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16화에서 『대학』의 첫 구절을 가지고 시험문제를 푸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간 대학원에서 큰 배움의 의미를 별로 생각하지 못한 것 같은데 이런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생각이나마 끼적거려봅니다.
이 잡글을 언제나 저를 과대평가해주는 벗 홍군(http://sttora2.net)에게 헌정합니다.


<성균관 스캔들> 16화에서 이선준과 김윤식(김윤희)는 황감제(黃柑製)의 장원을 겨룹니다. 정조대왕은 “이 나라 관원의 백성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를 파자를 통해 밝히라. 단 파자의 원조는 예기 42편의 주희 해석본을 따른다”라는 문제를 출제합니다. 사실 장원전 문제로서는 난도가 현격히 떨어집니다. 『대학』 첫 구절에 나오는 내용이기 때문에 본문의 첫 장만 보면 알 수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가장 기초이기 때문에 가장 어려울 수는 있지만요. 아니면 너무 앞부분이라 시험이 안 나올 것 같아서 공부를 게을리 할 수도 있겠고요.^^;


선준은 “사대부는 백성을 교화하고, 새롭게 하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라는 뜻으로 신민(新民)이라 답했고, 윤식은 “백성들이 좋아하는 바를 좋아하고, 백성들이 싫어하는 바를 싫어한다”라고 하며 친민(親民)이라 답했습니다. 주희 해석본을 따른다는 문제의 단서조항 때문에 선준이 장원을 차지합니다(이 단서조항은 정답 시비를 차단하는 효과가 있었지요). 드라마가 유가에서 치열한 논쟁이 있었던 개념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았겠지만 부연설명이 부족해서 아쉬웠습니다. 마치 윤식이 공부를 덜해서 오답을 낸 것처럼 묘사되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극중 인물인 정약용 선생이 그 뜻 역시 일리가 있다는 식으로 첨언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대학』 첫 문장에 나오는 경문(經文)인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에서 親民을 놓고 주희 선생과 왕수인 선생은 격돌합니다. 『예기』에 포함되어 있던 『대학』의 원문에는 親民으로 되어 있으나 주희 선생는 『대학』에 주석을 달면서 자신의 스승인 정이(程頤) 선생을 이어 받아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뜻의 新民이라 고쳐 풀었습니다. 경문을 해석해 놓은 『대학』 전문(傳文)의 구절들이 모두 親이 아닌 新으로 나와 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주희 선생은 “신민이란 말은 전문을 살펴보면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新民云字 以傳文考之 則有據)”라고 말씀하십니다. 親과 新은 한 글자 차이지만 그 내용이 크게 달라집니다. 주희 선생은 “新은 옛 것을 바꾸는 것을 말하며, 스스로 명덕을 밝힌 후에는 마땅히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쳐서 그들로 하여금 옛날에 물든 더러움을 제거하도록 하는 것이다(新者, 革其舊之謂也 言旣自明其明德 又當推以及人 使之亦有以去其舊染之汚也)”라고 풀이합니다.


여기서 다른 사람은 물론 백성을 뜻합니다. 新民은 사대부가 백성들 위에서 일방적으로 교화한다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에 상하 신분 관계를 엄격히 하는 효과를 유발한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경북대 중문과 이세동 교수는 “위대한 지도자는 단순히 백성을 사랑하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백성을 도덕적으로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적극적 실천을 강조”한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왕수인 선생은 親民을 그대로 쓸 것을 주장합니다. 백성을 친근하게 한다는 뜻의 親民은 사대부와 백성이 같은 자리에 놓이게 됩니다. 수직적 관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를 지향하며 이를 통해 교화뿐만 아니라 서로의 개성을 온전하게 길러주는 양육의 의미를 함께 보듬습니다. 양명의 심즉리설(心卽理說)과 치양지론(致良知論)이 외재적 규범이나 권위에 종속되지 않고 개인의 주체적 자율성을 강조하는 것과 상통합니다.


양명의 『전습록』에서는 “親民이라고 말하면 가르친다는 의미와 양육한다는 의미를 겸하게 되지만, 新民이라고 한다면 한 쪽에 치우친 감이 있다(說親民便是兼敎養意 說新民便覺偏了)”라며 新民이 ‘가르친다’에 경도되었음을 지적합니다. 또 “오직 밝은 덕을 밝히는 것만을 이야기하고 親民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곧 도가와 불가와 비슷하게 된다(只說明明德 而不說親民 便似老佛)”라고 강조하며 백성의 현실적 문제를 다루는 것이 유가의 특질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유가적 현실주의는 백성의 곤고함을 살피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그의 견해에 동감합니다.


