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니가 가르쳐준 것들

잡록 2007. 9. 10. 00:39 |

여러 경로를 통해 많은 분들이 애견 야니의 죽음을 애도해주셨습니다. 쑥뜸, 덕이母, 봄봄, lee856, 클리셰, joana, 권오성, 언어의 마술사, 윤정누나, 곽기민, 강기현, 윤선진, 한용철, 김지은, 이형신, 김준수, 이성구, 박태순, 이진원, 오규상, 이수영, 이청원, 황현식, 김소은, 정승현 등의 분들 모두 고맙습니다. 덕분에 큰 힘을 냈습니다. 이어지는 잡글은 제게 따스한 마음을 보여주신 분들께 올리는 작은 선물입니다.


내내 헝클어져 있다가 간신히 추슬렀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너무 넘친 행동을 한 거 같아 민망하다. 애견을 잃은 감정을 쏟아내는 건 온전히 내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살면서 가끔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행동을 할 때도 있게 마련이니 너무 자책하지 말기로 하자. 펫 로스(pet loss)에 시달리고 나니 당분간 어지간한 서글픔에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어른이 된다는 건 제 둘레의 비극에 덤덤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아픔 끝에 놀라지 않고 성내지 않게 되는 건 아닐까 싶다. 나는 내가 그런 담담함을 체화하는 게 두렵다. 내 생애 줄서고 기다린 각종 애경사에 나는 처음처럼 웃고 울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결국 시간은 남은 사람의 편이겠지만 다시금 있을 때 잘해야 한다라는 평범한 진리를 곱씹게 된다.


지난 주말에는 비록 유해이기는 하지만 야니를 데리고 울산바위를 바라보기도 하고, 대포항의 짠내를 맡고, 화진포의 별장들을 둘러봤다. 통일전망대에 올라 북녘 땅을 가리켜보기도 했다. 고별 여행까지 다녀왔는데도 아직도 서운한 걸 보면 내가 마냥 무심한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반려견과 사별한 사람들이 으레 겪듯이 녀석이 생전의 재기 발랄한 모습을 뽐내는 꿈을 꾼 것도 벌써 두 번째다. 문득 그리워지면 하염없이 휑할 게다. 우울한 심사를 달래기 위해 프랑스 작가 장 그르니에의 <어느 개의 죽음>이라는 책을 읽었다. “우리는 살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살아남아 있을 뿐이다”라는 구절이 가슴에 사무친다. 한번뿐인 유한한 삶을 간소하면서도 진실하게, 올바르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녀석이 삶은 유한하다는 절절한 깨우침을 주고 떠났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불완전하고 그 불완전함을 보듬어가며 살아야겠다.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부질없는 결심도.


중학교 1학년 특별활동으로 논술반을 했다. 보신탕 문제가 나왔을 때 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문화적 다양성을 드높이는 발표를 했다. 나는 그 때 브리지트 바르도를 소아병적이라고 몰아세웠다. ‘소아병적’은 내가 당시 구사하던 최고의 험담이다.^^; 최근 들어 알게된 것이지만 그녀는 푸아그라나 말고기도 반대하고 있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서구우월주의자보다는 동물해방근본주의자가 더 맞는 듯싶다. 어차피 개고기 애호가들이 비판받을 이유는 거의 없다. 그러나 미감의 차이에서 오는 불편함까지 원천 봉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부 서양인들의 옹졸함에 너무 성내지 말아야겠다. 야만인 운운했던 바르도의 거친 언사에 대한 반감을 좀 눅이고 개 식용 문화의 윤리적 측면을 살펴보는 넉넉함을 뽐내보자.


