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성이 능력이다5

경제 2007. 11. 6. 03:57 |

<도덕성이 능력이다>는 총 5부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순서대로 읽으셔야 하지만 따로 읽으셔도 무방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A는 Amorality의 약자로서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지도자를 지칭하는 가상의 인물입니다. 대선 끝날 때까지 틈틈이 수정할 계획이니 퍼가지 말아주세요.^0^


5. 도덕력으로 경쟁하라


11월 1일 한국보건사회연구원·한국노동연구원이 기획예산처에 제출한 ‘소득분배 및 공적이전·조세 재분배’ 보고서에서 도시가구의 시장소득 기준 상대빈곤율이 2006년 16.42%로 관련 통계가 나온 1999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다행히 증가폭은 둔화되고 있다. 상대빈곤율은 가구소득이 도시가구 평균소득의 50%에 미치지 못하는 가구의 인구 비율을 말한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사회보장과 조세제도 등 정부 정책을 통한 불평등 완화 효과는 커지고 있지만, 개인이 벌어들이는 시장소득의 불평등은 확대되고 있다. 시장소득은 모든 수입을 합한 경상소득에서 정부보조와 같은 공적이전소득을 제외한 것으로, 가구원이 직접 벌어들인 소득이다. 저소득층의 소득이 줄어들고, 고소득층과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정부지출이 불평등을 완화시키고 있다지만 비정규직이나 영세 자영업자의 소득 감소에 기인한 시장소득의 불평등에 대한 개선책 마련이 시급하다. 정부는 공적부조와 조세정책을 감안한 가처분소득은 소득 불평등 추세가 정체되고 있다고 해명한다. 선진국과의 복지 예산의 규모 차이가 재분배 효과의 차이를 낳는다는 주장도 설득력 있다. 양극화 해결을 위해 성장을 통해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도 일리가 있다.


이처럼 세상 모든 일이 그렇지만 숫자 하나를 놓고 분석도 묘안도 갈린다. 경제중심주의, 경제만능주의가 지배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탈도덕 현상’이 꾸려 가는 경제에는 도덕성이 천덕꾸러기일 게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선(先)성장 후(後)복지 레토릭 밖에 내놓을 거리가 없다. 나는 도덕성을 희생해서 경제를 살리지 못한다고 확신한다. 윤리경영, 부패지수, 사회자본 등의 각종 이론과 실증 연구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아니 양보해서 경제가 살아난다고 해도 부도덕한 경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게다가 A 같은 이들이 사회의 상층부를 차지하는 사회에서 가장 피해를 볼 계층은 서민이다. ‘도덕력’이 동난 세상에서 누가 일차적이면서 심대한 타격을 입을지는 불 보듯 뻔하다. ‘탈도덕 현상’을 가치중립적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까닭은 그것이 환상이고 허상이기 때문이다. ‘탈도덕 현상’의 기저에 깔린 ‘식객(食客)의 도덕’은 시혜적 평등을 내포하고 있다. 선거는 정치적 학습 과정이다. 1952년과 56년 미국 대선에 민주당 후보로 나섰던 스티븐슨은 매카시즘에 맞서 강요된 애국심이 아닌 민주와 자유의 가치를 일깨웠다고 한다. 그는 연거푸 패배했지만 자신이 믿는 가치에 헌신할 줄 알았던 그 자세를 배우고 싶다. 이번 대선을 통해 스티븐슨 같은 괜찮은 지도자도 만났으면 좋겠다.


잡설이 길었지만 끝끝내 A가 집권한다고 치자. “요와 순은 천하를 다스리기를 어진 마음으로 하였으므로 그 백성들도 그를 따라 어질게 되었고, 걸과 주는 천하를 다스리기를 포악한 마음으로 하였으므로 그 백성들도 그를 따라 포악하게 되었다(堯舜帥天下以仁 而民從之 桀紂帥天下以暴 而民從之)”라는 『대학』 구절이 있다. 요와 순이 통치한 것은 백성들이 요순 같은 자질을 가졌기 때문이고, 걸과 주가 통치한 까닭은 백성들이 걸주와 같은 포악함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거꾸로 읽으면 섬뜩해진다. 민주공화국의 수준은 결국 그 국민의 수준과 비례한다는 평범한 진리이겠지만. 이어서 “그 내리는 명령이 그들 자신이 실제로 좋아하는 바와 상반되는 것이면 백성들은 따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자는 자기에게 선이 있은 뒤에 남에게 선을 지니기를 요구하며, 자기에게 악이 없는 뒤에 남의 악을 비난하는 것이다(其所令 反其所好 而民不從 是故 君子有諸己 而後求諸人 無諸己 而後非諸人)”라고 말한다. 앞서 본 공자와 맹자의 경구와 비슷하다. A는 결국 또 다른 A를 복제해낼 따름이다.


