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를 관람하다

잡록 2004. 6. 12. 02:35 |
6월 5일 익구는 청원, 찬구와 함께 [토로이]를 관람했다. 영화 취향이 까다로운 청원이는 생각보다 만족스럽지 못하다며 투덜거렸으나 익구는 비교적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영화는 원작인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상당히 다르게 각색했다. 제작진이 각색이 아니라 영감을 얻은 정도라고 말했듯이 원작과는 사뭇 다른 내용들이 난무한다. 우선 신들의 장난질이 싹 사라지고 오로지 인간 이야기만으로 진행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또한 헬레네가 결국 다시 전남편 메넬라오스에게 돌아가고, 헥토르의 아내 안드로마케는 아킬레우스 아들의 첩이 된다는 이야기는 쏙 빠지게 된다. 또한 헥토르의 시신을 프리아모스 왕이 엄청난 몸값을 치르고 찾아올 수 있었다는 내용도 아킬레우스가 왕의 용기에 감명을 받아 공짜로 내어주는 것으로 미화되어 표현된다. (사실 이 대목에서 몸값을 치르기 위해 수레에서 갖은 재화들을 내리는 장면을 상상하면 얼마나 멋대가리가 없고 비루하겠는가.^^; 여하간 피터 오툴의 매혹적인 연기에 찬사를 보낸다)


이처럼 원작과는 다른 내용이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그리 밉지만은 않아 보인다.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드]가 비교적 그리스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면 [트로이]는 트로이 진영에 대한 연민을 감추지 않는다. 아킬레우스가 양아치로 그려지고, 헥토르는 다정다감하고 착실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그리스군의 수장 아가멤논이 권력아귀에 달라붙은 탐욕스런 인물이라면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는 부정이 그득한 기품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또한 트로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죽지 않는 메넬라오스와 아가멤논이 모두 죽는 것으로 처리되는 것도 트로이에 대한 배려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아가멤논이 브리세이스의 일격에 당하는 장면에서 통쾌함을 느꼈다^^;)


이렇게 트로이에 많은 애정을 할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트로이는 목마를 들여보내는 삽질을 함으로써 잿더미가 되어 버린다. 익구는 이 대목에서 혀를 내둘렀다. 신화에 따르면 트로이의 사제 라오콘은 목마를 성안으로 들이지 말 것을 주장하며 목마를 향해 창을 던지기 까지 한다. 그러나 갑자기 나타난 두 마리 뱀이 라오콘과 두 아들을 물어 죽어버린다(그 유명한 라오콘 조각상의 일화다). 결국 트로이 사람들은 신들이 노한 것이라며 목마를 성안으로 끌고 와 화를 자초한다. 신화적 요소를 제거한 이 영화인만큼 이 황당한 장면이 삽일 될 리 없지만 목마를 좋다고 끌고 들어오는 장면은 아무리 봐도 석연치 않다. 익구는 스스로가 라오콘이 되어 스크린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착각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결국 일리오스(Ilios, 트로이의 별칭)가 불타 오르는 순간에 익구는 포에니 전쟁에서 패배한 카르타고의 불타는 시가지의 모습을 함께 연상했다.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로마의 스키피오 장군은 일리아드에 나오는 헥토르의 “언젠가는 트로이도, 프리아모스 왕과 그를 따르는 모든 전사들과 함께 멸망할 것이다”라는 구절을 읊조렸다고 한다(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2권 中). 한니발의 회한과 카르타고의 비운을 늘 안타까워했던 익구도 불타는 트로이에서 카르타고를 연상하는 데 그리 큰 어려움이 없었다. 모든 몰락하는 것들은 다 비슷한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역사가 승자의 몫이고, 부, 명예, 권력을 차지한다면 안쓰러운 동정심은 패자에게 던져지는 개평(?)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아가멤논의 “사내들의 세계에는 평화란 없지, 제국은 전쟁으로 건설되지”라는 명제에 충실하게 마초적 감수성을 향해 돌진한다. 남자들의 권력과 명예를 향한 아귀다툼이 그럭저럭 미화되고 있는 셈이다. 아킬레우스는 “남자는 야망이 커. 난 더 크지”라며 자신의 남근적 세계관에 충실할 것임을 천명한다. 이런 와중에 자연히 여성들은 수동적인 대상으로 전락한다. 헥토르도 출정하면서 “신을 섬기고 내 여자를 지키며 조국 트로이를 사랑하라!”는 원칙을 제시하지 않는가. 이러한 남성우월주의 아니 남성올인(!)주의는 지난날 인류의 누추한 미감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이런 마초적 감수성은 여전히 대다수 남성들의 가슴속에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마초적 남성을 사랑하는 여성들이 존재하는 한 앞으로도 마초적 매력을 갖춘 이들은 여전히 상품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익구가 양성평등주의를 옹호하고 여성의 권익향상을 들먹거리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마케팅에서 소비자의 서로 다른 욕구에 따라 시장을 분류하는 것을 시장세분화라고 하고, 세분시장(market segment)은 주어진 마케팅 자극에 대해서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소비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시장을 말한다. 이에 비추어 보면 여전히 마초 시장은 거대하고, 당연히 이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상품이 쏟아지는 것을 배아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화려한 전투 장면을 감상하며 장관(壯觀)이라며 마냥 손뼉을 칠 수 없는 것은 영화관 밖을 나서면 나 또한 다른 전쟁판에 떠밀리기 때문이다. 남자라는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이런저런 전쟁터로 내몰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다. 다만 문명화된 위선의 사탕옷이 입혀져 처음에는 단맛에 취해 그 씁쓸함을 모른다는 점이 조금 다를 뿐이다. 익구가 왕과 영웅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 쓰러져갔던 트로이와 그리스의 이름 없는 병사들 같은 인생과  얼마나 다를지 장담할 수 없다. 익구의 젊은 피 또한 권력자들의 손아귀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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