어린 시절 나는 문화상대주의라는 보검 하나면 더 이상 논쟁이 필요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세상 거의 모든 것이 그렇듯이 문화상대주의도 양날의 칼임을 알겠다. 문화상대주의가 지나치면 현재 상황을 맹목적으로 옹호해버릴 우려가 있다. 일체의 윤리적 판단을 포기한 채 다양성이 얼마나 잘 만개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문화상대주의에는 생태주의 가치가 들어있지 않다. 생태주의도 상대화된 가치의 하나로 존재할 따름이다. 그렇지만 환경보호와 생명존중이라는 생태주의 가치는 향후 더욱 확산될 인류의 지향점이 될 공산이 크다. 따라서 지속적인 성찰과 토론이 요구된다. 물론 개고기 논쟁에서 상대적 가치를 대체해서 보편적 가치가 얼마나 규정력을 발휘할지는 쉽게 가늠하기 힘들다. 인간의 생존 자체가 다른 생명체를 죽임으로써 가능하다는 확고부동한 사실 아래서 우리의 언행은 제약될 수밖에 없다.


이럴수록 가까운 곳부터 시작하는 게 온당하다. 『맹자』에 나오는 제(齊)나라 선왕(宣王)의 이야기가 이런 고심을 푸는 실마리가 된다. 선왕이 제사에 쓰이기 위해 끌려가는 소가 벌벌 떨고 있는 것을 보고 가여운 마음이 들었다. 선왕은 소 대신 양으로 제사를 지내라 명한다. 백성들이 소를 아껴 양을 쓴 왕을 인색하다고 여긴 모양이다. 하지만 맹자는 눈앞의 소가 죽는 걸 차마 보기 어려운 마음이 어짊을 베푸는 것이라 평가한다. 이기동 선생은 “보이지 않는 양에 대해서도 똑같이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식의, 머리 속에서 이끌어낸 합리적 사고에는 情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행동력을 동반하지 못한다”라고 풀이한다.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했다(見牛未見羊)”라는 구절에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엿본다. 보지 못했던 양을 덜 불쌍히 여기는 건 너무 자연스러워서 당위적 혹은 합리적 가치를 들이대기 무안하다. 제 둘레의 것들에 연민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더 먼 곳의 아픔을 헤아리는 게 가능할까. 원거리로 건네는 가련함은 관념화된 추상은 아닐까. 이런 논리 혹은 의심을 이용해 국내의 빈곤층 문제는 나 몰라라 하면서 북한 주민의 인권을 걱정하는 걸 비판할 수 있다. 그런데 마찬가지 근거로 국내의 취업난은 외면하고 북한 지원에만 열중하는 걸 통박할 수도 있다. 뭔가 이상하다. 견우미견양의 가르침을 이렇게 소비하는 건 그리 적절한 처사가 아닌 듯싶다. 이런 식으로 편협한 삶을 부추기자는 의미는 아닐 게다.


견우미견양에서 단순히 인간의 한계를 지각하는 데 그쳐서는 곤란하다는 함의를 찾아보면 어떨까 싶다. 소를 대신해 양을 쓰는 걸로 만족하지 말자는 뜻이다. 궁극적으로는 나와 덜 친밀한 것까지 측은지심을 품는 실천을 꾀해야 한다. 측은지심을 자기 주변부터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방점을 찍을 부분은 측은지심을 바지런히 넓히는 데 있다. 여기까지 동의한다고 해도 측은지심이 확산되는 순서를 어떻게 정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국내 경제가 충분히 성장하면 비로소 북한을 도울 수 있다거나, 통일까지 이뤄야 국제 구호에 나선다거나, 인류가 충분히 평안해질 때 동물을 돌보겠다거나 하는 식은 분명 아닐 게다. 이렇게 단순한 선후관계였다면 이렇게 머리 아플 일도 없다.


