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중립을 위하여

2009. 10. 6. 08:52 |

2009년 9월 22일 전국공무원노조, 민주공무원노조, 법원공무원노조가 하나로 통합해 민주노총에 가입하기로 결정했다. 현행법상 별다른 문제가 없는 정상적인 노조활동을 두고 정부는 온갖 험담을 늘어놓았다. 한나라당과 정책연합을 하고 있는 한국노총에도 이미 공무원 노조가 포함되어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망각한 처사였다. 한국노총에 견주어 좀 더 대정부 투쟁을 많이 하는 민주노총에 대한 거부감이 아니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10월 5일 국회 행정안전위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대한 국정감사에서는 선관위 노조의 상급단체인 전국민주공무원노조가 이번 결정으로 인해 민주노총의 일원이 되기로 한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고도의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해야 할 선관위 직원이 민주노총 소속원이 되면 선거관리의 공정성이 훼손될 것이라는 이유다. 신지호 의원은 “법관, 검사, 경찰 등 특정직 공무원들처럼 선관위 공무원의 노조 가입을 금지하도록 국가공무원법 개정을 추진하겠다”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이런 식의 규율 위주의 사고는 조심스럽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부가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구체화하는 법률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국가공무원법과 공무원노조법에서 규정하고 있으나 범위와 내용이 명확하지 않다”라는 충정은 이해할 만하다. 정부가 구체적인 기준을 마련하려는 움직임 자체는 반갑지만, 정부의 작업이 공무원의 정치적 자유를 옥죄는 방향으로만 나아갈 공산이 커서 걱정스럽다.


현행 공직선거법 제9조는 “공무원 기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자(기관·단체를 포함한다)는 선거에 대한 부당한 영향력의 행사 기타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국가공무원법 제65조와 지방공무원법 제57조는 ‘정치운동의 금지’ 조항을 두어 공무원이 정당이나 정치단체의 결성에 관여하거나 가입할 수 없으며, 선거에서 특정 정당 또는 특정인을 지지하거나 반대하기 위한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했다. 공무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 제4조와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 제3조는 ‘정치활동의 금지’을 두었다. 공무원과 교사에게 너무 초인적인 중립의무를 지운다는 느낌을 준다.


‘정치운동’과 ‘정치활동’이 다른 법개념이라고 할 때, 정치활동이 좀 더 범위가 넓다면 어디까지 선을 그을지에 대한 합의를 모색할 시점이다. 통합공무원노조가 자신들의 후생복지와 무관한 정책에 대한 비판을 할 때 정치활동인지 아닌지 판단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정치적인 행위가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정치활동을 넓게 보면 볼수록 공무원들의 정치적 자유는 제약된다. 행정국가화 경향이 나타남에 따라 공무원의 자율적 책임이 두드러지는 추세에 따라 정치적 중립성 못지않게 시민의 요구에 대한 응답성이 중시되어 행정과 정치는 맞닿을 가능성이 높다. 타율적 통제로 억눌러 ‘영혼이 없는 공무원’을 양산하기보다 공무원의 영혼을 키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2008년 1월 17일 헌법재판소는 고 노무현 대통령이 청구한 헌법소원을 기각했다. 헌재는 대통령의 선거중립의무를 규정한 공직선거법 제9조 제1항은 명확성의 원칙과 과잉금지의 원칙에 위배되지 않아 합헌이라 결정했다. 대통령의 선거중립의무를 정치활동의 자유보다 우위에 둔 셈이다. 재판부는 “선거활동에 관해 대통령의 정치활동의 자유와 선거중립의무가 충돌하는 경우에는 선거중립의무가 우선돼야 한다”라고 천명하며 선거의 공정성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지난 2004년에도 탄핵 심판에서도 공무원의 중립의무 위반 여부가 쟁점이었음을 떠올려 보면 정치적 중립의무에 대해 다시금 환기한 사건이다.


