씁쓸한 마음을 뒤로 하고 근처의 창덕궁(昌德宮)으로 향했다. 창덕궁은 태종이 창건한 궁궐로 경복궁에 재난이 생기거나 전염병이 돌 때 왕의 대피처로 삼거나 왕이 무료함을 피해 잠시 건너 가 쉬는 이궁(離宮)이다. 태종이 창덕궁을 창건한 이래로 역대 임금들이 경복궁보다 창덕궁에 머물렀다. 특히 임진왜란으로 불탄 경복궁보다 창덕궁이 먼저 중건되자 광해왕 이후로 역대 임금들이 창덕궁에 머물면서 경복궁 중건에 힘을 기울이지 않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기 전까지 조선의 법궁(法宮)으로서 경복궁을 능가하는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났던 곳이다. 창덕궁은 금원을 비롯하여 다른 부속건물이 비교적 원형으로 남아 있어 가장 볼만한 고궁이며,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976년까지는 자유관람제도를 실시하였으나 관람객들이 문화재와 원림을 훼손하는 경우 빈번하여 3년 간의 보수공사 끝에 1979년부터 상당 면적의 제한 구역을 설정하고 안내에 의한 시간제 관람을 실시하고 있다. 그래서 서울에 살면서도 창덕궁에 가보지 않은 경우가 의외로 많다. 처음에는 불평이 나오지만 창덕궁을 한 번 둘러보고 나면 왜 보호에 안간힘을 쓰는지가 수긍이 된다. 일반관람코스는 안내원을 따라 1시간 15분 정도 둘러보는 것이다 보니 안내원 따라가기 바빠서 궁궐 구석구석을 음미할 수도 없고, 사진 몇 장 찍기도 바쁘다. 하지만 그 덕에 한적하게 즐길 수 있다. 날씨가 안 좋은 탓도 있었지만 익구와 청원을 포함해 8명의 관람객이 한 조가 되어 창덕궁을 둘러보았으니 말이다.


입장 시간을 기다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을 들어서는 것부터 관람이 시작되었다. 지금의 돈화문은 1609년(광해왕 원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현재 남아있는 궁궐 정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돈화란 중용에 나오는 표현으로 大德敦化(큰 덕은 백성들을 가르치어 감화시킴을 도탑게 한다)에서 따왔다. 돈화문을 지나면 금천교(錦川橋)가 나오는데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다리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600년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다리 남쪽에 해태상, 북쪽에 거북상을 배치하여 궁궐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삼았다. 중학교 미술 시간에 금천교 그림을 가지고 풍경화를 그렸던 기억이 나서 더욱 각별하게 다가왔다.


금천교를 좀 더 음미하고 싶었으나 이미 안내원은 인정문을 지나고 있었다. 이어서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에 도착했는데 창덕궁 내에 있는 건물 중 유일한 국보이다. 창경궁 명정전보다는 규모도 크고 단청도 선명하며, 내부에는 전등이 설치되어 있는 등 호화로움이 더욱 돋보였다. 월대에는 청동 드므를 발견할 수 있는데 드므란 ‘입이 넓은 큰 그릇’이란 뜻의 순우리말로서 여기다 물을 담아 두어 화마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고궁 건물들을 보면 이 드므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중국 자금성에도 이 드므 비슷한 방화수조가 있는데 우리처럼 작은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 키 만큼 거대한 것이라 상징적 의미를 넘어 실용적으로 화재를 진압하는 데도 쓰였을 것 같다.^^; 목재 건물은 불에 취약하기 때문에 이런 장치를 둔 것이지만 우리네 궁궐은 허구한 날 불에 타고 다시 짓기를 반복해야 했다.


인정전을 나서 임금이 평소에 국사를 논의하던 편전(便殿)인 선정전(宣政殿)을 지나치게 되었다. 근처에 가보지도 못하고 그저 옆으로 지나가기만 했는데도 인상 깊었던 것은 역시 현존하는 궁궐 전각 중에서 유일한 푸른색의 유리기와였다. 맑은 날에 청기와가 햇살에 비쳐 눈부시게 빛나는 광경을 상상하니 황홀하기 그지 없었다. 자금성의 황금빛 기와보다 윤기 나는 파란 기와가 훨씬 매력적이었다. 청기와는 회색조의 일반 기와보다 세 배 정도 비싸다고 하는데 조선 초기에는 몇몇 사찰에 청기와를 썼고, 궁궐 건물로는 경복궁의 근정전과 사정전만이 청기와를 이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근정전 만큼은 청기와를 덮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앞으로 복원하는 건물 중에서 청기와를 썼으면 하는 바람이다.


