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416
2007년 4월 12일 서울외고가 기독교 학교로 전환했다고 한다. 이날 1층 시청각실에서는 기독교 학교 출범 감사예배가 진행되었단다(여기서 기독교는 가톨릭이 아닌 개신교를 지칭하는 것일 테니 이하 개신교로 칭한다). 감사예배 녹취록 일부를 보니 많이 착살맞았다. 김희정 교장은 “저를 환영하고, 좋아하는 곳에만 우뚝 설 것이 아니라, 저에게 반대를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면 왜 반대를 던지는지 듣기를 원합니다”는 알쏭달쏭한 말씀을 나열하고 있다. 그간 학생 대다수가 반대하는 개신교 학교로의 탈바꿈을 어떻게 일방적으로 무시했는지 익히 들어왔던지라 그 말씀에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더니 2007년 3월부터 시행된 개정 서울외고 교칙 징계규정은 섬뜩한 단어들 일색이다. 본래도 그런 교칙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혹여 믿음(?)에 반하는 학생들을 계도(?)하겠다는 의도로 추가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내 모교가 교육을 포기하고 선교에 나서는 모습이 안타깝다. 학생들의 인권을 침해하면서 인성 교육을 하겠다며 호들갑 떠는 게 민망하다. 일련의 사태에 문제의식을 가진 재학생들이 울분을 토로하는 걸 보려니 가슴 아프다. 앞으로 일상적으로 자행될 위헌적 행태에 시달릴 후배님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짠하다. 대한민국 헌법 제20조 1항을 어렵사리 붙들고 있는 후배님들을 지지한다. 내 모교는 얼마나 더 초라해질 셈인가?


070417
『유림(儒林)』 4, 5, 6권을 독파했다. 조광조, 이황, 이이, 공자, 맹자, 주희, 왕수인 등 거유(巨儒)들의 조명한 유교소설이다. 비록 연작 형식이지만 참 오랜만에 읽은 장편소설이다. 특히 6권에서 퇴계의 이기이원론과 사단칠정론을 설명하는 대목은 작가가 많은 공력을 들였음을 느꼈다. 제 아무리 영민한 소설가라고 해도 유가철학의 고갱이를 쉽게 익히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자신이 오랫동안 곱씹었기에 쉬우면서도 핵심을 가로지르는 글을 내어놓았으리라. 서술은 하되 창작은 하지 않는 유가식 글쓰기인 술이부작(述而不作)이 잘 녹아 들어간 수작이다.

마지막으로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퇴계 선생님이 고봉 기대승과 편지로 치열하게 토론하는 장면이었다. 퇴계는 자신보다 스물 여섯 살 어린 고봉에게 “지금 그대(고봉)가 정성껏 저를 가르치신 덕분에 잘못된 견해를 버리고 새로운 뜻을 얻었고, 새로운 깨달음을 키웠으니 참으로 다행입니다”라고 스스럼없이 고백한다. 돌아가기 두 달 전까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고치는 모습이 눈부시다. 스승으로 삼을 신하를 묻는 선조 임금에게 자신의 직계제자도 아닌 고봉을 사심 없이 추천했던 그 마음자리를 숭모한다. 도산십이곡 한 구절을 빌리자면 “그 행하신 길이 앞에 있는데 그 도리를 어찌 따르지 않으리!”


070418
미국 버지니아 공대의 총기난사 사건을 담담하게 지켜보기 힘들다. 범인 조승희씨가 한국 교포학생인 것도 차분히 관조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이번 사안이 인종이나 국적을 따질 필요가 없다는 건 또렷하다. 이번 비극이 한국인이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이번 사건의 범인이 브라질인이라고 해도 이걸로 브라질인의 폭력성을 입증했다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는 그저 총기 소지의 자유가 헌법으로 보장된 나라에서 가끔 벌어질 법한 끔찍한 사건이다. 사람의 문제보다 제도의 문제가 좀 더 크다. 사람의 문제도 민족이나 국민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일개인의 문제라고 봐야한다.

한국 언론의 호들갑에 과공비례(過恭非禮)라는 말을 꺼내고 싶지만 아껴두는 게 좋겠다. 법률상 대한민국인인 조승희씨의 만행에 함께 부끄러워하고 송구스러워하는 것도 거개 자연스럽고 적잖이 마땅하다. 그러나 그 감정을 좀 더 확장해서 세계시민으로서 안타깝고 애틋한 마음을 품어 봤으면 좋겠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열악한 후생복지에 고개를 젓고, 무고하게 죽어간 이라크의 시민들을 딱하게 여기는 건 위선이라든가 오지랖 넓은 참견이 아닐 게다. 한미 FTA협상에 반대하며 분신한 고 허세욱님의 호소에 관심을 보내는 것도 비슷한 맥락의 노력이다. 우리가 덜 가까운 이들의 고통을 나눌 수 있을 때 슬픔을 극복하는 힘이 솟아난다. 어느 버지니아 공대생의 피켓 문구처럼, “Heal the pain with love(사랑으로 아픔을 치유합시다).”


070419
북송 시대 사마광은 황하 유역의 서북 지역 출신이었고 왕안석은 양쯔강을 중심으로 한 동남 지역을 대표했다고 한다. 주도권을 쥐고 있던 서북 지역이 전통주의를 주장했다면 신흥세력인 동남 지역은 신법(新法)으로 쇄신할 것을 주장했다. 지식인의 철학이나 정견이 온전히 그 개인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시공간의 제약이라고 표현하기보다는 요소(要素)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하다. 자신의 생각에 시공간이라는 요소를 눅여낼 때 그 사상이 좀 더 탄탄해질 수 있다. 역사와 환경을 톺아보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제3세계 학생으로서의 나를 기대해본다.


