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5월 27일 연세대 특강 내용 중에 진보와 보수를 언급한 내용은 여러모로 혼란스럽다. 노 대통령은 보수를 “힘이 센 사람이 좀 마음대로 하자. 경쟁에서 이긴 사람에게 거의 모든 보상을 주는 약육강식이 우주섭리에 가깝다고 말하는 쪽”이라고 말하며 “합리적 보수, 따뜻한 보수 별의별 보수를 갖다 놓아도 보수는 바꾸지 말자는 것”으로 정의했다. 반면 진보는 “인간은 어차피 사회를 이루어 살도록 만들어져 있으니 더불어 살자”는 것으로 정의했다.


대강의 얼개는 맞다고 볼 수 있지만, 문제는 진보는 선이고, 보수는 악이라는 뜻빛깔(뉘앙스)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는 점이다. 노 대통령의 진보와 보수에 대한 인식은 곤혹스럽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나 지나치면 독단과 독선에 빠지게 된다. 노 대통령의 강연 내용에게 그런 혐의를 짙게 드리우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노 대통령이 말하는 보수는 사익만을 추구하고, 상도덕을 어기는 보수를 지칭하는 것이겠지만 정치적 수사로 용인하기에는 너무 비약이 심했다.


레이건의 ‘악의 제국’이나 부시의 ‘악의 축’ 따위의 레토릭이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말살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고의 산물이듯이, 노 대통령의 보수세력에 대한 비판도 상당히 우려스러운 수준이다. 못돼 먹은 수구세력, 냉전적 보수에 손가락질하는 것을 넘어 건전하고 합리적인 보수세력들까지 도매금으로 취급하려 했다는 점에서 부적절한 발언이다. 기실 박근혜 대표의 말대로 “보수는 끊임없이 고치며 살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나라당이 그런 세련된 보수라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다. 자기들이 언제 끊임없이 고쳤다고...ㅡ.ㅡ;)


또한 노 대통령 자신의 정치적 성향이 진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소 현실과 괴리가 있다. 노회찬씨의 지적처럼 “자유주의적 개혁적 보수주의”가 노 대통령의 정치적 지향을 보다 적실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유시민 의원이 누차 강조하듯 열린우리당이 온건보수, 한나라당이 강경보수, 민노당이 진보라는 위치잡기(포지셔닝)를 하고 있다는 것이 보다 타당한 설명이 될 것이다.


노 대통령은 좌파를 빨갱이 취급하던 한국의 기형적 정치 질서에 얽매인 사고를 벗어 던져야 한다. 이제 그런 우편향 된 정치지형에 균열이 생기고 있는 만큼 억지로 자신을 진보라고 자처하기보다는 스스로 자유주의자로서, 개혁적 보수로서의 면모를 다잡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 바란다. 노 대통령이 굳이 진보적 정치를 펼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보안법의 폐지나 천민자본주의와 극단적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경계 같은 자유주의 미감을 구현할 수 있는 것을 실현할 짐은 지고 있다. 꽤 그럴듯한 보수가 되는 것으로도 노 대통령의 소임은 다할 것이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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