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저작권법 제1조
법 2009. 2. 12. 05:20 |2008년 가을학기에 저작권법 강의를 들었다. 교수님의 강의만 즐겁게 들은 것 말고는 딱히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듯싶은데 시험 성적이 전체 180여명 가운데 2등이라니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다(세상에 내가 등수 자랑하는 날이 올 줄이야). 이제는 생활법률이 되어버린 저작권법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이 만개 하는데 미력이나마 보태고 싶다. CCL(Creative Commons Licenses) 같은 게 좋은 사례일 듯하다.
저작권법을 내가 처음 지각한 것은 문장연구가 장하늘 선생님이 한국의 명문을 엮어 만든 『소리 내어 읽고 싶은 우리 문장』이란 책에서 비롯되었다. 출판사는 본래 43편이 아닌 53편으로 기획했는데 저작권자나 그 유족들과 연락이 닿지 않아 10편이 빠지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 책을 기획할 당시에도 법정허락 제도가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저작권자를 확인하기 어려운 저작물에 대해 해당 출판사가 취해야 하는 신문 광고가 경제적 지출만 강요하는, 현실성도 실효성도 없는 허울뿐인 제도라고 출판사는 아쉬워했다.
결국 출판사는 “저작권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생겨난 저작권법이 오히려 작가의 작품이 독자들에게 읽힐 수 있는 길을 원천적으로 막아버리는 장애 요인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라며 출판사는 작품 게재를 포기했다. 출판사의 합법적인 행위로 말미암아 내가 알지 못하던 명문을 접할 기회를 잃은 셈이다. 현재의 개정된 저작권법 이전의 사례라 지금은 법정허락 제도가 얼마나 정비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저작권법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첫 경험이었다.
미궁과 미로의 이미지를 많이 차용한 작가 보르헤스는 미궁과 미로야말로 삶의 진짜 모습이라며 가장 완전한 형태는 미완의 형태라는 역설적 주장을 폈다. 사실 모든 법이 다 그렇겠지만 저작권법의 묘미 역시 미로를 더듬는데 있다. “이 법은 저작권자의 권리와 이에 인접하는 권리를 보호하고 저작물의 공정한 이용을 도모함으로써 문화의 향상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라는 저작권법 제1조에는 저작권자와 이용자 사이의 정교한 균형에 대한 끊임없는 고심을 담고 있으니까 말이다. 저작권법 제1조가 표상하는 양자의 저울질은 앞으로도 관심을 가지고 탐구할 계획이다.
최근 일부 저작권자들과 이들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몇몇 법무법인들의 무차별적인 고소가 갖가지 폐단을 낳고 있다. 정당한 법 집행 행위임에도 마냥 칭찬하기 어려운 까닭은 저작권 위반의 경중과 대상자를 가리지 않고 형사 고소를 남발하는 것이 저작권법 제1조의 취지에 어긋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한미 FTA가 체결된다면 저작권법은 문화의 향상 발전은 소홀한 채 저작권자의 배타적인 권리에 더 치우칠 우려가 크다. 문화부의 저작권법 개정안에 따르면 공정이용 조항을 신설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저작권자의 권리를 강화했다. 차세대 성장동력으로서의 저작권 산업이라는 구호는 아름답지만 외화내빈을 경계해야 한다.
저작물을 생산한다기보다 이용하는 입장일 수밖에 없는 학생 신분으로서는 저작권법을 준수하는 게 마냥 달갑지는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저작권법을 지킨다는 것은 결국 제 값을 치르고 저작물을 이용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저작인격권은 철석같이 지키더라도 저작재산권을 온전히 지키기란 큰 수입이 없는 학생의 입장에서는 힘든 일이다. 학생뿐만 아니라 대다수 서민과 중산층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다. 어쩌면 도로교통법 다음으로 위반자가 많은 법률이 저작권법인지도 모른다.
배운 대로 살기 위해 내 자신을 검속하면서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하나 있다. 저작권법 제30조 단서에 나오는 “공중의 사용에 제공하기 위하여 설치된 복사기기에 의한 복제”는 사적 이용을 위한 복제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규정이 바로 그것이다. 절대 다수의 학생들이 그렇겠지만 나 또한 학교 도서관에서 복사카드를 사서 무인카드복사기를 이용해 필요한 부분을 복제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무인카드복사기를 이용하는 학생들이 저작권자의 이용허락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복제하는 경우를 아직은 한 번도 본적이 없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도서관에서의 복제가 사적이용을 위한 복제(공정이용)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례가 없다고 들었다. 그러나 판례가 아직 나오지 않은 것에 불과하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사적복제보상금제도가 도입되지 않았으니 현재 쓰는 복사카드에 보상금이 포함된 것 같지는 않으니 말이다. 제30조 단서 규정이 적용된다고 한다면 집안에 복사기를 구비하지 못한 학생들은 제31조 제1항에 따라 도서관에 의뢰하여 복제물을 제공받거나, 자기 손으로 필사나 컴퓨터 타이핑하는 정도밖에 법을 지킬 방도가 없다.
설상가상으로 제31조 제1항 제1호로 이용자가 복제물을 이용하는 목적은 조사·연구를 위한 것으로 한정하고 있다. 나처럼 한문고전이나 한국사 관련 서적을 단순히 개인적인 취미나 호기심으로 읽고 정리하는 경우 이마저도 할 수 없다면 너무 답답할 것 같다. 이 규정은 선언적인 의미 이상의 별다른 중요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라고 하지만 찜찜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집행되지 않는 법을 오랫동안 방치한다면 그 법을 지키려는 의지를 부식시킨다. 법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에게 법을 어길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얼마나 따가운지 입법자들은 아시는가?
