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구는 10월 1일 청원이와 함께 종묘, 창경궁, 창덕궁을 다녀왔다. 역사학도인 청원과 고궁 마니아인 익구가 어렵사리 일정을 맞춰서 오랜만에 서울 시내 나들이를 떠났다. 돌아다니는 내내 비가 오락가락하는 궂은 날씨였지만 중학생 때 가본 이후 무척 오랜만에 둘러본 고궁 나들이는 심신의 피로를 풀어주는 좋은 휴식이 되었다는 평가다.


처음으로 간 종묘(宗廟)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사당으로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곳이다. 현재 정전에는 19실에 49위, 영녕전에는 16실에 34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종묘는 사당이기 때문에 정숙 표지판도 보이고, 무척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가 흐르는 곳이다. 본래 종묘에는 화려한 꽃나무를 심지 않았다고 하는데,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종묘가 너무 침침하다며 꽃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한다. 지금도 몇 그루의 꽃나무가 남아있다고 하는데 나무에 대해 문외한이나 나무에는 그리 신경을 쓰지 못했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공민왕신당이다. 망묘루 동쪽에 별당으로 고려 31대왕인 공민왕을 위하여 종묘 창건시에 건립된 곳이다. 정식 명칭은 ‘고려공민왕영정봉안지당(高麗恭愍王影幀 奉安支堂)’으로서 조선왕조의 신위를 모신 곳에 고려의 왕이 있다는 것이 특이했다. 특별한 문헌기록은 없다고 하는데 왕조 교체기에 고려에 아직 애정이 남은 백성들을 달래기 위한 처사였을 것 같다고 제멋대로 추정해봤다. 신당 내부에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이 있다고 하는데 굳게 닫혀 있어서 볼 수 없어 아쉬웠다.


다음으로 종묘 정전(正殿)으로 향했다. 여느 고궁과는 달리 단청을 칠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제사를 위한 건물임을 알 수가 있다. 종묘 정전은 남문에서 보면 동서 109미터, 남북 69미터나 되는 묘정 월대(月臺, 대궐의 전각 앞에 놓인 섬돌)가 넓게 펼쳐 있다. 이 공간은 제관들이 제사를 드릴 때 대기하는 공간인데, 묘정 월대는 단(壇)의 일종으로 지면으로부터 단을 높여 다른 공간과 성격이 다르게 하늘로 이어지는 공간임을 암시한다. 월대 가운데에는 신실로 통하는 긴 신로가 남북으로 나 있다. 검은 돌로 되어 있는 신로는 신만이 지나가는 길이라고 했지만 기분 내며 터벅터벅 걸으니 기분이 묘했다.


종묘 정전은 조선왕조가 계속 되어 모실 신위가 늘어남에 따라 몇 차례에 걸쳐 옆으로 증축하여 오늘날과 같이 늘어졌다는 점에서 마치 살아있는 건물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지금은 모든 재실이 꽉 차있는 상태라고 한다. 조선왕조가 계속되었다면 정전이 옆으로 더 길어졌을지도 모르고, 지금도 증축을 하고 있어야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우스웠다. 태조가 종묘를 건설할때는 재실이 5칸 있었으니 정종이 승하하자 재실이 모자라게 되었다. 결국 사당을 하나 더 짓기로 하고 정전 옆에 영녕전을 세우게 된다. 태조의 4대 조상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위패가 영녕전 중앙에 자리한 4칸의 재실을 차지하고 생전 별로 큰 업적이 없거나 평가가 좋지 못한 왕들도 아예 영녕전에 모시게 되었다.


그러나 세조가 영녕전으로 물러나야 할 시기가 오자 다시 문제가 생겼다. 중종의 신주를 모시면 세조의 위패가 영녕전으로 가야하는데 명종은 자신의 직계조상인 세조의 위패를 정전에서 빼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결국 정전을 4칸 증축하고 11칸으로 만들었고, ‘不遷之位’라고 하여 업적이 훌륭한 왕인 경우 4대조까지 모신다는 계산에 넣지 않고 위패를 영원히 모시는 편법(?)을 쓰기로 한다(우리궁궐지킴이 누리집(http://www.palace.or.kr) 에서 이상해 성균관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의 [종묘를 다시 본다] 참조했음). 세조에 의해 쫓겨나 죽임을 당했던 단종의 경우 숙종 때 명예회복이 되어 영녕전에 간신히 모셔져 있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세조를 위한 억지가 영 마뜩지 않다. 또 이렇게 세조를 위해 애썼던 명종 자신은 영녕전에 모셔 있다는 것도 우습다.


그 후 두 차례의 증축을 거쳐 지금의 19칸으로 늘어났고, 정전을 증축하면서 자연히 영녕전도 늘어났다. 정전과 영녕전에는 우리에게는 생소한 추존된 왕들도 많이 모셔져있는데 반해 연산군, 광해군은 정전, 영녕전 어디에도 모시지 않았다. 새롭게 평가받는 광해왕(개인적으로 광해왕으로 높여 부르고 있음)의 경우는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조선 시대 궁궐의 상당수는 광해왕 시절에 중건된 것이 많다. 지금의 궁궐이 그나마 남아 있는 것은 광해왕의 공이 큰데 아쉽게도 정전과 영녕전이 지금은 꽉차 있어서 모시고 싶어도 모실 길이 없다.^^;


정전 바로 옆에 있는 종묘 영녕전(永寧殿)도 정전과 거의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으나 규모 면에서 작다. 하지만 무지막지하게 길어서 사진기에 딱 잡히지도 않는 정전보다는 인간적이다. 종묘에는 사실 정전과 영녕전 외에는 딱히 눈에 띄는 건축물이 없기 때문에 대강 생략하고 창경궁으로 향했다. 창경궁과 종묘는 서로 통해있어 입장료를 내면 둘 다 돌아볼 수 있다. 종묘와 창경궁을 잇는 육교를 건너는 마음이 그리 좋지 않은 것은 일제가 이 곳의 지맥을 끊어 동서로 길을 뚫었기 때문이다. 도로 조성을 빌미로 본디 연결되어 있던 창경궁과 종묘의 지맥을 훼손한 일제의 만행이 새삼 떠올랐다.