선정전 오른쪽으로 내전의 중심이 되는 희정당(熙政堂)과 대조전(大造殿)이 있었다. 이 곳에는 그나마 내부를 공개해서 서양식 가구들도 볼 수 있었다. 왕의 침전이 딸린 편전인 희정당과 왕과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두 건물 다 화재로 소실된 것을 경복궁의 전각을 헐어 새로 지은 것이다. 대대적으로 중건된 이후 법궁의 지위를 회복한 경복궁에 대한 훼손의 일환인 셈이다.


드디어 창덕궁 후원(後苑)으로 향했는데, 후원은 궁궐의 북쪽에 있다하여 북원(北苑), 왕족을 비롯한 제한된 사람들만 드나들 수 있다하여 금원(禁苑)이라 불리기도 했다. 흔히 비원(秘苑)이라고도 하는데 비원이라는 명칭이 창덕궁까지 통칭하는 것으로 잘못 쓰여지기도 한다. 이는 창덕궁을 폄하하는 말로써 창경궁을 창경원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지므로 삼가야 한다. 비원은 원래 창덕궁 후원을 관리하는 기관의 이름 비원(秘院)에서 시작되었으나 1904년부터 秘院을 秘苑으로도 쓰게 되었다고 하는데 왜놈들이 갖다 붙인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얽혀 알쏭달쏭하다. 창덕궁 홈페이지를 보면 후원은 뒤뜰이라는 뜻으로 일반민가에도 적용되는 만큼 왕궁의 원유를 후원이라고 부르는 것은 격에 맞지 않아 후원의 명칭에 대해 여러모로 검토 중이라고 한다. 조만간에 얼른 결판 내서 명칭에 대한 혼란을 줄여야 할 것이다.


후원에 들어서자마자 그친 듯 했던 비가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쉬운 마음에 다시 우산을 펴들어야 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부용정(芙蓉亭)과 부용지다. 부용지는 네모난 연못에 둥근 섬이 운치있게 있어 경복궁 향원지와 마찬가지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표상하고 있다. 부용지에 물을 공급하는 이무기 조각이 쉴새없이 물을 내뿜고 있었다. 부용지 옆에 있는 부용정도 겹겹이 이루어진 처마가 화려했다.  


부용지 옆으로 자리한 주합루(宙合樓)는 아래층은 왕립도서관인 규장각이 있고, 위층은 열람실로서 이곳에서 부용지 주변의 빼어난 경관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주합루 정문인 어수문(魚水門)이 굳게 닫혀 있으니 아쉽게 돌아서야 했다. 정조의 친필인 宙合樓 편액도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 곳에서 정약용,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이 적서의 구별 없이 탕평정책을 수행하며 활동했을 것을 생각하니 왠지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정조의 근위세력 양성소였던 규장각은 점차 확대되어 내규장각과 외규장각으로 분리되게 된다. 정조는 영구히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들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만들지만 병인양요 때 프랑스에게 약탈 당한 후 아직까지도 외규장각 고문서 반환을 놓고 지리한 싸움이 이어지고 있다. 천만다행으로 규장각 소장 도서는 일제시기 경성제국대학으로 이전되었으나, 일본으로 반출되지 않고 현재 서울대학교 부속기관인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부용지 동쪽의 영화당은 영화당(暎花堂)은 임금이 신하들과 꽃구경을 하고 시를 지으며 노닐덧 곳이었으나 정조 때부터 과거시험을 보는 장소로 바뀌어 임금이 친히 참석한 가운데 과거시험이 치러졌다고 한다. 과거 시험의 응시자들은 영화당의 앞마당인 춘당대에서 과거 시험을 보았는데 지금은 담으로 막혀 있고 화장실 등의 휴게시설만이 있을 뿐이다. 영화당에서 큰 글씨로 과거의 제목을 내걸면, 아래쪽 춘당대에 앉아 있는 응시자들이 머리를 쥐어짜내서 멋진 글을 지어내는 광경을 상상해보았다. 정리해보면 영화당에서 시험 보고, 합격자들은 부용정에서 축하해주고, 규장각에서 책 읽히고 공부시키는 원스탑(one-stop) 센터인 셈이다.^^;


산책로를 따라 조금 걷다가 통돌을 갈아서 ∩자 모양으로 만든 불로문(不老門)을 지나며 만수무강을 기원했다. 불로문을 지난 왼쪽에는 기오헌(奇傲軒) 의두각(倚斗閣)이 나무들에 가려져서 어렴풋이 보였다. 기오헌과 의두각은 효명세자가 지은 건물로 단청을 칠하지 않은 소박한 건물로서 효명세자가 독서를 즐기며 나라 일을 생각하던 곳이다. 효명세자는 1827년 부왕인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는데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펴고 안동 김씨의 세도를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830년에 22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효명세자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그의 아들 헌종이 즉위한 뒤 익종(翼宗)에 추존되었기 때문이다. 익구의 翼자인 만큼 웬지 모를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익종은 훗날 고종에 의해 문조익황제로 추존되어 문조라고도 불리며 신위가 종묘 정전에 모셔져 있다.