설령 내 취미생활을 조사·연구를 위한 것이라고 우기고 복제를 의뢰한다고 해도 문제가 남는다. 예를 들어 『논어』 주석을 참조하려면 수십 종의 번역서 내용 중의 극히 일부를 참조해야 한다. 만약 이 번역서들을 복제하고자 하면 난감한 상황에 빠진다. 도서관 복사부에 책 10권을 들고 가서 각 권당 1~2장씩만 복사해달라고 부탁하면 그 분들도 불편하고 나도 미안한 상황이 벌어지니 말이다.^^; 그렇다고 하염없이 필사나 타이핑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러 저작권법 교과서들을 뒤적이며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해석을 얻고자 했으나 헛갈렸다. 내가 거의 유일하게 저작권법을 어길 소지가 있는 대목인지라 나의 저작권법 스승이신 이대희 고려대 법대 교수님께 자문을 구했다. 이 교수님께서는 “공중용 복사기는 학교 앞 복사집을 겨냥한 것이고, 개인이 직접 공중용 복사기를 이용하는 것은 저작권법 위반이 되지만 집행은 되지 않는 것이 관행이라고 할 수 있다”라는 회신을 보내주셨다. 아 역시 저작권법 위반이었던 것이다. 털썩~ 나는 혹시나 학교 도서관 건물 내부에 비치되어 있는 복사기만이라도 예외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살짝 허탈했다. 그만큼 저작권법을 지키려는 의지가 충만했다.
책 사기 싫어서 별 고민을 다한다고 오해하실까봐 말씀드리면 나는 이미 『논어』 번역서 9종을 구입해 집에 꽂아두고 있다. 그런데도 참조할 책은 많고 그 책들을 죄다 사 모을 수는 없으니 걱정을 해봤다. 책 사보는데 돈을 아끼지 않는 편이지만 중고도서 유통이 발달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새책만을 사봐야 하기 때문에 더 괴롭다. 발췌독하는 참고도서까지 모두 구매해야 할 수 있는 학생이 대한민국에 몇이나 될까? 이런 이유로 학생들에게는 무단 복사를 묵인하는 것이 국내외의 관행이기는 하다(학생은 봐주는 대신 사회인은 엄히 다스린다면 이 또한 문제다). 하지만 단지 관행으로 머무를 것이 아니라 저작권법 위반자를 양산하지 않는 방향으로 입법을 하는 것이 순리다.
장기적으로는 앞서 언급했던 중고도서 시장의 활성화와 더불어 대학도서관을 비롯한 공공도서관의 내실화를 꾀해야 한다 이를 통해 책을 읽고자 하는 국민들이 돈을 절약할 수 있도록 해주면서도 출판사의 수익기반도 마련하는 식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지숙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무조건적인 저작권 강화는 저작권자에게도 반드시 이익을 가져다 주지만은 않는다”라고 주창한다. 필수재보다 선택재에 가까운 저작물은 너무 규제가 심하거나 가격이 높으면 이용자들이 저작물 이용을 축소시켜버리기 때문이다. 특히 디지털 저작물의 가격에 이용자들이 수긍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이야 학교 도서관 전자저널 기능을 이용해 무료로 이용할 수 있지만 학술지 한 편을 학회지 사이트를 통해 다운로드받는다고 가정해보자. 『오늘의 동양사상』이라는 반년간지 제16호에 실린 글을 낱개로 모두 구매한다고 치면 49,700원(302쪽), 제17호는 51,000원(329쪽), 제18호는 44,300원(272쪽)으로 모두 오프라인 판매가 12,000원을 훌쩍 넘는다. 세 권의 1쪽 당 가격은 평균 160.82원으로 복사집의 복제 가격인 40~50원보다 훨씬 비싸다(더군다나 다운로드 가격이기 때문에 출력비는 별도로 계산해야 한다). 이래서야 이용자가 느는데 한계가 있다. 디지털 저작물의 이용자 확대는 규제만으로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합리적인 가격에 대한 검토가 절실하다.
무녀(巫女)의 금법(禁法)이 엄하던 시기의 일이다. 장령(掌令)으로 있던 조자(趙孜)는 무녀들을 멀리 내쫓거나 집단 수용하자고 아뢴다. 세종대왕은 “무릇 법을 세우는 것은 시행하기 위한 것인데, 시행할 수 없는 법은 세울 수 없는 것이다(凡立法, 爲可行也, 不可立不可行之法也)”라고 완곡하게 거절한다(세종실록 제101권 세종 25년 9월 2일). 저작권법을 다룰 때도 이 마음가짐을 좀 배웠으면 좋겠다.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에서 “무용한 법은 필요한 법을 약화시킨다”라고 역설했듯이 지킬 수 있는 법,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만드는 법, 지킬수록 내게 이득이 된다고 여겨지는 법이 바로 유용한 법이다.
대한민국 저작권법 제1조를 다시 읽어본다. 이 법은 저작권자의 권리와 이에 인접하는 권리를 보호하고 저작물의 공정한 이용을 도모함으로써 문화의 향상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 [無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