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길사에서 펴낸 『百濟』는 한국 출판역사의 한 획을 그을 만하다. 신문 한 면 크기(가로 45cm, 세로 58cm)의 국내 최대 문화유산 도록이다. 그 무게만도 20kg에 이르며 500부 한정판에 가격은 200만원으로 단행본으로는 한국 출판사상 가장 비싼 책이다. 내 1년 도서 구입비와 맞먹는 수준이다. 그간 내가 최고로 치던 40만원짜리 『고려시대의 불화』(시공사) 도록을 능가한다(다만 실린 작품의 수나 희소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이 책이 앞선다. 나는 한때 이 책을 구하기 위해 애썼다). 내가 큰 맘 먹고 사들였던 30만원짜리 『고구려고분벽화』(풀빛), 12만원짜리 『토함산 석굴』(한·언), 6만5천원짜리 『書院』(열화당), 4만5000원짜리 『반가사유상』(민음사) 도록 등이 갑자기 초라해졌다. 지금은 술 마시고 책 사는데 다 써버렸지만 이태 전만 해도 내 통장에 200만원 가까운 돈이 들어있기도 했었는데 만약 그 돈이 수중에 있었다면 난 구매를 심각하게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교보문고에서 3만5000원짜리 보급판을 살펴봤다. 사진작가 준초이님은 기존의 문화유산 도록의 앞모습 위주로 화면을 가득 메우는 방식에서 탈바꿈해 문화유산의 특정 부분을 도드라지게 하거나 여백을 넣어 공간미를 불어넣었다. 가령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의 얼굴을 위에서 비스듬히 내려찍는 장면은 일품이다. 성낙주님과 문명대님의 석굴암 관련 책에 실린 본존불의 육중하고 고독한 뒷모습을 올려다보는 사진을 보는 듯한 희열이다. 또 쇼소인(正倉院)에 소장되어 있는 의자왕이 왜국에 보낸 바둑판과 바둑알의 화려함을 이제야 만난 게 아쉽다. 문득 럭셔리 마케팅이 얄미워졌다. 고급판과 보급판의 차이가 너무 커서 보급판을 사는 게 너무 꾀죄죄해 보인다. 값을 좀 올리더라도 사진을 좀 더 보강해서 고급판과의 차이를 줄였으면 어땠을까 싶다. 사실 이마저도 살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 사야할 책들이 밀려 일단 놓고 나왔지만.


학교 도서관에 고급판 1권과 보급판 1권을 신청했는데 선정해줬다. 머잖아 학교 도서관에서 이 귀한 책을 깨끗한 손으로 조심스레 넘겨봐야겠다. 나는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끔찍한 애호를 내 나름의 자발적 애국심이라고 생각한다. 입으로 몇 마디 애국을 들먹거리기는 쉽다. 그러나 그마저도 함부로 강요하지 않는 게 민주공화국의 힘 아닐까. 사회계약은 충성이 아니라 의지의 소산이기에. 이런 감상과 별개로 나는 앞으로도 이 땅의 역사에 짙은 애정을 품을 것이다. 아련한 그리움인 고구려 고분벽화를 완상하며 중국화에 맞섰던 그 결기를 추억하고, 애잔함이 서린 조선의 궁궐을 거닐며 실학정신과 소중화(小中華)를 오갔던 조선의 지식인을 반추할 것이다. 그런데 최근 정부가 ‘대한민국 국기법 시행령안’을 입법예고하면서 이 맹세를 고스란히 살려 넣었다는 소식은 애국심에 대한 내 미감을 헝클어뜨린다.