이 공방이 벌어지기 전인 2007년 3월 노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국무위원급 행정 지도자는 정치와 무관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정치와 행정의 관계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거리가 존재하겠으나 장관 같은 고도의 정책결정자가 현실 정치에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는 점은 또렷하다. 헌재의 결정도 이러한 속성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보다 근본적 문제는 선출직 공무원이 누리는 정치적 자유에 견주어 일반직 공무원들이 누리는 자유의 크기가 너무 작다는 데 있다. 당시 청와대가 정치에 무조건(!) 무관해야 하는 하위직 공무원들의 처지를 먼저 헤아렸으면 좋았을 게다. 이것이 헌재 결정 직후 청와대가 발표한 “성숙한 민주주의로 가기 위한 정치적 자유 보장과 우리 사회의 후진적 정치체계에 대한 논의는 계속돼야 한다”라는 의견에 좀 더 부합한다.


일전에 민주노동당이 교사와 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당우(黨友) 제도의 적법성 여부에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민노당은 교사와 공무원의 정치활동이 원천봉쇄된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줄기차게 내놓았다. 우리 법체계는 공무원의 정치활동과 관련해서 자유의사에 따른 투표만 겨우 보장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규제가 심하다. 일본이 우리와 비슷한 정도로 제한하고 있다고 하지만 공직선거법 제60조에 규정된 선거운동을 할 수 없는 자를 살펴보면 정치적 행위를 금지하는 직역은 우리가 더 광범위하다. 일본의 법제에 영향을 준 미국의 해치법(Hatch Act)이 1993년 대폭 개정되어 정치적 중립의무보다 정치적 기본권을 보장하는 쪽으로 나아간 점을 곱씹어 볼 때 우리나라는 선진 민주국가들 가운데 광범위하게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는 편이다.


서구에는 한국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정치활동을 열어둔 나라들이 많지만 특히 영국에 눈길이 간다. 영국은 공무원을 세 개의 계층으로 나눠 정치적 자유를 서로 다르게 부여한다. 하위직에게는 정치활동을 완전히 보장하지만, 중간직은 입후보를 제외한 기타의 정치활동은 허가를 얻어 할 수 있게 했다. 정책 결정과 가장 관련이 깊은 고위직은 정당 가입은 인정하나 그 외 활동은 비교적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이러한 영국식 발상을 우리도 빌려 쓰면 어떨까 싶다. 정치적 기본권이 애틋하기는 지위 높낮이를 떠나 매한가지겠으나 그것의 확대는 하위직 공무원부터 서둘러야 한다. 정치적 자유는 대학 교수와 국무위원들만 향유하기에는 너무 귀중하다. 고위직 공무원은 정책 결정 과정에서 여당과의 조율에 참여하는 등 정치활동을 수행하는 측면이 적잖다. 정치적 중립에 대한 감시가 요구된다면 그 우선순위는 정책결정권을 가진 고위직 공무원이어야 한다.


탄핵 정국과 맞물린 2004년 총선에서는 공무원의 정치 참여에 대한 논쟁이 뜨거웠다. 획일적인 정치활동 금지가 정치적 중립성 확보를 위한 필수적인 요건인지에 대한 의문을 품어봄 직하다. 2004년 3월 25일 헌재는 초중고 교사의 정당 가입이나 선거운동을 금지한 정당법과 선거법이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교원의 정치 참여가 학습권이라는 또 다른 기본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헌재의 고뇌에 동감한다. 하지만 수업권 혹은 교육권을 헌법적 권리라고 인정하더라도 참정권을 일방적으로 제한할 수는 없다고 본다. 헌재는 입법론적인 재검토를 주문했지만 해석론적으로 위헌이라 보는 견해도 적잖다.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라고 한 대한민국 헌법 제7조 제2항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를 두고 다툰다.