조금 더 거닐다 보면 연경당(演慶堂)이 보인다. 1828년에 효명세자가 사대부 집을 모방하여 궁궐 안에 지은 민가형식의 집이다. 순조는 효명세자에게 국정을 맡기고 사대부 가옥을 본뜬 연경당에 가끔 들렀다고 한다. 방문할 때는 옷차림에서부터 모든 생활 양식을 사대부의 제도에 따랐다고 한다. 최고의 목수가 정성을 다해 지은 집으로, 당시 양반 가옥을 지을 때 모범이 되었다. 사랑채와 안채가 샛담을 쌓아 경계를 삼고 일각문 하나를 내어 통행할 수 있게 하였다. 사랑채에 손님이 오시면 이 일각문으로 하녀가 나와서 신발 개수를 세어서 음식 준비를 얼마나 할지를 가늠했다는 안내원의 설명으 재미나다. 남녀칠세부동석은 이제 확실히 옛말이 되었음이리라. 서고인 선향재(善香齋)와 선향재 뒤 편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농수정(濃水亭)도 저마다의 멋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연경당을 지나 산책로를 따라가니 주합루 뒤 편에 있는 희우정(喜雨亭)과 서향각(書香閣)을 먼발치에서나마 볼 수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산보를 하며 내려오는 길에 내의원(內醫院)이 보였다. 본래는 세자가 학자들과 유교 경전을 공부하던 성정각이었으나 1910년대부터 왕과 왕족의 병을 치료하고 약을 조제하던 내의원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마지막 행선지로 어차고(御車庫)를 들렀다. 과거에는 빈청(賓廳)이라 하여 정승들이 편전에 들기 전에 대기하며 국사를 의논하던 장소였으나 1910년대 이후부터 어차고로 이용되었다. 현재는 순종과 황후가 사용하던 1918년 캐딜락, 1914년 다임러와 평교자, 초헌 등의 조선 시대의 교통수단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주정소인데, 임금이 궁밖에 행차할 때 부품을 분해하여 싣고 가다가 쉬실 때 사용하는 것으로 간이 휴게소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재미난 것은 이 것을 72조각으로 해체시켜 나누어 가지고 가다가 휴식시간에 다시 조립을 한다는 점이다. 진열창 너머로는 자세히 볼 수 없으니 잘 확인할 수는 없었다. 이로써 창덕궁 관람을 마치고 금호문(金虎門)을 나섰다. 자연을 인위적으로 바꾸지 않고 있는 그대로 즐기려는 한국의 정원 예술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창덕궁은 그나마 많이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절반 이상이 파괴된 것이라고 하니 국권이 약할 때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얼마나 침탈되었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경복궁의 경우는 고작 10분 1정도만 남아 있다고 하니 앞으로 지속적인 복원, 보수 공사가 시급하다.


2004년 5월 1일부터 기존의 창덕궁 일반관람코스에서 후원의 일부 구역인 관람정, 존덕정, 옥류천 지역을 추가로 개방하는 특별관람코스가 만들어졌다. 옥류천 지역은 1976년 출입이 금지된 이래 28년 만에 개방되는 곳인데 관람 횟수와 인원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어 관람하기가 녹록지는 않다. 창덕궁 관람은 안내원 따라 가기 바쁘기 때문에 놓치는 부분이 많은데 익구는 조만간에 특별관람코스로 관람해서 못보고 놓친 부분도 확인하고, 새로 개방된 비경도 감상할 계획이다.


창덕궁을 나서는 길에 때마침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이 돈화문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궁궐문을 개폐, 경비, 순찰하는 업무를 수행한 수문군이 교대하는 의식으로 전통 궁중문화의 재현행사로서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어, 영어에 이어 일본어 안내를 해주는데 그만큼 일본 관광객이 많다는 뜻이다. 조선 궁궐들을 이토록 파괴한 것이 누구인데 우리 나라 궁궐에는 일본인 관광객이 참 많았다. 복원, 보수 공사도 서두르면서 지금은 턱없이 낮게 책정된 우리의 문화 유산 관람료도 조금은 높여서 재정을 늘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해봤다.


본디 여행을 좋아하지 하지 않는 익구지만 역사 기행 형식은 앞으로도 종종 다니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창덕궁 특별관람코스와 더불어 덕수궁, 원구단, 아관(구러시아공사관) 코스와 남산공원 내 한옥마을, 와룡묘 코스 같은 프로그램들을 개발해서 짬을 내서 둘러볼 예정이다. 늘 바쁘게 사는 우리들이지만 그 정도 여유는 약간의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낼 수 있다. - [憂弱]
Posted by 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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