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1. 3월 10일 저녁 7시경

익구는 탄핵안 발의 소식을 듣다. 159명이나 동조를 했다는 사실에 흠칫 놀랐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 익구는 그냥 가볍게 민주당 이 제 정신 아닌 것들이라고 구박해본다. 이 때까지만 해도 다들 그랬듯이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채지 못하다.


장면2. 3월 11일 3교시 행정법총론 강의 시간

친구 청원이와 지루한 행정법 강의를 들으며 농담 따먹기를 하다. 익구가 침울한 모습을 보이자 탄핵안 발의 때문이냐며 물어 온다. 익구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청원이는 설마 탄핵안이 의결되겠냐며 걱정하지 말라며 격려해준다. 익구 또한 히히덕거리며 그럼 그렇지라며 맞장구 친다. 강의 시간 내내 계속 딴짓거리 하며 놀다.


장면3. 3월 12일 오전 11시 20분 집구석

익구는 강의가 없는 날이라 여느 때 같으면 정오는 지나야 일어나겠지만 엄마께서 깨우는 소리에 눈을 뜨다. 거실 쇼파에서 좀 더 누워볼 요량이었으나 티비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잠이 번쩍 깨다. 이미 상황은 탄핵 소추안이 상정되어 투표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인의 장막(혹은 개떼들)에 가려진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항의 구호가 간간이 들려오는 광경이 벌어지다. 익구는 눈물이 주르륵 흐르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 평소 욕설을 안하기로 유명한 익구였지만 참지 못하고 몇 마디 욕을 입에서 웅얼거리다. 결국 탄핵안이 가결되고 분노는 극에 치닫다. 오후 3시가 되도록 각종 뉴스들을 접하며 화를 삭혔다. 오후에 각 반 개강총회와 신입생환영회를 들르기 위해 학교에 갔다가, E반 신입생환영회에서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도 기분 탓인지 금세 취해서 A반 개강총회 뒤풀이는 참석하지 못하고 집으로 서둘러 돌아오다.


장면4. 3월 13일 오후 6시 광화문

익구는 청원, 규상과 함께 광화문 촛불집회에 나서다. 노무현 지지자도 아니지만 이런 기회를 놓치기는 아깝다며 호기심에 가득 차 함께 한 청원과 술집 알바라 토요일에 빠지기 싶지 않은데도, 내 몫까지 해달라는 사장님의 격려를 들으며 알바를 미루고 함께 한 규상. 세 사람은 광화문 일대를 헤매이며 촛불을 흔들기도 하고, 노래도 불러보고, 한바탕 웃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다. 끝 무렵에 수현이도 만나 함께 귀가를 하려던 참에 수현이가 알바비로 야참을 쏠 것을 제안해서 일동 흥분했으나 1호선 서울역 근처에 먹을 곳이라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어서 눈물을 머금고 무산시키게 되다.^^; 방향이 다른 수현이를 먼저 보내고, 세 사람은 야참을 위해 동대문역에서 내려 헤매이다 심야 영화를 보자는 것까지 의견을 모았으나, 결국 닭꼬치와 햄버거를 사먹고 흩어지다. 전철길에 '다함께'에서 발간한 신문을 읽던 규상이 문자를 날리다. “얘들 탄핵'만' 반대한데.ㅡ.ㅡ” 익구도 서둘러 답문을 보내다. “갸들 원래 그랴.^^; 그래도 고맙잖아.” 집 오는 길 내내 허기를 달랠 수 없던 익구는 노원역 근처 분식집에서 라볶이 2인분을 사서 포식하며 씁쓸한 마음을 달래다.