반려견을 어떻게 바라보냐는 문제도 측은지심을 어떻게 배분하느냐는 서로 다른 잣대의 엉김이다. 쉽사리 합의점을 도출하기는 힘들 게다. 다만 어느 정도의 경향성은 도출할 수 있겠다. 개의 역할과 위상이 식용견에서 반려견으로 바뀌고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흐름이다. 정약용 선생이 흑산도에 유배된 형 정약전의 병약함을 걱정하며 개장국을 권하던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소나 돼지와 달리 활동성이 강한 개는 축산 사육이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더군다나 이미 비만이 골칫거리인 시대에 굳이 개고기를 보양식으로 예찬하는 건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반려동물 가운데 가장 앞자리에 있음이 명백한, 인간과 가장 친한 친구로 일컬어지는 개에 대한 예의는 아니라는 데 마음이 기운다. 인간에 대한 예의도 묽어지는 시대에 호사스런 감상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창 진행중인 한국과 EU와의 FTA 협상 과정에서 동물복지라는 기준을 놓고 쟁점이 되었다. EU는 교역 대상이 되는 식용 동물의 권리를 보호할 것을 요청했다. 개발도상국의 열악한 인권, 보다 가까이는 북한 어린이들의 참상을 틈틈이 목도하면서 감히 동물권을 논하다니! 학대받지 않은 동물의 고기가 더 맛있다는 이유를 들기도 한다지만 유럽인들의 동물 사랑에 기인한 바가 큰 듯싶다. 유럽의 동물 애호가 따져보면 제국주의 식민통치로 말미암아 쌓인 옹골진 경제적 풍요 덕분이라고 핀잔할 수도 있겠다. 설령 위선일지라도 인간복지를 넘어 동물복지를 고민하는 그네들의 애틋함이 부럽다. 배우고 싶다.


동물복지의 사상적 연원을 철학자 벤담의 공리주의에서 찾는다. 공리주의하면 계산적이고 야박하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정신이 번쩍 든다. 벤담은 동물이 사람과 똑같이 감각이 있으므로 사람처럼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사람을 동물에 견주어 특별히 취급해야할 까닭이 없다며 동물을 사람과 다르게 취급하는 걸 거부한다. 반려동물을 길러 본 사람들은 동물이 희로애락을 느낀다는 걸 믿는다. 근대과학도 최소한 척추동물은 고통을 지각한다고 확증한단다. 윤리학자 피터 싱어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보다 확장했다. 싱어는 공리주의 전통을 계승해서 자신의 이익과 타자의 이익에 동등한 비중을 둬야 한다는 이익 평등 고려의 원리를 역설한다. 그는 어떤 존재들이 쾌락과 고통을 느낀다는 점에서 같다면 그들은 동등한 도덕적 배려의 대상이 돼야한다고 설파했다. 인간과 동물을 차별하는 종차별주의(speciesism)는 잘못이라는 그의 주장에 동감한다.


싱어는 “인간은 살아 있는 것들의 최대 다수를 위한 최대의 선을 행해야 한다”라는 명제를 제시한다. “동물들을 일정한 목적을 위해 이용함으로써 얻어진 선이 과연 인간이 그 동물들에게 끼치는 해악을 초과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라는 대목에서는 그 고운 마음씨가 고맙다. 그간 인간다운 삶에만 천착하다가 인간 중심주의에 빠진 건 아닌가 반성을 해본다. 그는 동물해방론에서 그치지 않고 “상대적으로 풍요한 국가의 국민들이 기후 변화와 극단적 빈곤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제해야 할 의무가 있다”라는 데까지 나아간다. 싱어의 견해가 다소 성급해 보이기는 하지만 견우미견양이 희구하는 바와 얼추 비슷하다고 여겨진다. 더 탐구해봐야겠다.


동물 같이 힘없는 존재에 대한 윤리적 처우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회가 다른 사회적 약자를 보듬는 데도 열심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연역할 수 있다. 이주노동자를 푸대접하면서 장애인을 염려하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어떤 사회의 후생수준은 그 사회에서 가장 낮은 수준의 후생을 누리는 구성원의 효용수준에 의해 결정된다”라는 롤즈의 사회후생함수에 기반한 추론이다(사회후생함수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니 더 자세한 사항은 미시경제학 교과서들을 참조해주세요). 경제적 보탬이 되지 않는 것에도 무심하지 않는 사회의 삶의 질이 더 높다고 직관적으로 확언한다(이걸 실증적으로 입증할 수 있을지 궁리해봐야겠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가치와 권리를 부여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게 앞으로 우리 사회가 나아 가야할 방향이라고 본다. 잉여인간, 잉여동물들을 박정하게 내치지 않는 세상을 갈망한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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