지난해 말 국회는 국기법을 제정하면서 맹세와 관련된 조항을 넣지 않되, 정부가 시행령에 넣을지 여부를 결정하라고 위임했지만 별다른 논의가 없었다. 그저 존치 여론이 높다는 이유뿐이다. 논란이 일자 ‘국기에 대한 맹세’ 문구를 민주화 등 미래지향적인 내용으로 수정하는 방안이 추진된다고도 한다. 문구를 몇 개 바꾸는 것 이전에 과연 맹세와 애국심의 상관관계가 얼마나 유의미한 가를 따져볼 일이다. 사람을 판단할 때 그 사람의 역량과 식견보다도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태도나 자세일 수 있듯이 최소한의 규범으로 삼자는 주장은 외면하기 힘들다. 맹세를 주장하는 분들도 이 짧은 맹세 구절이 애국심 고취에 엄청난 효과가 있다고 믿지는 않을 듯싶다. 다만 공동체의식을 확인하는 실마리로서 남겨두자는 의견이 많으리라 짐작한다. 마지막 보루 같은 걸로 말이다. 그러기에는 우리 사회에 전체주의의 보루가 너무 많긴 하다.


의무적인 충성 서약보다는 이 땅의 흙과 아스팔트를 밟는 발바닥의 촉감으로 내 나라를 사랑하면 어떨까. 가장 고귀한 건 자발적인 것이며 자유로운 것이다. 물론 그 자발과 자유에도 형식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감한다. 그러나 그 형식이 일방적이고 폐쇄적이어서는 곤란하다. 더군다나 맹세라는 형식이 애국심이라는 실질에 크게 기여할 거 같지 않아 보인다. 개인주의 세태를 염려하기 전에 나라를 아끼는 개성 있는 행동들을 열린 자세로 보듬고 북돋워주는 게 대한민국이 더 살맛 나고 재미난 나라가 되는 길이다. 맹세에 쏟는 그 정성을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을 눅이고, 이주노동자들의 후생복지를 헤아리는 걸로 전환한다면 더 좋겠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는 파시스트와 아나키스트의 대결도 아니다. 국가에 대한 충성 경쟁도 아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방안에 대한 다채로운 가능성을 여투어 두자. - [無棄]


* 『百濟』는 6월 5일자로 결국 선정 부결됐습니다. 도서관까지 들어오기는 했는데 검수 단계에서 부결된 모양입니다. 학교 도서관 관계자분께서 친히 전화를 주셔서 책 부피도 만만치 않지만 낱장으로 되어있어 책으로 보기에도 애매하다는 견해를 피력해주셨습니다. 혹시 선정 부결이 되더라도 양해해달라는 말씀에 저는 기꺼이 그러겠다고 흔쾌히 답했습니다. 이 책 아닌 책을 도서관에서도 볼 수 없다면 접할 기회가 거의 없을 거 같아 살짝 아쉽네요. 친절하게 전화주신 도서관 관계자분 고맙습니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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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애편지 2007.05.07 02:35 Address Modify/Delete Reply

    안녕하세요..^^ 아는분의 추천으로 왔습니다. 참 신선하다 못해 충격적인 글이네요. 그동안 살짝 봤는데... 대단하다는 말씀밖에 못드리겠네요..

    인터넷이라는게 한계가 있기에 익구씨의 모든 모습을 알수는 없지만, 솔직하면서 고풍스런 모습에 놀라움을 표합니다.

    성향을 보니 살짝 난감한게 저랑은 맞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배우는 마음으로 살짜쿵 댓글을 남길께요..^^

  2. 익구 2007.05.07 10:48 Address Modify/Delete Reply

    헉 이런 누추한 곳을 추천씩이나 하신 분이 있다니요.^^; 뭐 제가 솔직하고 투명한 글쓰기를 목표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한 번은 걸러낸 것들이겠죠. 저는 제 스스로 남기는 기록도 두려워하는지라 적당히 이것저것 감추고 있습니다. 요즘 저를 흔드는 구절 중에 “착함과 악함이 모두 나의 스승이다(善惡皆吾師)”는 말씀이 있습니다. 경영학에서도 성공 사례보다 실패 사례를 분석하는 데 더 주안점을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성공은 대개 부풀려지게 마련이니까요). 하물며 서로 다른 것, 차이 나는 것에 대해서 배우지 못할 것은 없겠지요. 뭐 말은 이렇게 해도 나와 다른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지만 함께 노력했으면 합니다. 고맙습니다.^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