정인보 선생은 『양명학연론』에서 주희는 마음 밖에서 구하는 것이고, 왕수인은 마음속에서 찾아가는 것이라고 대별합니다. 주희처럼 해석하면 마음을 밝히는 일이 따로 있고 백성을 가르치는 일이 따로 있지만, 왕수인처럼 해석하면 백성을 친애함이 지극하지 않고서는 마음을 밝히는 일도 이루지 못하는 셈이라고 역설합니다. 두 분의 입장 차이를 나름대로 잘 짚어주고 있습니다.


이황 선생은 <전습록논변>에서 新民이 맞다고 주장합니다. 즉 “新民은 자기가 배운 것을 미루어 백성에게 미치게 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그 덕을 새롭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 두 가지가 모두 ‘학문과 교육(學)’의 뜻으로 일관되게 연결되어 있으니, 백성들을 ‘기르고(養), 친근히 한다(親)’는 뜻과는 처음부터 상관이 없다(在新民者 言推己學以及民 使之亦新其德也 二者皆帶學字意 作一串說 與養之親之之意 初不相涉)”라고 반박합니다. 퇴계가 이를 통해 백성을 수동적인 교화의 객체로 국한함으로써 신분 질서를 옹호했다고 볼 여지도 있습니다. 물론 앞서 살펴본 이세동 교수의 풀이를 좇으면 꼭 그렇게 볼 수만도 없겠지만요.


정제두 선생은 <대학설>에서 親民을 지지하면서 『대학』의 텍스트를 고찰해볼 때 親의 뜻으로 볼 수 있고, 新의 뜻이 아주 약간 등장하지만 근본과 말단의 형세일 뿐이라며 퇴계와 정반대의 결론을 내립니다. 이에 반해 한원진 선생은 <경의기문록(經義記聞錄)>에서 新은 敎를, 親은 養이라고 보고 이 두 가지 사이의 경중을 논하면서, “敎는 養을 수반할 수 있지만, 養은 敎를 반드시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則敎者必能養 而養者未必敎也)”라며 결론적으로 퇴계의 손을 들어줍니다.


정약용 선생은 <대학공의>에서 親民을 수용하면서도 “親과 新의 두 글자는 형상이 이미 서로 가깝고 뜻이 서로 통하니, 친애하는 것이 새롭게 하는 것이다(則新新二字 形旣相近 義有相通 親之者新之也)”라며 두 해석 모두 타당한 측면이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양명이 대학 공부를 한 사람의 마음이 온 세상 사람들을 품는 경지에 오르는 것을 親民으로 이해했다면, 다산은 백성들끼리 서로 화목하며 친애하는 것을 親民으로 이해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다산은 “백성이 서로 친애하면 백성은 곧 새롭게 되는 것이니, 어찌 꼭 한 획도 변함이 없어야만 이에 문장의 앞뒤가 서로 맞게 된다는 것인가(百姓相親 其民乃新 豈必一畫無變 乃爲照應乎)”라고 말씀합니다. 저도 역시 親民과 新民이 이렇게 대립해야 하는지 헛갈립니다. 親民 없는 新民은 맹목적이고, 新民 없는 親民은 공허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날 親民과 新民을 따질 실익은 지도자가 백성과 너무 동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담담한 가르침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본 유학자인 이토 준사이가 新民을 지지한 것에 반해, 오규 소라이는 親民을 주창하는데 그 이유가 다소 이색적입니다. 즉 <대학해>에서 정이가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나라를 바꾸는 일인데, 『대학』은 수성하는 군주가 받드는 일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殊不知新民者革命之事 而大學者守成之君所奉也)”라며 정이가 新民으로 바꾼 것을 비판합니다. 新民은 혁명의 뜻이므로 지도자가 친애하는 모범을 보여서 수성을 꾀하도록 한 『대학』은 親民으로 봐야한다는 독창적인 견해입니다. 親民이 보수적이고 新民이 진보적인 함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조대왕은 『홍재전서』 <경사강의(經史講義)>에서 이 문제에 대한 고심을 보여줍니다. “대개 정이와 주희가 경문을 바꾸어 고치고 단연코 의심하지 않은 것은 그 이유가 두 가지이다. 하나는 親民이라고 하는 것은 글 뜻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치가 없고 新民이라고 해야 논리가 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新民이라고 하는 것은 전문을 가지고 살펴보건대 근거가 있고 親民은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蓋程朱之改易經文。斷然不疑者。其說有二。一則曰親民云者。以文義推之則無理。而彼乃曰有理。一則曰新民云者。以傳文考之則有據。而彼乃曰無據)”라고 주자학파의 논거를 요약합니다. 그러면서도 주자학파의 논거인 전문에 등장하는 新民은 모두 스스로 새로워진다는 뜻이지, 지도자에 의해 새롭게 된다는 뜻이 없다고 지적합니다. 『대학』 전문 제2장을 살펴보아야 이해가 되는 내용이지만 인용해보겠습니다.