070420
정부가 20일 국회 통외통위와 한미 FTA 특위에 협상 결과를 담은 협정 원문을 공개했지만 열람 수준이 너무 깐깐해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다.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서만 열람 가능하게 만들고 메모하는 것도 미주알고주알 제한했다. 국회의원당 보좌관 1명만 열람을 허용해서 전문가의 자문도 받지 못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정부가 공개한 자료는 협정문 원문과 부속서에 그쳐 관세 양허안과 서비스ㆍ투자 유보안 등 민감한 세부 문건들은 공개에서 제외됐다.

참여연대의 지적대로 국민들은 통상능력과 영어능력만 보고 국회의원을 선출하지 않는다. 설령 국회의원들이 행정부의 통상전문가의 식견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그들에게 행정부를 감시하는 기능을 줌으로써 견제와 균형을 이루기 위함이다. 미국은 협상 타결 직후부터 의회와 민간 전문가 700여명이 협정문 초안을 꼼꼼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정부는 통상절차가 미국과 다르다며 정보 공개를 머뭇거리고 있다. 협정문 공개가 요식행위로 전락할 때까지 통상절차법 등을 손질하지 않았던 국회의원들의 책임 방기도 크다. 이래가지고 우리의 입장을 조문화 작업에 최대한 반영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그간 국정감사 등이 벌어질 때 정부 관료들에 대한 국회의원들의 오만불손한 고압적 태도가 마뜩잖았던 나이지만 정부 관료도 그에 못지 않을 수 있다는 건 여실히 목도하고 있다. 입법부와 행정부가 서로 일방통행만 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성역을 없애기를 바랐던 참여정부가 도리어 성역을 만드는 모습을 보는 건 씁쓸하다. 관료들을 민주적으로 통제하라고 만들어 놓은 참여정부 안의 정무직 공무원들은 당최 뭐하고 있는 건가. 이 정도의 통상시스템으로 세계 각국과의 FTA를 잇달아 추진하겠다니 갑갑하다(미국과도 해치웠으니 더 두려울 게 없다는 건가).

우울한 심사를 『행정의 공개성과 정치 지도자 선출』(책세상, 2002)을 읽으며 달래봐야겠다. 막스 베버는 관료제와 의회 민주주의를 양립시키기 위해 궁리했다. 그는 튼실한 의회 민주주의 구현이 관료제의 압도를 막는 힘이 된다고 주장한다. 베버의 신념대로 한미 FTA가 대한민국 국회가 비판을 넘은 대안을 제시하고, 견제와 더불어 책임을 지는 ‘적극적인 정치(베버의 용어)’를 펼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비가 그치니 황사가 온다.


070421
말로만 듣던 <러브 액츄얼리>를 마침내 봤다. 해피엔딩 영화를 좋아하는 내가 흡족했던 걸 보니 이 영화는 해피엔딩인 모양이다. 영화를 자주 보지 않는 나는 가끔 보는 영화만이라도 “끝이 좋으면 다 좋아(All's well that ends well)”였으면 좋겠다는 고집이 있다. 그래서 해피엔딩에 집착한다. 짝사랑하던 회사 동료와 사랑을 이루지 못한 사라(로라 리니)의 이야기는 이 영화를 해피엔딩으로 간직하려는 내 욕심을 방해한다. 친구의 신부를 사랑한 마크(앤드루 링컨)는 낭만적이라며 찬사를 보내는 수준에서 마무리지을 수 있는데 말이다.

정신이상으로 수시로 동생을 찾는 오빠를 위해 그토록 고대하던 짝사랑과의 하룻밤을 포기하는 사라의 슬픔이 느껍다. 열망의 정점에서 희열의 최고조에서 스스로 내려오는 사라의 눈물이 다른 웃음들을 압도한다. 로완 앳킨슨이 아니었더라면 이 영화를 해피엔딩으로 쳐주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사랑은 분명(Love actually) 어느 곳에나 있지만 나처럼 무심한 녀석에게는 좀 멀리 떨어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은 기성품(Ready-made)끼리의 만남이라는 고약한 연애관을 가진 나로서는 포르투갈어를 배우는 제이미(콜린 퍼스)의 정성을 따라가려다 가랑이가 찢어질 텐데 걱정이다.


070422
<위대한 유산 74434>를 시청하다가 『동대사요록(東大寺要錄)』의 내용을 접하고 무척 놀랐다. 그 기록에는 일본 최대의 사찰로 손꼽히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도다이지(東大寺)를 건립하기 위해 삼국이 힘을 보탰음이 적혀있다. 백제사람 행기(行基)스님을 비롯해 가람의 총책임자인 고구려사람 고려복신(高麗福神), 불상을 주조한 백제사람 국중마려(國中麻呂), 대불전 건축을 맡은 신라사람 저명부백세(猪名部百世) 등의 이름이 나온다. 나는 도다이지가 우리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그저 도다이지가 괜히 정겹게 느껴지고 일본에 대한 내 숙원도 좀 누그러지는 듯싶다. 일본인들은 왜 이런 걸 잘 알리려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양국 친선 교류에 더 보탬이 될 거 같은데 말이다. 하기야 잘 알려고 하지 않는 우리 탓을 먼저 해야지 수원수구(誰怨誰咎)하리요?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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