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구는 친구들 사이에 별명들을 서로 불러주는 경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본명을 불러주기를 즐긴다. 그러나 그런 익구마저 본명 대신 다른 명칭을 쓰는 이가 있으니 바로 친구 섭승현이다. 승현이는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을 하게 되어 알게 된 친구로서 익구는 ‘섭’이라고 부른다. 이유인즉슨 승현이라는 이름이 흔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특이한 성씨인 ‘섭’으로 호칭을 정했다는 것이다.


중고등학교를 함께 다닌 섭은 현재 중국 인민대 법학과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 방학이고 해서 한달간 한국을 들렀던 섭이 곧 중국으로 떠나게 되어 익구는 23일 월요일에 약속을 잡았다. 익구와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인 청원이도 가까스로 섭외가 되어 셋이서 중계동 은행사거리에서 만나게 되었다. 주로 놀러가는 노원역 일대와는 달리 중계동 일대는 학원가들이 많은 편이라 비교적 거리도 한산하고 조용한 편이었다. 결국 그 일대를 주욱 둘러보고 호프집에 자리를 잡았다. 이 때가 거의 자정이 다될 무렵이었다.


익구의 강력한 주장으로 흑맥주 2000cc를 시킨 세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웠다. 섭이 중국 유학생이다보니 이야기 화제가 중국 관련한 것이 많이 나왔다. 섭은 법학도인 관계로 중국의 사법제도를 조금 이야기 하다가 중국의 사법부는 독립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지 못하다고 말했다. 또한 중국에 공산당 말고 다른 정당들이 존재한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는데, 중국 당국은 “공산당 영도하의 다당제”라는 억지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익구는 공산당 일당독재가 이어지는 한 중국의 발전은 한계에 봉착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경제가 발전하면 할수록 민주주의나 인권에 대한 열망은 자연히 높아질 것이라고 말하며, 이를 해결하지 못하고서는 존경받는 선진국으로서의 지위를 얻기 힘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서구식 민주주의 모델의 우월성을 인정해야한다고 말했다. 섭은 13억 인구의 그 엄청난 규모의 국가를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데 일당독재 시스템이 필요악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청원이는 미국의 패권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면서 흔히들 이야기하는 중국 등이 도전하는 다극체제로의 진입은 요원한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


익구는 아무리 사람수 많은 나라라고 해도 중국 인민들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엘리트층이 두터워지면 결국 저 잘났다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어 있고 일당독재 시스템의 적실성을 상실하게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섭은 상당수 식자층에서 그런 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쉬쉬하거나 큰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는 실정이라고 답했다. 청원이는 미국이라는 유일 패권국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도 EU같은 한중일을 주축으로 한 아시아 연합체를 창설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을 밝혔다. 익구는 아시아 연합은 회의적이라는 반응을 보이면서, 중국보다는 차라리 EU가 미국을 견제할 세력으로 성장하기를 기원한다는 기대를 보였다.


이에 섭과 청원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독일과 프랑스의 차이만 봐도 유럽통합은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그 미래를 낙관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익구는 현재까지만 해도 놀라운 성과이며 더욱 가시적 성과가 기대된다고 반박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돌다가 중국이 그나마 도전하고 있을 뿐, 현재 세계는 서구 중심의 질서 안이라는 것에는 모두가 동감했다. 터키가 EU에 가입하려고 하는 데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에 씁쓸함에 느끼면서 한때 세계의 주도권을 지었던 동양의 몰락은 너무 안주한 결과라며 혀를 찼다. 익구는 덧붙여 서양의 지속적 자기 혁신 노력도 한 몫 했다며 높이 평가했다.


세 사람은 모두 서울외고 중국어과 출신이다 보니 기본적으로 친중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익구와 청원이는 중국을 꼭 가보고 싶다며 중국 여행에 강한 집념을 보이기로 했다. 섭은 자신이 먹고 살 터전이 될 중국이 앞으로도 경제발전을 하기를 기원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익구는 앞의 이유들을 들어 중국의 성장이 발목을 잡힐 것이라며 폄하했다. 청원이는 두 사람의 설전을 듣고 있다가 역사학도답게 최근 중국의 고구려사 침탈 문제를 제기했다.