창경궁(昌慶宮)은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탔으나 1616년(광해왕 8년)에 주요 건물들을 재건하여 완공하였다. 이 보다 7년 앞서 창덕궁이 재건되어 법궁(法宮, 왕이 머무는 공식 궁궐들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는 궁궐)이 됨에 따라 창경궁도 창덕궁과 인접한 관계로 조선왕조 역사의 중요한 무대로 활용되는 기회가 많아졌다. 하지만 조선 말기부터 왜놈(여기서부턴 ‘일제’라는 말보다는 ‘왜놈’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만행이 가득하다)들이 엄청난 훼손을 했다. 꽤 오랜 기간 창경원으로 격하되어 불리던 것을 1983년 동물원을 서울대공원으로 이관시키고면서 창경궁으로 회복되었고 벚꽃나무 등도 소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 등으로 교체되는 등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육교를 통해 들어간 창경궁에서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함인정(涵仁亭)이다. 함인정은 사면이 모두 트인 형태의 정자로 영조가 문무과에 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우선 정전인 명정전부터 둘러보자는 생각에 외전과 내전 공간을 연결하는 통로에 있는 빈양문(賓陽門)을 지나 명정전(明政殿)으로 향했다.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인정전이 중층으로 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법궁보다 격이 낮은 이궁(離宮)이기 때문에 덕수궁 중화전처럼 단층으로 되어 있어 아담한 느낌을 준다. 광해왕 때 중건된 것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어 조선 시대 궁궐 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얼마전 다녀온 중국 자금성의 정전인 태화전과 비교했을 때 너무 초라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명정전을 지나 숭문당(崇文堂)을 거쳐 영춘헌(迎春軒)과 집복헌(集福軒)을 향했다. 영춘헌은 내전 건물이며 집복헌은 영춘헌의 서행각이다. ᄆ자형의 건물로 방에는 다기들이 놓여 있었다. 마루에 슬리퍼가 놓여져 있어 올라가 볼 수 있는 것 같아서 거닐어 보다가 문득 다기가 놓인 방석 위에 앉아 사진을 찍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결국 방으로 슬쩍 들어가 차를 마시는 자세로 사진 한 장을 간단히 찍고 나왔다.^^; 고궁 전각 중에 이렇게 들어가 볼 수도 있고, 방안에 이것저것 전시도 해놓고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전 건물들인 통명전(通明殿), 환경전(歡慶殿), 경춘전(景春殿), 양화당(養和堂)은 비슷비슷하게 생긴 건물들이라 대강 훑어보고 창경궁 관람을 마쳤다. 조금 올라가면 춘당지(春塘池)와 식물원이 있기는 하지만 권농장(勸農場) 자리에는 연못을 파서 크게 연못을 만든 춘당지나 아직 철거하지 못하고 흉물스럽게 있는 식물원에 정이 가지 않아서 생략하기로 했다. 창경궁은 건물들이 띄엄띄엄 있고 너른 공터들이 많은데 본디 전각들이 빼곡이 들어서 있던 것을 왜놈들이 이래저래 박살내고 심지어 동물원으로 쓰기까지 한 것을 정리하고 나니 지금의 공터가 된 것이다.


기가 막힌 일화가 하나 있는데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합방 일자를 고르고 있던 시기에 창경궁에 서양식의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을 만들었고, 전각의 내부 수리를 통해 진열 공간을 꾸며 도굴한 우리 유물들을 전시하였다고 한다. 이토가 고종을 안내해 창경궁 박물관을 구경한 적이 있는데 고종이 푸르고 아름다운 그릇들을 보고 이게 어느 나라 것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토가 “이것은 귀국의 고려시대의 도자기입니다”라고 대답하자 고종이 “우리나라에는 이런 것이 없다. 임금인 나도 모르는데 이게 어디서 나왔느냐”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이토는 차마 왕릉도굴품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대강 얼버무려 넘겼다고 한다. 고려청자 전문 장물아비 이토 히로부미... 총 맞아 잘 죽었다(이 일화는 우리궁궐지킴이 누리집(http://www.palace.or.kr)에서 이구열 한국근대미술연구소장의 [일제하 문화유산 수난사] 참조했음).


창경궁을 나서기 위해 홍화문(弘化門)으로 향하는 길에 있는 옥천교(玉川橋)는 복원 공사가 한창이라 돌아서 창경궁을 나갔다. 중국 자금성이나 원명원 등도 보수 공사가 한창이던데 우리나라 고궁을 비롯한 문화유적들도 보수, 복원 공사를 끊임없이 해서 옛 모습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경제 침체 속에 힘 없는 문화재청이 예산을 더 타서 쓸 여력이 있을지는 주장하는 나조차 믿지 않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보수하고 복원한 것이 훗날에는 또 하나의 문화유산이 될 수 있다. 명나라 시대부터 원형을 비교적 많이 유지해 온 자금성도 꾸준히 보수, 복원하고 있는데 이미 엄청나게 훼손된 우리나라의 궁궐은 더 많은 시일과 경비가 소요되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과제다.

(궁궐 답사기 2부 창덕궁 편으로 이어집니다~^^)
Posted by 익구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