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대선 때 김영삼 후보에게 패한 김대중 후보는 눈물을 흘리며 정계은퇴를 합니다. 김영삼의 환호보다 김대중의 침통이 어느 초등학생의 눈에 깊은 인상을 남겼어요. 그러다가 1995년 7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님은 정계복귀를 선언합니다. 그 후로 내내 야당 분열과 정계은퇴 번복이라는 비판에 시달렸지만 제 초등학교 6학년 생일날 다시 돌아온 그분을 저는 덜 미워했습니다. 제 생일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그때 만들어졌던 새정치국민회의라는 정당도 넉넉한 시선으로 바라봤었죠.


1996년 4·11 총선 때 김 전 대통령님은 전국구 14번의 배수진을 쳤으나 국민회의는 79석을 얻는데 그쳐 그 자신마저 낙선했습니다. 그때 저는 왠지 모르게 가슴 한 구석이 허전했지요. 이런저런 인연이 얽혀서 중학교 2학년 때인 1997년 대선 때 저는 개표 방송을 밤늦게까지 보면서 김대중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응원했습니다. 제 생애 최초의 정치적 의사 표시는 무척 엉뚱했지만 그래도 제 고향 대구의 정치적 성향에 대한 인식, 더 나아가 지역주의의 문제를 이때부터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참여정부 들어 온건 보수 세력(혹은 개혁적 자유주의 진영)이 노무현과 김대중을 두고 대립하는 모습을 보였을 때 저 또한 어느 한 편에 기울어지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 갈등을 다 메우기도 전에 두 분을 모두 잃어 서글픕니다. 갈라선 이들이 민주주의라는 구호 아래 다시 모여야 할지는 차차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지금은 그저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의 병행을 추구하셨던 고인의 가르침을 새겨봅니다.


노무현 대통령님에 이어 김대중 대통령님까지 보내려니 가슴이 아프네요. 그래도 제가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했고, 존경할 만한 사람을 존경했고, 기댈만한 꿈에 투자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죽은 뒤에 받는 복덕[冥福]을 믿지 않는 저로서는 치열하게 살았던 당신들의 삶이 살아 계실 때 상당 부분 보상받았다는 말씀을 올리고 싶습니다. 아, 한 시대를 이렇게 흘려보내고 있네요.


니체는 말하기를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심연(深淵)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면 심연이 당신의 영혼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황금을 얻고자 싸운 사람은 황금에 먹히지 않도록, 권력에 집착한 사람은 권력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범인 잡는 데 종사한 사람은 자기 마음이 범인 닮아서 사악해지지 않도록, 그리고 우리가 명심할 것은 공산당과 싸운다면서 공산당의 수법을 닮아가는 일이 절대로 없도록 할 일이다.
- 김대중, 『김대중 옥중서신』, 한울, 2000, 348쪽.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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