섭은 최근 들어 노골적으로 고구려사를 자기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노력을 하는 듯하다고 말했으며, 이미 시험 등을 통해 그런 내용을 주입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익구는 이에 분개하며 우리의 역사에 대한 무지가 결국 고구려사를 유린당하게 하고 있는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그러나 정작 청원이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해서 그나마 우리 역사로 볼 수 있는 것일 뿐, 사실 고구려가 온전히 우리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지 않느냐는 입장을 밝혔다. 익구는 졸지에 민족주의자가 되기를 자처하면서 그건 어불성설이며 그렇게 따지면 어느 나라가 지난 나라를 이어 받아 그 역사를 독차지 할 수 있느냐고 말했다.


이 밖에도 중국과 연관된 소재를 조금 더 나눠보았지만 기본적으로는 중국이 더 이상 꾀죄죄한 가난한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에 합의를 했다. 세계 최고의 경제성장률을 자랑하는 무서운 경쟁상대로서 시샘이 난다는 것도 부인하지 않았다. 익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늘어나는 돈만큼 그에 비례해서 중국의 고민도 늘어날 것이라고 마지막 태클을 걸었다.^^; 그런 와중에 지금 중국 걱정 할 때가 아니며 이웃한 북한만 생각하면 속이 막힌다는 것에도 놀랄 정도로 합의를 이뤘다. 중국만큼의 유연성도 보이고 있지 못한 꽉 막힌 조선로동당 꼴통들에 대한 구박도 이어졌다.


북한 이야기를 잠시 나누다 와중에 청원이는 뜬금없이 부시가 제발 이번 미 대선에서 떨어지기를 바란다는 발언을 함으로써 세 사람은 엄청난 공감대를 형성했다. 세 사람은 우리나라의 앞날을 위해서도 부시가 재선에 실패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했다. 앞선 이야기들의 사소한 차이들은 다 덮어지고 한바탕 큰 동감의 마당이 펼쳐졌다.^^


중국 이야기를 마저 나누다가 한 때 이슈가 되었던 파룬궁 사태가 궁금해서 섭에게 물었다. 그러나 섭은 파룬궁 사태가 무언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중국에 종교가 있긴 있지만 사실상 종교활동이 활발하지 못하다는 상황을 전했다. 익구는 마르크스의 말대로 종교는 아편이라는 인식이 있는가보다고 받아 넘겼다. 갑자기 화제가 종교쪽으로 넘어 오면서 평소 익구의 소신대로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우악스러움을 지적하며 게거품을 물었다.


청원이는 신이 없는 종교인 불교 신자인 만큼 과연 종교를 가진 사람도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라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익구는 유신론자이지만 무교임을 천명했고, 섭은 카톨릭이지만 그리 열심히 나가는 신자는 아니라고 했다. 셋은 종교인들 중에 상당수는 종교를 통한 인맥 구축 같은 세속적 꿍꿍이를 가진 사람일 것이라는 비판을 했다. 또한 종교가 일단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건드리기 쉽지 않고 웬만하면 건드리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데 모두 동감했다. 익구는 다만 헌법상 보장된 종교의 자유는 믿을 자유와 더불어 안 믿을 자유도 보장하는 것임을 종교 가진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나누니 술, 안주가 모두 떨어졌다. 결국 자리를 떠서 2차 장소를 물색하던 중 분식집에 자리를 잡았다. 된장찌개 곁들인 비빔밥, 김밥, 쫄면 등을 시켜 배불리 먹으면서 이야기 마당을 이어 갔다. 그러던 중에 앞으로 우리 무엇을 해서 밥 벌어먹고 살까라는 고민을 해봤다. 세 사람은 법학도인 섭이 사법부에, 행정고시 준비생인 청원이는 행정부에 진출하기로 하고, 남은 내가 입법 관련으로 진출해서 삼권분점을 해보자고 농담 삼아 말했다. 분식집 서약이라고 명명해놓고서는 서로 기가 막혀서 한참을 낄낄거렸다. 여하간 세 사람은 야참을 맛나게 먹으며 흡족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새벽 3시가 되어서야 세 사람은 헤어졌다. 오랜만의 긴 대화에 만족스러웠고 한편으로는 아쉬운 눈치였다.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는 섭에게 작별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다. 익구는 앞으로도 이런 푸근한 이야기 마당을 친구들과 나눴으면 한다는 포부를 밝히며 이번 회동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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