장면5. 3월 14일 새벽 컴퓨터 앞에서

탄핵 관련 뉴스들과 글들을 읽느라 여념이 없다. 특히 탄핵특별판을 낸 딴지일보를 보며 기분을 좀 풀다. 또한 재미난 피켓으로 모두들 즐겁게 한 디시인사이드에 가서 탄핵 관련 합성 사진들이나 글들을 보며 키득키득거리다. 고등학교 동창 동호회에서 그간 정치적 대립각을 세우던 친구의 글을 발견하며 우리의 오랜 갈등을 일거에 해결해준 한나라, 민주 일당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다.^^;

“익구야 나 열린우리당 찍을 거다. 이번에 탄핵역풍으로 많이들 열린우리당 지지한다 하더라... 그래도 노무현이 너무 말실수 많이 하는 거 같다. 노무현이 잘만했으면 이렇게 되지는 않지 않았겠니? 노무현에게도 잘못이 있으니 성찰하면서 추이를 지켜보자. 4.15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의 압승을 기원하며”



장면6. 3월 15일 고려대

정치적 사안에 대한 불개입이 원칙이던 37대 경영대 학생회의 원칙을 깨고, 탄핵 반대 대자보를 제작하기로 의견을 모으다. B4 8장으로 대자보 용지 딱 한 장에 들어맞게 대자보 작업을 해서 주요 게시판에 붙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시 보니 감정적인 내용만 많아서 민망하다.

대통령 탄핵 폭거 규탄한다!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됐다. 정치꾼들의 악행 중에서도 가히 최악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국민들과 함께 3.12 의회 쿠데타에 대해 매우 비통하게 생각한다. 우리 소중한 민주주의를 분탕질한 무책임한 거대 야당의 횡포를 우리는 똑똑히 기억할 것이다. 대다수 국민들이 동의하지 않은 대통령 탄핵을 수적 우위로 밀어붙인 한민당의 야만스런 행위에 우리는 분노한다.

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서 그 부끄러운 낯짝을 치워야할 16대 국회가 탄핵 장난으로 마지막 패악질을 하고 말았다. 노무현 대통령을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고 갖은 손가락질로만 연명하던 이들이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막무가내 칼부림을 하고 만 것이다. 차떼기 강도질과 부끄러운 협잡질로 일관한 거대 야당은 제 허물은 보지 못하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남 탓만 하는 추한 모습을 보였다.

이미 효용을 다한 정치꾼들에게 이제는 정치시장 상품으로서의 자격을 박탈하자. 추악한 탄핵 장난질을 한 정치꾼들에게 다가올 4.15 총선에서 시장의 냉엄한 심판을 보여줄 것이다. 오래 전에 도덕적 정당성조차 잃은 자들이 국민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함부로 끌어내리는 천박한 행태에 걸맞은 대가를 치르게 해줘야 한다. 아울러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탄핵안에 대해 조속하게 기각 결정을 내림으로써 국민들의 의사를 존중하고, 법률적 근거가 미약한 탄핵안에 대해 정당한 판결을 내려야 한다.

저 오만한 정치꾼들이 저지른 탄핵에 동의하지 못하는 모든 이들은 사소한 차이는 벗어버리고, 공화국 시민으로써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힘을 모으자.

37대 경영대 학생회 운영위원회



장면7. 3월 20일 저녁 집 거실 오디오 앞에서

익구가 고대하던 김동률 4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 길로 음반점에서 구입해서 쭈욱 들어보다. 수능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고3 수험 교실에서 익구에게 한줄기 위안이 되었던 동률공 3집의 인상이 너무 강렬했던 것일까. 혹은 지금 시국이 뒤숭숭해서 편히 감상할 마음이 되지 않아서일까. 아님 동률공의 걱정대로 조금 어렵게 느껴져서인지는 몰라도 무언가 차분히 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간의 스트레스를 풀 수 있었다. 이번 4집 앨범명은 토로(吐露)... 나름대로 솔직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익구이지만 토로라는 단어 앞에서 무언가 모를 부끄러움을 느끼다.


지난 일주일간 많은 이들과 이야기 나누고 욕도 해보면서 탄핵 정국의 혼란은 이제 좀 가라앉는 듯하다. 익구도 그간 어수선하던 기운을 털어 내고 차분히 일상으로 돌아오다. 저들이 자초한 최악의 행패에 국민들의 준엄한 심판을 기대하며 하루하루가 늘 희망에 넘치지만 한 편으로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관성의 법칙은 늘 질기고 굳건해서 함부로 수그러들지 않는다는 직감 때문이다. 여기저기 조직되고 있는 무적의 투표 부대들이 이 관성의 법칙을 극복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이번 탄핵 충격을 계기로 거대한 정치적 냉소와 무관심에 균열이 생기기를 기대한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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