실질적 민주주의를 논하는 분들이 부쩍 늘었다. 절차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완숙해진 거 아니냐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탈도덕 현상’은 절차적 민주주의가 제대로 구현되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선출 과정의 필터링(Filtering)이 미흡하기 때문이다. 도덕적 자원을 결핍한 A는 ‘비지지자 신뢰도’를 확보하기 위해 유무형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A 비지지자들의 냉소주의도 문제겠지만 극단적으로는 맹목적인 신뢰를 부여할 수 있는 온정주의적 독재자의 출현을 고대할지도 모른다(임혁백, 『세계화시대의 민주주의』, 나남출판, 2000). 아직 보완이 더 필요한 ‘도덕력’이지만 도덕성이 능력이라는 기본 골격만은 확고하다. 유권자들은 이제 ‘도덕력’ 경쟁도 헤아리는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이중적 잣대와 관대화 경향을 버리고 얼마 더 깐깐해져서 이 권리를 누리자. ‘탈도덕 현상’이 헝클어뜨리고 있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건사하고 믿음직한 지도자를 선택하자.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위원으로 고생하셨던 한홍구 성공회대 역사학과 교수가 “우리는 화해를 구걸하지 않겠다”라고 일갈했다는 기사가 떠오른다(“"우리는 화해를 구걸하지 않겠다" .” 오마이뉴스. 2007. 10. 28.). 과거의 행적이든 오늘날의 과오든 양심 고백을 하는 사람은 너무 드물다. 하지만 구걸로는 진정한 화해를 이루지 못한다. 나는 마찬가지 논리로 도덕을 구걸하지 않겠다. ‘탈도덕 현상’을 부추기는 자들은 나쁜 줄 알면서 저지르는 고의범도 있고,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믿는 확신범도 있다. 고의범은 극복과 제어의 대상일 뿐 논쟁과 토론의 상대는 아니다(이런 말을 하는 게 슬프지만). 확신범은 개전의 희망이 있기는 하다. 그네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도덕적 훈계가 아니라 ‘도덕력’의 유용함이다. A와 그 지지자들에게 건넨 손가락질을 나 자신에게 먼저 돌리고 한 번 뿐인 삶을 ‘도덕력’으로 매만지는 긴 호흡의 여정이다. 종종 고단하겠지만 남에게 말하지 못할 것이 없는 떳떳한 삶을 지킨다면 얼마나 번듯하고 흐뭇하겠는가. 정리하자. 우리를 다스리는 분들이 ‘도덕력’을 갖췄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결코 사치가 아니다. 나를 다스리는 사람이 존경스럽고 본받을 만한 분이길 갈망한다. 하지만 나는 감동을 구걸하지 않겠다. - [無棄]


* 현행 공직선거법 제93조는 탈법방법에 의한 문서·도화의 배부·게시 등 금지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선거일 180일 전부터는 선거에 영향을 끼칠 목적으로 정당·후보자를 지지·반대하는 내용에 대해 게시 및 상영을 할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이 법이 누리꾼들의 건전한 정치 토론을 사실상 봉쇄하고 있다는 볼멘소리가 적잖습니다. 선관위가 선거법 93조의 본래 취지를 망각하고 무리하게 적용하고 있는 건 아닌지 안타깝네요. 선거법 개정에 소극적이던 어느 정당은 선관위 이외에 정당도 포털이나 언론사에 글을 올린 이용자의 신원 정보 제공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규제를 한층 강화한 법안을 지난 5월 발의했다고 합니다. 경제성장을 약속하기 전에 국민의 기본권부터 보장해주시길 간곡히 청합니다.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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