헌재는 헌법 제7조 제2항을 권리가 아닌 의무로 해석했다. 그런데 다른 헌법조문들을 살펴보면 제6조 제2항(외국인의 지위), 제8조 제1항(복수정당제 허용)에서 “보장된다”라고 말할 때 여기서 의무가 도출되지 않는다. 반면에 제38조(납세의 의무)와 제39조 제1항(국방의 의무)에서는 “의무를 진다”라고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의무를 보장한다는 건 대다수 한국어 사용자들의 상식에 어긋난다. 권리를 보장하고 보호하는 것이며, 의무는 부과하고 부담하는 것으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제7조 제2항은 권력이 공무원에게 정치적 간섭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공무원이 특정 계층이나 정파의 이익에 복무하지 않고 국민 전체를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보호하기 위한 방어막으로서의 성격이 짙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중립 조항은 제정헌법에는 없었으나 1960년 3·15 부정선거를 겪은 후에 신설됐다. 공무원들이 선거에 동원되어 집권 여당의 이익에 복무하는 폐단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군사정권에서도 관권선거가 이어졌기에 87년 헌법 개정까지 그대로 뒀다. 오늘날 공무원의 정치적 개입보다는 정치적 권리의 행사가 좀 더 화두가 되고 있는 추세다. 헌법과 법률을 해석할 때 하나의 정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잇따른 헌재 판결을 승복하면서도 공론화 하려는 시도는 별개의 문제다. 헌법 제7조 제2항에 권리와 의무가 혼합되었다고 하더라도 권리에 쌀쌀맞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의무를 얹을 때는 재빠르면서 권리를 건넬 때는 머뭇거린다면 법치국가라는 위상이 초라하다. 제7조 제2항을 공무원에게 영혼이 있더라도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는 논거로 활용하면 어떨까 싶다.


불안정한 고용 사정과 맞물려 취업준비생들에게 공무원이 선망의 대상이 된지 오래다. 부러운 존재인 공무원의 정치적 기본권까지 두둔하기란 정말 어렵다. 업무상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면서 개인적으로는 정치적 행위를 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도 여전하다. 공무원의 직무 특성상 정치행위와 업무행위를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의무에 제약을 받는 만큼 신분과 정년을 보장받는다는 항변도 수긍할 만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공무원의 정치활동 자체를 금지하는데 반대해야 한다. 우리는 공무원에게 직무와 관련한 공정성과 능률성을 요청할 수는 있어도 거의 모든 정치행위를 금지해 그네들의 헌법상 참정권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는 없다. 국민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집단의 자유를 일괄적으로 제한하는 단순함이 마땅한지를 놓고 찬찬한 성찰이 필요하다. 더군다나 헌법 제37조 제2항의 기본권 제한에 대한 원칙에는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최근에 신설된 국가공무원법 제59조의2 제1항은 “공무원은 종교에 따른 차별 없이 직무를 수행하여야 한다”라며 공무원에게 종교중립의 의무를 부여했다. 이 조항은 공무원의 종교활동에 대한 어떠한 한계를 두지 않는다. 종교의 자유와 종교의 중립이 함께 추구될 수 있는 가치임을 잘 나타낸다. 정치적 자유와 정치적 중립 역시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공무원이 정치적 성향에 따른 차별 없이 직무를 수행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는 큰 이견이 없겠지만 한국이 선진 민주국가 중에서 가장 엄격히 정치적 자유를 제약할 근거가 튼실한지를 캐물어 보자. 지금처럼 정치활동을 전면적으로 불허하기보다는 공무원의 지위를 이용하거나 직무수행에 지장을 주는 정치활동만 규제하는 것이 옳다.


다시 말해 공무원의 직무수행과 관련이 없는 정치활동을 일부 허용해야 한다. 먼저 정치적 견해를 표명할 자유는 폭넓게 보장하도록 애써야 한다. 단순한 개인 수준과 노조 같은 단체 수준의 차이를 둘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 자유의 핵심은 정부 여당의 정책에 찬성할 자유가 아니라 반대할 자유를 보장하는데 있다. 교사들의 시국선언을 단죄하는데 급급한 모습이 볼썽사납다. 그 다음에는 하위직 공무원을 필두로 가장 낮은 단계의 정치운동이라고 할 만한 정당 가입이나 정치자금 기부를 허용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단체 수준의 집단적 행동이 부담스럽다면 개개인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하는 것부터라도 인정하자. 이는 내 개인적인 주장일 뿐이지만 적어도 무조건 안 된다는 접근보다는 헌법정신을 구현하는 길에서 가깝다고 믿는다. - [無棄]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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