구일신(苟日新)의 新은 스스로 새로워지는 新이요, 작신민(作新民)의 新은 백성이 스스로 새로워지는 것이요, 기명유신(其命維新)의 新은 천명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세 문장에서 말한 新은 모두 新民의 新이 아닌데 어디에 그것이 新民을 해석한 뜻이 있는가? 전문 중에서 경문에 나오는 新자의 바른 해석을 지적한다면 마땅히 어느 곳에서 볼 수 있겠는가?
苟日新之新。自新之新也。作新民之新。民之自新也。其命維新之新。天命之新也。三節所言之新。皆非新民之新。則烏在其釋新民之義也。若就一章之中。指摘其經文新字之正解。則當於何處見得耶。
- 『홍재전서』 제70권 경사강의(經史講義) 7 대학(大學) 4 


이처럼 정조대왕이나 다산이 親民에 우호적인 생각을 품었더라도 실제 시험의 답은 드라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양명의 주장은 중국이나 일본에 견주어 조선에서 가장 심하게 이단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윤식이 오답 처리된 까닭입니다. 양명학이 제대로 연구되지 못했던 조선 지성계의 편협함이 새삼 아쉽습니다. 주자학파와 양명학파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저는 그래도 이 둘의 다름에 더 관심이 갑니다.


양명학은 주자학의 관념론적 경향을 극복하기 위해 직관을 긍정하고 실천을 중시했습니다. 둘레의 현실에 무심하지 않았던, 천하의 인심을 자신의 마음처럼 여겼던 양명의 정신을 곱씹습니다. ‘새롭게 만드는 사람’과 ‘새롭게 바뀌는 사람’의 구별이 없어지는 세상은 민주주의의 이념과 대한민국 헌법의 정신과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윤식 유생님~ 떨어져서 하는 말인데, 정말 잘했어요! - [無棄]


<참고 문헌>
금장태, 『도와 덕』, 이끌리오, 2004, 192-199쪽.
김기현, 『대학 - 진보의 동아시아적 의미』, 사계절, 2002, 100-114쪽.
김미영 역, 『대학·중용』, 홍익출판사, 2005, 36-38쪽.
김학주 역, 『신완역 전습록』, 명문당, 2005.
정인재, 한정길 역, 『전습록 1~2』, 청계, 2001.
홍원식, 이상호 역, 『양명학연론』, 한국국학진흥원, 2002, 55-56쪽.
김세진, 「「전습록논변」을 통해서 본 양명심학과 퇴계리학」, 제2회 강화 양명학파 국제학술대회(한국양명학회, 2005.10), 405-436쪽.
안병걸, 「정조 어제조문의 경학관 -『경사강의』, 대학조문을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1), 395-424쪽.
임옥균, 「주자와 일본 고학파의 『대학』 해석」, 『동양철학연구』(동양철학연구회, 2010.2), 303-334쪽.
황갑연, 최진덕, 「조선성리학자의 양명학 비판 논거에 대한 비판적 고찰」, 제3회 하곡학 국제학술대회(한국양명학회, 2006.11), 229-251쪽.


이 글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변명’ 시리즈 - “최도영을 위한 변명”(http://ikgu.com/entry/최도영을-위한-변명)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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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석훈 2011.01.08 16:20 Address Modify/Delete Reply

    익구 형, 오랜만에 들어와서 오랫동안 읽고 갑니다.
    특히 현상을 관류(貫流)하는 맥을 짚어내는 다산의 명민함에 다시금 감탄합니다.
    형 말씀처럼, 계몽의 주체가 모호해지는, 차라리 계몽이란 단어가 날캉해지는 세상을,
    저도 꿈꿔봅니다. 다시 한 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익구 2011.03.14 05:50 Address Modify/Delete

      너의 표현이 참 좋다. 요즘 내 삶의 화두는 자치(自治)야. ‘스스로 다스림’의 즐거움과 괴로움을 나누기가 어렵고, 구성원 모두가 주인이라는 생각을 공유하기가 힘들더군. 단순히 ‘시간’을 알려주기보다는 함께 ‘시계’를 만드는 과정을 소중히 여기겠다는 나의 바람은 비효율적인 자유토론 애호가라는 핀잔을 듣기 일쑤야. ‘나’라는 개인만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개인의 취향’을 귀담아 듣겠다는 내 희망은 나를 도우려는 둘레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곤 해. 그럼에도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주인 사이의 느슨하지만 그윽하고 오래가는 연대를 추구하고 싶다. 이 여정에서 ‘새롭게 만드는 사람’과 ‘새롭게 바뀌는 사람’의 구별이 없는 자치가 『대학』의 정신을 구현하는 길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