 개헌의 최적기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시기적절성까지 포기하며 챙겨야 할 것은 국민들의 섭섭한 마음자리다. 4년 연임제 개헌을 지지하지만 현 정부 내의 개헌은 반대했던 국민들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그것이 설령 노무현을 인간적으로 싫어해서 나온 견해라고 할지라도. 한미 FTA로 실의에 빠져 있는 일부 국민들을 다독이며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도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 “개헌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 더 옳은 것은 국민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며 명예롭게 퇴각하자.

대통령님보다 생산적 논의를 봉쇄한 분들이 헌정을 흩뜨린 책임을 좀 더 져야할 것이다. 개헌정국에서 유독 돋보였던 고진화 의원님을 다시 보게 됐음을 꼭 기록해둔다.


070414
춘추좌전 양공 25년조에는 제 나라의 최저가 그 군주인 광을 시해했다는 경문(經文)이 나온다. 사관의 우두머리인 태사(大史; 전문(傳文)에는 대사라고 쓰여 있으나 직책 이름은 태사라는 풀이가 많아서 이걸로 따른다)가 “최저가 그의 군주를 시해했다(崔杼弑其君)”라고 기록했더니 최저가 그를 죽였다. 태사의 아우 두 사람이 이어서 그렇게 기록했는데, 그 두 사람도 죽였다. 그들의 아우가 또 그렇게 기록하니, 그 때는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당시 역사서를 적는 사관은 세습제였다고 한다. 결국 4형제가 목숨을 걸고서야 한 줄의 역사 기록이 세상에 전하게 됐다. 이 고사는 역사의 엄중함을 환기하는 사례로 많이 인용된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4년조의 기사에는 재미난 기록이 실려 있다. 태종이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지자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勿令史官知之)”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달리 그 말 그대로 적히게 됐다. 세종 13년에는 세종대왕이 태종실록을 열람하겠다고 나서자 맹사성 등이 “사관(史官)도 또한 군왕이 볼 것을 의심하여 그 사실을 반드시 다 기록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그 진실함을 전하겠습니까(史官亦疑君上之見, 必不盡記其事, 何以傳信於將來)?”라며 만류한다. 세종 20년 대왕께서 다시금 열람을 시도하자 황희 등이 “만약 전하께서 실록을 보신다는 것을 들으면 (사관들의) 마음이 반드시 편하지 못할 것(若聞殿下省覽, 則心必未安)”이라며 반대해 끝내 보지 못했다.

오늘날 공무원의 중립의무가 공무원의 정치적 자유를 옥죄는 방향으로 쓰이고 있는 실정에서 옛 의미의 사관 제도를 만들기는 어려워 보인다. 사평(史評)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적어도 꼼꼼한 기록을 남기는 데는 좀 더 정성을 쏟아야 한다. 미국의 국립문서기록관리청(The Nati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과 같은 노력이 부족하다. 연방정부의 독립 행정청인 미국의 경우에 견주어 우리네 국가기록원은 행정자치부 산하 2급청이다. 국가기록원을 독립된 차관급 청으로 격상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수긍한다. 치밀한 기록은 행정의 책임성을 높여줄 것이다. 불리한 내용도 가감 없이 남기는 현대판 사관은 불가능한 꿈일까. 기록은 힘이 세다.


070415
컴퓨터 앞에 있으면 국어사전 이용하기가 참 편리하다. 모르는 단어를 톡톡 쳐 넣으면 풀이와 용례가 척척 나온다. 한국어로 밥벌이를 하지 않는 사람 가운데 나처럼 국어사전을 애용하는 경우도 드물게다. 동생 방 정리를 하다가 나온 어휘집을 넘기며 새로 익히는 우리말 표현이 흥겨웠다. 문득 이렇게 어휘집이나 사전을 통해 발굴한 말을 억지로 유통시키려는 것이 얼마나 온당한 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품어봤다.

나는 언어순수주의자는 아니지만 정확한 한국어가 아름다울 개연성이 있다는 가정에는 기꺼이 동감한다. 나는 정확성과 더불어 다양성을 추구하고 싶다. 한국어에 개념어가 부족하다고는 하지만 형용사나 동사는 아예 묻어버린 말들이 너무 많다. 먼지를 털어내고 조금 써보는 게 그리 극단주의적 행위는 아닐 것 같다. 이러한 개인 언어가 둘레로 퍼져서 언중의 호감을 얻는다면 어휘로서의 생명력을 부여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안습’, ‘지름신’, ‘폐인’ 같은 신조어의 숨결만 느낄 까닭이 없다.

소설가 김훈 선생님이 영어를 잘해야 한국말도 잘할 수 있고, 국제적 감각이 있어야 한국말이 풍요로워진다는 말씀을 하셨다(“'역전' … 이젠 도올이 김훈을 인터뷰하다” 중앙일보. 2007. 04. 14. 참조). 나는 그렇게 단정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영어는 잘해도 한국어를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한국어를 잘 하기 때문에 영어까지 잘 하는 경우도 많다. 오히려 세계화 시대라는 미명 아래 영어로의 쏠림이 심화돼 모국어를 얕보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 듯싶다. 누리꾼들이 영어 전치사와 접속사를 구분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정성의 반의 반만 국어사전을 들췄다면 이처럼 그악스러운 악플들이 넘치지는 않았으리라. 오늘 익혔던 풋풋한 토박이말을 복습해본다.

결곡하다, 공변되다, 구순하다, 깨단하다, 꾀송거리다, 너볏하다, 느껍다, 당알지다, 두남두다, 부닐다, 빙충맞다, 아금받다, 알쭌하다, 앙그러지다, 억실억실하다, 일매지다, 찐덥다, 참따랗다, 탁탁하다, 헤살놓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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